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꿈은 시간이 만든다 [사람]

‘역사’ 라는 꿈을 꾸게 된 이유에 대하여
글 입력 2021.12.30 0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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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한 일곱 살 아니 여섯 살 무렵이었을 거다.

 

그즈음의 난 아버지의 서재에서 놀기를 좋아했는데, 그곳엔 커다란 책장에 책이 가득히 꽂혀 있었다. 전래동화책부터 세계문학 전집과 위인전,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까지 다양한 종류의 서적이 빼곡히 공간을 채운 풍경은 그때의 내게 이유 모를 편안함을 주었다. 하나의 완결된 세계가 눈앞에 당도해있는 광경은 날 압도해 그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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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유에서 그 서재의 한쪽 벽에 기대어 온종일 책을 읽었고, 퇴근 후의 아버지는 그런 내 옆으로 조용히 다가와 함께 책을 읽었다.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며 내가 물었다. “아버지, 무슨 책 읽으세요?”. “음... ‘서양미술사’라는 책인데. 아들이 읽긴 아직 어려울 거야. 한번 봐볼래?”.

 

그때 아버지가 건네준 E.H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당시의 나에겐 무척 무거웠고, 또 종이의 재질은 까끌까끌해, 참 이상한 옛날 책이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두꺼운 책을 일곱 살배기의 작은 손으로 열심히 넘기는 모습이 귀여워 보였는지 아버지는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양다리 위에 올렸다. 그리고 책을 함께 넘기며 사진과 그림이 나올 때마다 나의 감상을 묻고 설명도 해줬다. 솔직히 모든 것이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포근한 품에 안겨 느릿한 저음의 목소리가 귀를 간질일 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아버지와의 그런 일상은 계속 이어져 어느덧 부자의 습관처럼 자리 잡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학원과 숙제에 치여 매일 함께 책을 읽진 못했지만, 주말마다 서재 마루에 함께 누워 역사책을 읽고, 주말의 명화 ‘콰이강의 다리’, ‘쉰들러 리스트’ 같은 영화를 보며 아쉬움을 달래곤 했다.


그래,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역사가 좋아진 게. 아버지와 역사책을 읽는 시간이,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가 좋았고, 함께 사극 드라마, 영화 보는 순간도 소중했다. 그래서 난 아버지의 서재 속 많고 많은 책 중에서 역사책을 뽑아 읽기 시작했다. ‘한국사 편지’로 시작해 ‘거꾸로 읽는 세계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사피엔스’에 이르기까지. 차곡차곡 읽어간 역사책은 쌓여만 갔고 역사학에 대한 나의 사랑도 깊어졌다. 이젠 왜 역사를 하는가를 생각하기보단, 그냥 역사 말고는 하고 싶은 게 없는 상태였다. 이게 없으면 죽을 것 같고, 정말로 안 될 것 같았으니까.


그때가 처음으로 아버지의 큰 언성을 들은 날이었다. 아버지에게 사학과로 진학하겠다는 말을 꺼낸 날. 안 된다는 말, 감당할 수 있겠냐는 얘기, 나중에 도대체 뭘 할 생각이냐는 소리까지. 아버지는 나의 자존심을 건드리면서도 그런 이야기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난 눈물을 보이며 집을 나왔고, 그때 내 머릿속엔 아버지가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역사를 사랑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무작정 자전거 페달을 밟았고 갈 수 있는 한 최대한 멀리까지 가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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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도로를 따라 두 시간쯤 달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처음엔 받지 않으려 했지만, 내 이야기를 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래서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속사포처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제발 좀 알아주면 안 되냐고. 누구보다 역사를 좋아한다고. 역사를 좋아하게 만든 건 당신인데, 왜 이제 와 그러는 거냐고. 그럴 거면 시작조차 말았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아버지는 그렇게 한참을 듣다 늦었으니 이만 들어오라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으셨다. 집에 도착했을 때, 내 책상 위에는 아버지가 남겨놓으신 짧은 쪽지가 남아 있었다.

 

소리 높여 미안해 아들. 역사를 누구보다 좋아하는 우리 아들인데, 아버지는 그 선택을 나중에 후회할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어. 그래서 그 확신이 충분한지 알아보고 싶었는데 널 괜히 시험에 빠뜨린 게 아닌가 싶네. 난 네가 어디에서 무얼 하든 응원할 거고, 누구보다 널 사랑한단다.

 

 

이날 이후, 난 최선을 다해 사학과 입시를 준비했고, 목표했던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만족할 만한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학교에선 내가 바라던 공부이니만큼 최선을 다해 임했다. 사학과에 대한 내 기대와 현실이 완벽히 일치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바쁜 2년을 보내고 군대에 갈 무렵, 난 다시 아버지께 내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대학원에 가고 싶다고.


그러자 아버지는 절친한 친구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 친구의 꿈은 고고학자가 되는 거였다고 했다. 인디아나 존스, 마스터 키튼처럼 유적지를 탐험하고 유물을 발굴하는 그런 일을 하려 했다고. 시골 농촌 마을, 4남매, 가난. 이런 사정에 그 친구는 결국 공무원이 됐고 이제는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고 했다. 너무나 바라는 꿈이 있음에도 무언갈 포기할 수밖에 없는 현실. 그래서 대입 전에도 너한테 소리 높였던 거라고, 쉽게 포기할 정도의 의지만으로 네가 학과를 선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리고 너는 꿈을 이루길 간절히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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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대 전날까지 아버지는 뚝딱, 뚝딱 무언갈 만들었다. 마침내 완성된 그것은 바로 원목으로 만든 5단 책장이었다. 내 방에 새로 놓일 책장 선물에 너무나 감사해, 난 바로 책을 꽂기로 마음먹었다. 어떤 책을 가장 먼저 꽂을까 고민하며 이제는 책이 많아 넘쳐 버린 아버지의 서재로 갔다. 이제는 세월이 느껴지는 그 서재의 향취와 정경을 보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가장 먼저 서양미술사를 꺼내 들었다. 책을 조심스레 넘기며, 페이지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곳엔 아버지가 그어놓은 줄, 적어놓은 메모들, 낙서가 곳곳에 배어 있었다. 아버지의 흔적이 충만하게 느껴졌다.


저기 멀리 꿈이 보였다. 누군가의 시간이 지금, 여기 있었다. 그리고 내가 다시 이 길에 서 있다. 그래, 역사는 나의 꿈이었다. 아니, 꿈일 것이다. 오늘 난 그 길 위에서 또 한 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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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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