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미완성의 그림 [문화 전반]

유화 색칠하기를 통해 얻은 깨달음
글 입력 2022.01.14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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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화 그리기를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우리 학교는 신입생이라면 누구나 미술 수업의 첫 과제로 유화 그리기를 해야 했는데, 워낙 미술에 젬병이었던 나는 그 과제가 얼마나 부담스럽고 무겁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그리 크지 않은 캔버스였지만 내게는 바다보다 더 커 보였고, 그 앞에 앉을 때마다 느껴지는 막막함이 나를 짓눌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그려보고 싶은 작품이 있었다.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별이 빛나는 밤'은 그림이라고는 전혀 관심도, 흥미도 없던 내가 유일하게 제목을 알고 있는 작품이자 꽤 오래도록 좋아해 온 작품이었다. 어차피 완벽하게 잘 그릴 수 없다면 그리고 싶은 그림이라도 도전해 보고 싶었다.

 

문제는 작품 선정은 누구보다 빨리했지만, 도무지 시작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새하얀 캔버스 앞에 앉으면 그걸 보고 있는 내 머릿속도 온통 새하얘졌다. 오랫동안 망설이며 손도 못 대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친구들은 가끔 도와주고, 자주 조언을 해주었다.

  

그렇게 내 생애 첫 유화 작품을 완성했을 때 의외로 나는 흡족했다. 부족한 내 그림 실력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마무리했다는 그 자체의 기쁨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꾸미기] 10.jpg

(딱 봐도 미완성이라는 평가를 들었던 나의 첫 유화 작품)

 

  

그러나 그 기쁨은 얼마 뒤 미술 시간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보여주며 품평하시던 선생님이 내 작품을 보시자마자 "이 작품은 딱 봐도 미완성이죠?"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지만, '미완성'이라는 말이 그때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같은 반 친구들 앞에서 질책받는 것 같아 많이 괴로웠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 결과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차라리 그림 실력에 대해 지적받았다면 덜 속상했을 텐데.


우스운 건 내가 그 '미완성의 그림'을 들고 집에 갔을 때, 엄마는 너무 좋아하신 나머지 내 방에 못까지 박아가며 걸어두셨다는 것이다. 애초에 부족한 나의 그림 실력을 너무 잘 알고 계셨던 터라 엄마의 눈에는 여태껏 내가 그린 그림 중 가장 잘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엄마의 그런 요란스러움이 조금 위로가 되긴 했지만, 그 후로 나는 결국 더욱더 그림과 담을 쌓고 살게 되었다. 한동안은 그림을 감상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나의 유일한 취향이자 단 하나의 기호인 '별이 빛나는 밤'을 잊을 수는 없었다. 작품이 나에게 줬던 감동까지 잊어버리기엔, 그 일은 내게 정말 하찮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꾸미기]합본.jpg

 (선물받은 유화 그리기 세트로 '별이 빛나는 밤'을 완성해가는 과정)

 

 

지난여름,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우연히 이 추억에 대해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 야외 활동이 급격히 줄어들어 집에서 할 수 있는 취미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이었는데, '유화 색칠하기'가 유행이라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문득, 고등학교 시절의 그 추억이 떠올랐다. 나는 나의 모자란 그림 실력을 설명하는 일종의 에피소드로 그 추억을 활용할 만큼 많이 유연해져 있었다.


친구는 내 이야기가 재미있었는지 헤어지면서 나에게 유화 색칠하기 세트를 선물했다. 물론 그림은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택배를 기다리는 동안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자꾸만 걱정됐다. 하지만 물러서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며칠 후 택배 상자가 도착했고, 조심스레 꺼낸 캔버스는 새하얗고 막막했던 고등학교 시절의 캔버스와 다르게 이미 완성된 스케치 위에 어떤 색을 칠해야 할지도 정해져 있었다. 용기가 샘솟았다.


그 용기를 바탕으로 나는 빠르게 색칠에 몰두했다. 나름 비장한 각오로 색을 칠해 나갔고, 심지어 일이 끝나고 거의 매일 2~3시간씩 작업에 매달렸다. 색칠하는 순간에는 아주 미약하고 작은 부분이라 그림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 같았지만, 매일 꾸준히 성실하게 색을 칠하다 보니 어느새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마치 낙숫물로 바위를 뚫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꾸미기]2.jpg

(별이 빛나는 밤)

 

 

이상한 것은 몰입하면 할수록 묘한 해방감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아주 깊이 몰입할 때면, 그 어떤 것도 남지 않고 '그림과 나'만 남는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것이 색칠이라는 단순 작업이 주는 쾌감인지,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완성하고 싶어 했던 욕망인지, 둘 다인지 알 수 없지만, 오롯이 내가 좋아하는 작품과 마주할 수 있다는 게 참 행복했다.

 

그리고 꼬박 한 달 이상을 색칠에 매달려 작품을 완성했을 때, 나는 비로소 내 안에 남은 작은 가시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괜찮은 척했지만 살아오는 내내 나에겐 '별이 빛나는 밤'이 곧 '미완성'처럼 여겨졌음을 말이다. 그래서 몰입하면 할수록, 완성되어가면 갈수록, 해방의 자유로움을 느꼈던 것 같다. 솔직히 내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작은 가시가 이렇게 오래도록 나를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어딘가 모르게 씁쓸하기도 했다.

 

물론, 이제는 누군가가 나의 그림을 '미완성'이라 평가한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쏟았던 나의 노력과 진심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안다. 혹시 지금 내가 그리고 있는 이 그림이 진짜 '미완성'으로 끝난다고 해도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더 단단하고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다.

 

아무리 새하얀 캔버스가 막막하게 나를 짓눌러도, 내 그림과 진정으로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니까.

 

 

 

에디터_서은해.jpg

 

 

[서은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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