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게르니카의 황소 - 한이리 장편소설

글 입력 2021.12.24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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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만 있다면 고통조차도 위안이 될 수 있었다"

 

 

피카소의 작품 <게르니카>는 나치의 만행을 세상에 널리 알린 반전 회화의 대표작이다. 소설 <게르니카의 황소>는 이 그림에 사로잡혀 화가를 꿈꾸게 됐던 한국계 미국인 화가 케이트의 이야기이다.

 

남편을 살해하는 여자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 소설은 미스터리한 전개를 통해 겹겹이 가려진 추악한 진실에 다가간다. 주인공 케이트는 "벽난로 불꽃 가까이 갖다 댄 손을 화상 직전까지 떼지 않는 사람처럼" 자신의 아픔까지도 낱낱이 들추어내며 전말을 파헤친다.

 

이제껏 공백으로 자리했던 그녀의 어린 시절은 지난한 폭력의 역사가 그려진 <게르니카>를 통해 소환되고 해석된다. 그림은 더없이 강력한 촉발제가 되어 준다.

 

*

 

어린 케이트는 무언가에 굶주린 사람처럼 <게르니카>를 보고 또 본다. 하염없이 그림을 응시하던 그녀에게 무언의 계시처럼 나타난 것은 '황소'였다. 이후 케이트는 밤마다 그림 속 황소가 튀어나와 자신을 공격하는 환영을 보기 시작한다.

 

계속되는 환각 증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아버지가 처방하는 약을 먹는다. 그러나 고통을 주는 만큼 영감의 세례를 선사하기도 했던 '황소'의 증발은 그녀의 예술적 생명을 끝내버린다.

 

황소가 찾아오지 않자 케이트는 혐오감만 남기는 섹스에 집착적으로 몰두한다. 섹스가 주는 황홀감은 얼마 안 가 상실감으로 바뀌고···. 케이트의 일상은 어느새 꿈과 현실이 뒤섞인 복잡한 형태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게르니카의황소_표1_띠지유.jpg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케이트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녀는 자신이 겪은 일뿐만 아니라 치부와도 같은 욕망과 은밀한 망상까지도 적나라하게 표출한다. 케이트는 예술적 성취를 위해, 그리고 누군가의 통제 아래 놓인 자신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병적으로 생각을 거듭하고 또 움직인다.

 

꿈속에서 '에린'이라는 여자의 걸작을 보게 된 케이트는 그것을 현실로 가져오기 위한 거래를 시도한다. 꿈속 그림을 현실에 구현해내는 데 성공한 그녀는 그토록 원하던 '천재 화가' 타이틀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분열된 의식들이 고개를 내밀며 믿었던 현실의 지반을 뒤흔들기 시작한다.

 

그녀는 내내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어쩌면 이것이 혹시 꿈인 건 아닐까? 이 모든 건 단지 꿈일 뿐이고 실제 내 몸은 지금 비좁은 감방에, 아니면 정신병원 독방에 갇혀 딱딱한 침대 위에 잠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

 

숨죽이던 삶의 이면이 수면 위로 올라오자 케이트는 혼란에 빠진다. 분노와 죄책감은 그녀를 지배하고 이윽고 또 다른 인격이 되어 걷잡을 수 없이 폭주한다.

 

결말에서 드러난 진실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생생하다. 그러한 과거를 불태우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케이트는 자신 안의 모든 말을 남김없이 뱉길 택한다.

 

 

내가 세웠던 무시무시하도록 끔찍하면서도 아름다웠던 나라

······ 

나는 이제 널 불태워 없앨 것이다. 오래전 게르니카를 함락시켰듯 널 내 손으로 무너뜨리고 나면 이제는 영영 아무도 모를 것이다. 

······ 

나는 지금 이 노트와 함께 그 모든 신기루들을 불태우고 진짜 세상으로 걸어 나갈 것이다. 다시는 그 어떤 환상에도 속지 않도록 

두 눈을 

똑바로 뜨고 

 

- 311p

 

 

그리고 에린에게, 그때의 자신에게, 가질 수 없는 건 원하는 게 아니었다고 오랫동안 스스로를 미워해 왔던 소녀에게, 가장 크고 달콤한 초콜릿 케이크를 선물한다.

 

 

[유여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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