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로 다른 모국어로 말하는 사람들 [도서/문학]

양안다 - <백야의 소문으로 영원히>를 읽고
글 입력 2022.01.15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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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마음으로 사랑하기



 

차이를 좋아해서 사람들은 서로 다른 옷을 입지만 우린 가끔 같은 옷을 입는다 그래도/놀이기구를 타면 비슷한 소리를 지를 거잖아?

 

- 가끔 도베르만

 

 

그러나 완전히 다른 그 사람에게서 나의 모습을 발견할 때 나는 비로소 그를 사랑하게 된다. 오래 관찰하고 함께해야 가능한 일이다.

 

놀이기구를 타면 비슷한 소리를 지르는 타인들을 볼 때 시인은 연대의 가능성을 본 게 아닐까. 이 지독한 세계에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우린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낯선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본질적으로 불안하며 나약한 인간일 뿐이라는 진실. 슬프지만 아름답고, 안전한 진실이다.

 

우리는 닮았다. 따라서 연대하고,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우리의 세계는 결코 겹쳐질 수 없다.

 

 

만약 우리, 미래가 다가오기 전에 마음을 겹칠 수 있다면, 우리가 같은 장르로 묶인다면, 서로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 본다면, 그때서야 나는 네가 모래 위에 적었던 문장이 무엇인지 알게 되겠지 안녕, 너는 그곳이 미래인 줄도 모르고 내게 인사를 건네겠지 빛으로 축조된 성, 그 한가운데에 서서

 

- 밝은 성

 


너는 천진하게 화자에게 인사를 건넨다. 함께 축조한 성이 무너진 뒤에야 그 인사를 마주할 수 있다. 서로의 세계에 존재하던 두 사람이 함께 둘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 성은 빛이다. 아름답다. 그러나 일시적이다. 언제든 쉽게 무너지고, 환상적이다. 기록되지도 않고, 고정되지 않는다.

 

빛으로 축조된 성에서 누군가와 함께 몸을 겹치고 있는 순간, 우리가 비로소 하나가 됐다고, 우리가 하나의 세계로 겹쳐졌다고 믿게 되는 순간이 올까.

 

화자는 그와 함께 성에서 죽고 싶었던 것일지 모른다. 너와 나를 한 시공간에 고정시키면 빛으로 축조된 성이 무너질 수 없다는 믿음. 그렇게라도 사랑의 가능성을 믿고 싶어하는 마음.

 

양안다의 시는 세계의 모순을 부정하지 않고, 사랑의 불가능성 또한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믿는다. 끝 간 데 없는 이 시인의 순수함은 숱한 좌절로부터 뻗어져 나온 것일까. 아니, 그렇다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좌절하기 이전에 또다시 미끄러지는 사랑에서 온다.


 

평생 너와 어긋날 거야 난 그렇게 나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있어 내가 너와 평행하지 못한다는 게 너무 슬프다, 그런 생각을 조금은 들켰으면 했다
  

- 크로스 라이트

 


나의 이해는 간극의 인정 이후에 온다. 그를 영영 알 수 없다는 마음으로 그를 이해한다. 그를 다 알아야 한다는 마음은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너이고, 너가 나라는 생각이 든다면 우리는 서로를 견딜 수 있을까.

 

완전히 간파됐다는 생각만큼 두려운 건 없을 것이다. 기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세속적인 이해말고, 정말 본질적으로 이해받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늘 그와 나 사이의 공백을 만든다. 미세한 틈이 우리 사이를 안전하게 보호해 줄 거라고 믿는다.

 

 

 

2. 언어라는 간극이 만든 불안 공동체


 

 

만국의 언어를 하나로 통일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가 있을 거야 그런 언어를 찾으려고 아이들은 제멋대로 세계를 돌아다니겠지 각 나라의 인사말과 사랑한다는 말을 잔뜩 주워 모아서, 안녕, 폼락쿤, 떼아모, 굿바이...... 일기장에 적고 바라보겠지

 

- 결국 모두가 3인칭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언어 질서에 종속된다. 자신의 근원적인 결핍에 대하여, 욕망에 대하여 끝내 말할 수 없는 모순에 갇힌다. 자신과 같은 마음의 타인(저항력)은 없다. 있다 하더라도 마음을 미완의 언어로 뱉어내는 순간 변형되어 버린다.

 

나만의 언어를 찾는 일은 필연적이다. 타인과의 소통은 부재한 채. 내가 고양이의 언어(저항력)로 말한다면 그는 개의 언어로 답할지 모른다. 둘은 결코 전염(저항력)될 수 없는 병에 걸린다.

 

김성대의 시 <애완의 시절>을 보면 시인은 말을 감염이라 표현한다. 감염은 병원체가 숙주의 체내로 침입하여 증식, 기생 상태가 성립한 것이라면 전염은 감염이 잇따라 전하여져 가는 상태다. 그러니까 감염될 순 있으나 전염될 수 없는 이 언어라는 병은 더 두렵고 슬프다. ‘함께’ 아플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불안은 혼자 느끼는 것이다 함께 느낀다면 그것은 징조였고 징조의 결과는 침묵이었다

 

- 여진

 

 

불안은 ‘함께’ 할 수 없는 질병 중 하나다.

 

 

온몸이 아프고 가슴이 아프고 졸려요, 이런 증상을 찾아봤었어 그런데 병명이나 치료법은 하나도 나오지 않고

 

- 클로즈드 서클댄스

 


불안은 내부에 몸을 웅크리고 있다. 이미 항상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불안이 불안일 수 있다.

 

명명할 수 없는 근원적 질병은 불안으로부터 온다. 그 불안이 사라진다면 인간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겪으며 살아가야 한다.

 

 

난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혼자 춤만 췄어

 

- 클로즈드 서클댄스

 


화자는 춤을 추는 방식을 선택한다. 그건 병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다. 불안의 흐름에 그 자체로 몸을 맡기기 위한 동작이다. 오래 불안을 직면한 사람의 성숙한 태도처럼 느껴졌다.

 

불안을 언어로 고정하는 순간 불안은 더이상 불안일 수 없다. 이해받는 기분 때문이다.

 

시인은 너의 불안을 알고 있다는 단순한 위로를 전하지 않는다. 우린 우리가 만든 기록물 속에 갇혀 슬픔만 느끼게 될 거야 라는 문장이 특별한 온도로 와닿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는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로 결코 누군가의 마음도 대변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시와 언어에 특별한 힘을 부여하지 않는다. 내가 쓰는 시는 당신들에게 필연적으로 가닿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무언의 삶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도저히 명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봐준다. 우리 함께 견디자고 고요히 말해준다.

   

 

 

3. 가능 세계의 시인이라는 관찰자



 

식당에 가면 어디에 앉을지 망설였다 그래서 내가 앉은 곳은 항상 그의 건너편이었다.

 

- 우연오차

 


가능세계 속에서는 그와 나는 만날 수도, 만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건 두 갈래 길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어떤가. 만났다. 만나지 않았다. 그 두 가지 가능성의 이후 말이다.

 

무수히 많은 길이 뻗어져 나온다. ‘나’들은 하루 동안에도 빠른 속도로 늘어난다. ‘나’들이 그저 환상으로 남는 게 아니라 실제로 어떤 세상에 존재한다는 감각이 강하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그들이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내 삶을 완전히 망쳐놔도 상관없을 것 같다.

 

 

두 갈래 길에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하는 동안 그는 왜 세 갈래가 아니냐며 억울해했다.

 

- 우연오차

 


화자는 우연오차 속에서 그 앞에 앉기를 선택했다. 어쩌면 선택이 아니라 우연이 빚어낸 운명일지 모른다. 그 옆에 앉았다. 그와 대화를 나눈다. 그와 사랑하기로 결정한다.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얼마나 많은 우연에 의해, 얼마나 많은 오차 범위 속에서 진행될까. 모든 관계는 그렇다.

 

 

옆을 더듬어 그를 찾았다 그러자 그가 존재하기 시작했다/비로소 서로가 존재하고 있었다.

 

- 우연오차

 


가능세계 속에서 우리는 그저 그가 여기 있음을 믿는다. 손을 더듬어 그인지. 그가 아닌지 모를 존재를 만진다. 그는 어쩌면 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라고 믿으며 안도한다. 그가 여기 있다고, 내가 여기 있다고. 나는 망가져도 상관없을 것 같지만 그는 행복하길 바란다. 함께이길 바란다. 그래서 우연오차를 줄이려 한다. 그와 만나지 않았을 가능 세계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의 삶을 순응하며 우연이라는 운명에 몸을 내맡긴다. 오로지 그를 만나기 위해서.

   

 

나는 이 세계의 너희를 그렇게 이해했다 나의 역할은 너희들을 관찰하고 판단하는 일, 무슨 일을 하는지 파악하는 일이라 생각했고

 

-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시인은 이 세계의 자신을 관찰하는 자로 규정한다. 이 세계의 불안과 근원적인 욕망과 결핍을, 슬픔을 더 오래 바라보고, 쓰겠다고 선언한다.

   

 

어쩌면 8월,

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야기를 너에게 들려주고 싶다

그 이야기는 인과가 망가진 이야기고, 어떤 여자가 죽고, 여자의 영혼이 어떤 남자의 영혼을 만나고, 둘은 세계의 예정보다 일찍 만나고, 그래서 인과가 망가져서 여자의 육체가 죽게 되는 이야기

 

- Day For Night

 

 

양안다는 인과라는 게 없는, 있더라도 뒤틀리는 게 당연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존재하는 세계를 들려준다. 우리의 모국어는 모두 다를지라도 괜찮다. 가능 세계에서 한 번쯤은 서로를 꽉 껴안았겠지. 모든 걸 내던지고 춤을 췄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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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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