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라디오를 켜봐요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노래가
그대를 향해 울리는 내 사랑 대신 말해주고 있다는것을 아나요
신승훈 - 라디오를 켜봐요 中
라디오 듣는 것을 좋아한다. 언제부터 라디오를 들었는가 생각해보면 아마 초등학생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 시절, 우리 동네에는 컴퓨터 자격증을 배울 수 있는 학원이 없어서 나는 차로 30분은 가야 있는 읍내 학원으로 원정을 다녀야 했다. 물론 최단 시간이 30분일 뿐, 학원 셔틀 차량에 함께 탄 친구들 집을 이리저리 모두 들르고 나면 족히 1시간은 지난 후에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학원에서 제일 먼 거리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래도 그 지루한 시간이 나름 즐거울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라디오 덕분이었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두고 흘러나오는 사연과 노래들을 듣다 보면, 함께 듣던 셔틀 차량 기사님과 울고 웃으며 어느새 그 프로그램에 팬이 되어있었다. 그때의 기억이 좋았기 때문인지 지금도 나는 어딘가 이동할 일이 있으면 종종 라디오를 듣곤 한다. 어쩌면 다양한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라디오가 내게 남은 유일한 아날로그 감성인지도 모르겠다.
![[꾸미기]radio-821602_1920.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112/20211231151557_bwbzuvcw.jpg)
이후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나는 점점 더 라디오에 중독되고 말았다. 고등학교 첫 학기, 생전 처음 해 보는 야자(야간 자율 학습)의 낯섦과 긴장감에서 벗어나기에 라디오만큼 좋은 도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늦은 저녁 야자가 시작되면 조용히 휴대용 워크맨에 이어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이리저리 주파수를 돌려댔다.
89.1, 91.9, 95.9, 107.7 등 암호 같은 주파수를 훤히 꿰뚫었고, 각종 방송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줄줄 외우며 거의 모든 라디오 프로그램을 섭렵했다. 정말 라디오만 들어도 24시간이 모자를 정도였다.
무엇보다 제일 재미있었던 건 내가 보낸 사연이 당첨되어 방송에서 읽히고 각종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은 청취자가 게시판에 사연을 올리거나 간단한 문자 사연으로 DJ와 실시간 소통을 하는 것이 너무 익숙하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때만 해도 문자로 하는 소통이 매우 핫한 방법이었다.
DJ와의 소통이 거듭될수록 나는 점점 라디오 청취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고, 그렇게 나의 사연 당첨 횟수도 자꾸만 늘어갔다. 결국, 당첨 선물로 받은 화장품 덕분에 엄마의 화장품은 마를 날이 없었다.
![[꾸미기]audio-3153963_1920.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112/20211231152910_bthokcna.jpg)
여러 당첨 사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당첨 사연은 바로[이본의 볼륨을 높여요]에 보냈던 사연이다. [이본의 볼륨을 높여요]는 2004년 내가 첫 야자를 시작하던 그해를 함께해 준 고마운 친구이자, 따뜻한 위로였다.
그런데 개인 사정으로 DJ 이본 님이 하차하게 되면서 애청자였던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에 빠지게 됐다. '이제 어디서 위로를 받아야 하나?', '이 긴장되고 낯선 하루하루를 어떻게 버텨야 하나?' 별의별 생각을 다 하던 끝에 마지막 인사라도 꼭 전하고 싶어서 야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밤새도록 게시판에 장문의 글을 남겼다.
그냥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남겼던 글이었는데, 이런 내 마음이 전해졌는지 마지막 방송의 클로징 멘트로 내 사연이 당첨됐다. 글을 읽는 내내 이본 님이 펑펑 울었고 사연이 당첨될 줄 몰랐던 나도 울먹이는 이본 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미처 숨길 틈도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이제는 다시 듣기 서비스도, 사연을 올렸던 게시판도 모두 사라져서 오롯이 내 기억 속에만 남아있지만, 내게는 언제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너무 예쁘고 감사한 추억이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나중에라도 꼭 한 번 내 추억이 가득 담겨있는 그 소중한 방송을 다시 들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꾸미기]20211231_145835.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112/20211231153726_xgmvqhpm.jpg)
'사랑하기 좋은 날 이금희 입니다' / 사진 = KBS 홈페이지 캡처
기억에 남는 또 다른 사연은 [사랑하기 좋은 날 이금희입니다]에 보냈던 사연이다. 그날은 전에 다니던 회사 팀원들과 양양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서울로 돌아오던 날이었다. 석가탄신일을 포함한 연휴여서인지 길 위의 차들은 도대체 움직일 줄을 몰랐다. 게다가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면서 정체는 더욱더 심해졌다. 하지만 조용한 차 안에 비 내리는 소리와 이금희 님의 따뜻한 목소리가 더해지니 그 순간마저도 낭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문득, 이 순간을 더욱더 특별하고 오래도록 추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꺼내 오랜만에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기로 했다. 문자의 내용은 이번 여행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한 뒤 우리 팀원들의 이름을 한자한자 공들여 적었고, 마지막으로 감사하고 사랑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몰래 사연을 보내놓고 계속 조마조마하고 있었는데 운이 좋게 당첨되어서 팀원들에게 말로 다 하지 못할 고마움도 전하고, 우리만의 특별한 추억을 하나 더 쌓을 수 있었다. 물론 다음 날 온 회사 동료들과 함께 다시 듣기로 방송을 청취하며 종일 이야기꽃을 피운 건 덤으로 얻어진 감사한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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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비하면 요즘은 방송사마다 라디오를 청취할 수 있는 어플이 있어 접근이 매우 쉽다. 주파수가 안 잡혀서 어떻게든 창문 가까운 자리를 사수하려 하거나, 워크맨을 손에 들고 의자 위로 올라가 최선을 다해 손발을 뻗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가끔은 놀랍게 느껴지기도 한다. 거기다 이렇게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는데 라디오 속 DJ분들의 목소리는 너무나 여전해서 또 한 번 깜짝 놀라고 만다. 라디오의 매력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아마 이토록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이동 시간에 라디오를 듣던 어린 시절과 같이 지금도 나는 매일 출근길에 라디오를 켠다. 하루의 어느 순간에 틀어도 나와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어주는 라디오 덕분에 덜 외롭고 자주 즐겁다. 다양한 매체의 등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라디오 시대의 끝을 예상했지만, 라디오는 자신의 속도에 맞는 변화를 꾀하며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그 모습이 뭐든지 느리게 변하고 적응하는 내 모습과 너무 닮아서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은 마음으로 오늘도 라디오를 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