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언어와 왜곡과 현실과 세계 - 희랍어 시간 [도서/문학]

세계가 무너지면 우린 소리 낼 수 없다
글 입력 2022.01.03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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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의 전반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유의해주세요.

 

 

언어는 세계다. 볼 수 없는 것조차 언어로 규정짓고 나면 우리 머릿속에 자리 잡는다. 사랑, 삶, 혐오 따위가 그 예다. 말을 뱉는다는 행위는 곧 내 세계를 뱉어내는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얄팍한 우스갯소리도, 몇 년을 고뇌한 끝에 내뱉은 사랑 고백도 모두 내 세계의 일부가 입을 통해 세상으로 떨어져 나간 살점이다.

 

그래서 말은 혀와 목구멍보다 더 깊은 곳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입안으로 손을 넣어 목젖을 잡고 그 아래 혀뿌리를 움켜쥐어도 말은 더 깊은 곳에서 잠들어 있어서 만지려야 만질 수 없다.

 

 

 

언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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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하찮은 하나의 문장도 완전함과 불완전함, 진실과 거짓, 아름다움과 추함을 얼음처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p15
 

 

<희랍어 시간>에서 주인공 여자는 두 번이나 말을 잃었다. 실어증이었다. 첫째는 언어의 끔찍한 분명함 때문이었다. 내 농담은 내 살점, 누군가의 칭찬은 그의 살점. 살이 썩으면 악취가 진동한다. 말은 뱉어지는 순간에 죽기에 여자는 언어를 들으며 죽음을 되뇌었을지도 모른다. 십 대 때 여자는 언어에 과민했던 탓에 더이상 언어로 생각하지 않고 언어로 말하지 않았으며 언어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러다 불어의 단어를 우연히 만나 말을 되찾았다.


 
이십 년 만에 다시 온 침묵은 예전처럼 따스하지도, 농밀하지도, 밝지도 않다. 처음의 침묵이 출생 이전의 그것에 가까웠다면, 이번의 침묵은 마치 죽은 뒤의 것 같다. (중략) 지금 그녀가 이 사설 아카데미에서 고대 희랍어를 배우는 것은, 이번에는 자신의 의지로 언어를 되찾고 싶기 때문이다. -p19
 

 

두 번째로 여자가 말을 잃은 이유는 세계의 붕괴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자는 이번 침묵을 죽은 뒤의 것처럼 느낀 듯하다. 여자는 각종 불행을 겪고 있었는데 그중 큰 불행은 아이에 관한 것이었다. 사랑하는 것을 잃을 위기에서, 이미 잃은 상태에서 여자의 세계는 무너졌다. 언어는 필연적으로 세계를 담기 때문에 정립되지 않은 세계는 형언될 수 없다. 해결될 조짐 앞에서 말은 혀끝을 웃돌고 해결될 낌새도 없을 때엔 목구멍 그 아래로 훌쩍 숨어버린다.

 

여자가 말을 되찾으려 애쓰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소리낼 수 있는 세계를 찾고 싶어서. 아이를 데려간 이에게 악 받쳐 말하려 해도 엉킨 속 때문에 자음 하나 꺼내지 못했다. 목이 쉬도록 울었겠지만 정작 목소리가 쉬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소리를 다시 낼 수 있게 된다면, 실어가 끝난다면 그때는 곧 무엇이든 해결된 상태일 것. 그래서 여자는 어떻게든 말을 되찾아 보려 한다. 그렇다면 여자는 왜 희랍어를 택하게 되었을까.

 

 
플라톤은 언어뿐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의 석양 앞에 서 있었던 셈입니다. -p30
 

 

말은 매 순간 죽는다. 입밖으로 내뱉는 순간 바닥으로 하염없이 추락하고 곧 죽어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음성언어는 한 세계를 살해하는 행위 그 자체다. 여기서 세계는 인간의 마음, 생각, 뇌 따위를 말한다. 인간은 무언갈 죽이는 것을 꺼림칙해 한다. 그게 동족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말을 살리기로 한 걸까? 몇 천 년 전, 수천억의 말을 매일같이 죽였을 과거에 활자는 탄생했다. 입 밖으로 투하되는 음성언어를 일일이 받아적는 문자언어는, 말의 수명을 늘렸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인간은 말과 어떠한 협의도 거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순간 뇌를 거쳐 나온 말은 정말 잠시 뱉어지는 그때에만 생생히 살아있는 존재일지도 모르는데, 활자로 소리를 박제하니 잠깐 살아야 혹은 죽어서야 가치 있는 것도 있기 마련인데 그걸 억지로 우리의 욕심대로 살려 놓겠답시고 호흡기만 붙여놓은 건 아닐까.

    

이런 면에서, 사어는 고장 난 제세동기다. 죽어가는 말을 살리기 위해 생긴 문자가 또 죽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언어와 문자는 또 달라서, 언어는 뱉어지는 순간 죽는다지만 동시에 또 늘 머릿속에 있으므로 계속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언어 자체의 죽음보다는 언어가 담아낸 세계가 죽는 것이므로. 어찌 됐든, 죽은 걸 살리려다 정말 죽어버린 언어를 여자는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눈을 잃어가는 남자가 나온다. 남자는 시력을 잃어간다. 글을 가르치면서 칠판에 코 박듯 얼굴을 갖다 대야 활자가 읽힌다. 안경 없고 햇빛 있는 세상에서 남자는 어둠만을 마주한다. 꿈을 꾸면 세상이 보이고 눈을 뜨면 세상이 감긴다. 사랑하던 사람은 말을 하지 못하고 나는 눈을 잃어가니 수어를 할 수 없단 불안에 휩싸인다. 삐비를 묻은 땅 위에는 철골이 지어져서 그 작은 새의 뼈가 어디로 갔는지는 옳은 눈을 가진 이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남자는 지하로 날아든 작은 새를 구하려다 시야를 잃었다. 그러다 말을 잃은 여자와 마주하게 된다. 손가락으로 말하는 여자. 어쩌면 이것도 일종의 수어다.

 

 

 

언어를 말하며


 

여기서 이미 알 수 있듯 한강은 언어로 세계가 부서진 것인지, 세계가 무너져서 언어도 나오질 않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인물들의 뒤죽박죽된 세상을 그려낸다. 입이 멈춘 여자와 눈이 멈춰가는 남자의 조합은 제법 신선하다. 남자에게 눈은 언어의 수단 중 하나였단 점도 인상적이다. 흔히 언어는 입과 귀를 통해서만 전해진다지만, 늘 우린 그 이상의 것으로 소통해낸다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우린 서로에게 닿기 위해 언어를 쓰기 시작했단 걸 잊어선 안 된다. 태초의 인간이 무얼 말하기 위해 입을 뗐을지는 알 수 없지만, 때론 언어는 왜곡을 우리에게 안겨다 준다. 언어는 세계를 대변하는 동시에 세계를 어그러뜨린 채 전달하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린 눈을 맞추고 호흡을 함께 하고 손을 깍지껴내며 비언어적인 것들로 맞닿는다. 역설적이게도 가끔은 비언어적인 것이 가장 언어에 부합하는 셈이다.

 

요즘 언어에 대한 고민이 많다. 문자언어와 음성언어를 다루는 글을 쓰고 있는데, 타자를 치다 보면 지금에도 쉴 새 없이 문자언어를 뱉어대는 나 자신에 어색해진다. 자판을 다 뽑아버리고 무의 영역에 머릿속에 응어리진 단어를 담아내고 싶을 때도 있다. 한강이 말하고자 했던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는 모르겠다. 언어를 잃어도 여전히 닿을 수 있다는 인간의 이해 가능성? 언어의 불완전성? 소통? 그저 한 가지 확실한 건, 언어는 세계의 일부를 상대에 내어다 바치는 존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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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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