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자격과 능력 - 뮤지컬 칠칠

글 입력 2022.01.0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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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칠칠>은 조선 숙종시대 화가 최 북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허구 이야기이다.

 

최북은 조선후기 <추경산수도>, <한강조어도>, <누각산수도> 등을 그린 화가로 본관은 무주(茂朱). 초명은 식(埴). 자는 성기(聖器)·유용(有用)·칠칠(七七), 호는 월성(月城)·성재(星齋)·기암(箕庵)·거기재(居基齋)·삼기재(三奇齋)·호생관(毫生館)이다.

 

그는 기이한 행위를 일삼아 광생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나 그가 그림을 팔면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구하기 위해 몰려들었다고 한다.

 

 

시놉시스

 

그림으로 먹고사는 직업 화가, 조선 최초의 환쟁이 최 북. 최 북은 ‘최산수’라 불리며 산수화의 달인으로 이름을 높이지만 자신의 그림을 물에 담그거나, 판매한 그림을 찢는 기행을 일삼는다. 그의 기행에 사람들은 점점 그를 떠나가지만 유일한 친구 무명만은 그의 곁을 지킨다. 어느 날, 북은 자신의 대표작을 그리기 위해 무명과 금강산으로 떠나고 그곳에서 외면했던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마침내 자신의 혼을 넣은 그림을 완성하고 한양으로 돌아온 날, 세도가 원준이 그림을 사기 위해 최 북과 무명을 찾아온다. 얼굴을 가린 발 앞에 앉아 그림을 보던 원준은 그림에 대한 답례라며 이야기 하나를 시작하는데…..

 


본 극은 자격과 능력 간의 간극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신분에 따라 이미 정해져 있는 자격과 그 자격에 맞지 않은 능력을 가진 두 남자의 이야기이다.

 

등장인물은 최 북, 무명, 원준으로 총 세 명이다. 최 북은 원래 무명의 생전 이름이었으며, 그가 죽고 난 후 상훈이 그의 이름을 빌려 환쟁이로 살아간다. 원준은 상훈의 아버지로서 세도가이다. 이 중 무명만 혼자 외면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그는 혼자 현대식 머리를 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오직 무명만이 자유롭게, 즉 사회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살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죽어 그 체제에서 벗어난 존재임이 드러난다.

 

극은 최북의 독백으로 시작해 무명과의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다시 과거로 돌아갔다 후에 현재로 돌아온다. 수미상관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최 북과 무명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하고자 할 일을 할 수 있는 그 자격은 누가 주는 건데?"


 

노비인 무명은 글을 읽고자 하고, 양반가의 자제인 최 북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다. 이에 비밀리에 최 북은 자신의 (공부) 자리를 무명에게 주고 자신은 옆에서 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결국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원준에게 들키게 되고 이에 분노한 그에게 무명은 결국 목숨을 잃는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았다. 이에 절규한 최 북(원래 상훈)은 무명(원래 최 북)의 이름을 쓰며 그의 신분으로, 환쟁이로 살아간다. 최 북은 자신이 하고자 할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스스로에게 ‘스스로’ 직접 ‘부여’ 한 것이다.

 

그림을 그려도 된다는 자격이 부여되지 않은 상훈에게 ‘최 북’이라는 이름은 자격을 부여해 준 도구였던 것이다.

 


 

"무엇을 그리느냐가 중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을 그리느냐가 중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명 양반 옷을 입고 그 자리에서 시를 읊는 행위가 ‘무엇을’ 달라지게 하는가? 그것이 제가 글을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는 것인가? 귀천은 언제 오는 것입니까? 

 

최 북 허례허식이다.

 


실재(reality)가 아닌 실체(substance)를 중히 여겨야 한다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대사이다. 이 말은 곧 신분제 사회에서 귀천이라는 허례허식이 아니라, 귀천에 따라 나누어진 각 개인에 내재해 있는 능력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즉 자격과 능력은 분리되어야 하며 능력을 통해서 자격이 부여되는 형태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능력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겉치레에 상관없이 누구나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어야 하는 것이다. ‘무엇을 그리느냐’는 곧 자격이고 ‘어떤 마음으로 그리느냐’는 능력이다. 이는 전자의 경우는 이미 정해진 형식 속에서 결정하는 것인 반면, 후자는 자신이 처음부터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맥락에서 무명과 최 북의 대화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의문점인 “하고자 할 일을 할 수 있는 그 자격은 누가 주는 건데”에 대한 답은 바로 ‘자신의 마음’이 된다. 즉, 자신의 마음이자 능력이 그 자격을 부여해 주는 것이다.

 

 

 

"나는 나를 미워하고 괴로워하면서 나로서 살아간다"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무명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끝까지 반대하는 아버지 원준의 태도로 인해 최 북은 괴로워한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나는 나를 미워하고 괴로워하면서 나로서 살아간다. 나는 살아있다.

 


그는 자신을 혐오하지만, 자신으로서 살아간다. 자신을 부정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긍정하며 살아간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통해 자신에게 자격을 부여했지만, 그 자격은 주관적인 자격에 불과할 뿐 객관적인 자격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태도는 그가 죽음을 택하지 않고 삶을 이어 나가게는 해주지만, 세상과 다른 태도와 단절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동시에 자기혐오 및 부정적인 감정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이 그가 왜 자신의 그림을 찢고 물에 적시는 등의 기이한 행위를 하는지를 조금이나 설명해 주는 듯하다.

 

 *

 

정명 사상이 지배하고 있던 유교 사회였던 조선. 정명 사상, 즉 군군신신부부자자는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가 지켜야 할 도리가 있으며 이것을 지키는 것이 곧 인(仁)이었다. 조선사회에서는 이것이 곧 이것이 ‘올바른’ 것이었다.

 

하지만, 신분사회였단 조선에서 정명 사상은 선천적으로 부여되는 신분제도에 의해 능력이 후천적으로 결정되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라도 신분에 매여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도,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없었다.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것이었기에 이에 성공한 자는 극히 드물었다. 본 극은 이러한 한계에 저항하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여 만들어 가는 이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간극은 현재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이 처한 현재상황과 자신의 능력 사이의 간극에 대해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조선시대와 현대사회는 체제가 완전히 다르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사회이다.

 

하지만, 체제 위에서의 논의가 아닌, 그 자체로의 논의로 들어가면 이 둘 간의 간극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논의임을 알 수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적인 한계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또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으나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여 좌절하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 무엇을 하고자 할 때, 그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자격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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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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