[Opinion] 머무름 대신 남겨짐만이 존재하는 삶 - 트랜짓 [영화]

글 입력 2022.01.25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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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미지의 범람 속에서 살고 있다. 사실 이를 자각하지도 못한 채 살아간다고 하는 게 옳을 정도이다.

 

 

사진은 피사체가 된 사람을 상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사물로 만들어 버린다. 카메라가 총의 승화이듯이, 누군가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살인의 승화이다.

 

- 사진에 관하여/ 수잔 손택

 

 

'사진 혹은 영상을 찍다'를 표현하기 위해 영어는 동사 'shot'을 사용한다. 찍는 것은 곧 피사체를 총으로 쏘는 행위라는 것을 암시하는 단어 같아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매일 뉴스나 SNS 피드 등을 통해 타인의 불행을 지나치게 자주 목도한다. 'shot' 되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고통에 몸부림 치는 모습을 말이다.

 

그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지 돌아보게 된다. 적당한 무게로 공간을 누르는 지붕, 바람을 알뜰히 막아주는 벽에 둘러싸여 아주 편안하고 안전한 상태로 그저 미간을 살풋 찌푸리기만 한다. 마음으로나마 잠시 안타까움을 느끼고 나면 나는 적어도 누군가의 고통에 공감할 줄 안다는 면죄부가 생긴다. 이미지를 끝없이 소비하는 우리에게 불행의 이미지는 과연 어떻게 바래져 버린 걸까. 우리는 그 이미지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것이 좋을까. 영화는 이에 대해 고민하기에 참 좋은 매체이다.

 

영화 <트랜짓> 속, 경찰에 의해 끌려 나가는 난민과 난무하는 울음소리 속에서 그저 그 모습을 지켜볼 뿐인 투숙객들을 보며 내 이러한 고민은 끝없이 뻗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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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짓>은 유럽 사회 전반의 정치 사회적 문제를 은유함으로써 거대 담론의 틀을 잡고, 그 속에 인물 개개인의 사연들을 녹여내 미시 서사까지 놓치지 않은, 둘 사이의 균형을 아주 잘 유지한 수작이라 느꼈다. 아주 개인적인 주인공 '게오르그'의 이야기가 전체의 서사로 확장될 가능성을 지닐 때 <트랜짓>은 그 힘을 뻗친다.

 

후술할 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트랜짓>의 줄거리를 간단히 첨부한다.

 

[독일군이 파리로 진군하자 ‘게오르그’는 가까스로 마르세유로 탈출한다. 그는 자살한 ‘바이델’ 작가의 가방을 갖고 있는데 가방에는 작가의 원고와 아내에게서 온 편지, 멕시코 대사관에서 온 비자 허가서가 있다. ‘게오르그’는 ‘바이델’ 작가로 신분을 위조해 멕시코로 떠나려 하지만 신비한 여인 ‘마리’를 만나며 모든 것이 변하게 된다.]


 

 

대체 역사? SF?


 

영화는 아주 독특한 연출 방식을 취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이지만 정작 영화에는 오늘날 현대적인 프랑스 도시의 모습이 등장한다. 인물들은 전쟁 난민이 되어 떠나고 남겨지기를 반복하는데 배경이 되는 도시는 너무나 자유로운 모습이라 일종의 인지 불일치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영화의 가장 독특한 지점이다.

 

그러나 또 2020년의 프랑스 도시를 물리적 배경으로 삼았다고 결론 내리기에는 어설픈 부분이 많다. 현대적인 건물, 의상,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 풍경 등은 현대적이지만 도시의 시스템은 꼭 1940년대의 그것을 그대로 차용한 듯 하다. 특히 현대 문명의 상징인 전자기기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했다. 영화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대사관의 풍경, 행정 처리 방식, 허술하게 위조가 가능한 종이 비자와 ID 카드, 주인공 게오르그의 사칭이 너무나 쉽게 이뤄지는 상황들 등은 감독이 독특한 아나크로니즘적 연출 방식을 고수했음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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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은 보통 영화를 보며 게임 스테이지를 하나씩 깨듯이 정보를 얻어 간다. 영화의 진행 시간과 관객의 정보량은 정비례하게 증가하고, 그럴 때마다 '나는 이 서사를 이해하고 있다'는 안정감 역시 쌓여간다. 그러나 <트랜짓>은 분명 스테이지를 끝낸 줄 알았는데 끝없이 등장하는 몬스터마냥 관객의 머리를 연신 헤집어 의문을 낳게 한다.

 

주요 역사적 사건이나 시각 정보로 영화의 시공간적 배경을 유추하고 거기에 안주해 영화를 보던 우리에게 <트랜짓>은 새로운 영화적 체험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연출 방식은 '앎에 대한 오만'과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진 관객들에게 '정말?'이라고 되묻는 효과를 지니는 것이다.

 

 

 

머무르고 싶은 자, 머무르지 않을 것을 증명하라


 

영화의 제목 '트랜짓(Transit)'은 원작 소설의 '통과 비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경유'를 뜻하는 말이다. '경유'란 매우 모순적인 개념이다. 그 자체로 잠시 머무르는 곳일 뿐 완전한 도착을 이루지 못한 상태라는 점에서 불안정하지만, 확고한 도착점을 목표로 매개하는 지점이라는 점어서는 확신성 또한 지니고 있다. <트랜짓>에서 등장하는 대부분의 갈등은 이 둘 사이의 갈등이다. 인물들은 모두 경유지 마르세유에서 서로의 불안정성을 공유하는 동시에 제각각 다른 삶의 목표를 확고히 지닌 채 그곳에 머문다.

 

<트랜짓>은 기본적으로 장소성에 대한 서사라고 느꼈다. 내가 머물 수 있는 자리와 장소가 있다는 것은 인간됨을 득하는 것과 유사하다. 늦게 참석한 술자리, 술집 문을 열고 들어 갔을 때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일행들이 손을 흔들며 나를 반기고, 내가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타인의 환대에 의해 나에게 맞는 자리와 장소를 제공 받는 일은 그 자체로 나의 존재를 증명받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트랜짓>은 이것이 점차 어려워지는 현실을 보여준다. 게오르그가 호텔에 머무르고자 지배인과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에서, 지배인은 '이 호텔에 머무르고 싶다면 이곳에 계속 머물지 않을 것을 증명하라'는 주장을 펼친다. 도망자 신세의 게오르그는 파리에서 도망쳐 마르세유로 왔고, 곧 멕시코로 가리라는 확고한 목표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곳에서도 그를 위한 온전한 장소를 제공 받지는 못하고, 이는 멕시코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늘 날 우리는 내가 머물 자리가 점차 협소해지다 못해 끝내 소멸할 것만 같은 위기감에 시달린다. 난민이나 무국적자들은 또 어떠하겠는가. 영화 <트랜짓>에서는 진실로 서로에게 자리를 마련해주는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를 진심으로 배려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개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끝없는 경우'를 만들어낸 사회와 시스템의 잘못으로 보인다.

 

*

 

영화 <트랜짓>을 보며 떠올린 상념들을 이리저리 풀어 놨지만 납작한 텍스트만으로는 채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영화였다. 나쁜 선택과 더 나쁜 선택만이 존재하는 뻔한 상황 속에서 인물들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 내내 가슴이 답답했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 날 가장 필요한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현재와 과거를 아우르고 새롭게 연결하는 연출 방식은 분명 큰 함의를 지닌다.

 

영화에서는 '떠나는 자'와 '남겨진 자'의 구도가 중요하게 반복된다. 떠나는 이는 능동적이면서도 이기적인 인물로, 남겨진 이는 수동적이고 불가피한 인물로 비춰질 수 있으나 이 영화는 근본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음'에 대해 말한다. 즉, 떠나기 위해 남겨질 수밖에 없고, 남겨졌기에 또 떠나는 사람들이 끝없이 스치고 교차하며 서로에게 완전히 스며들지 못하는 이야기이다. 떠난 사람은 떠난 자리에서 또 다시 남겨진 이가 된다. 이것이 끝없이 반복된다.

 

왜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 머무를 수 없는 걸까. 머무름 대신 남겨짐만이 난무한 마르세유에서, 게오르그의 눈에 비친 유연하고 시적인 지옥을 목도하고 싶다면 영화 <트랜짓>을 감상하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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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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