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거장의 영리한 미쟝센 - 끝없음에 관하여 [영화]

거장의 '스킬', 짧고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을 줄 아는.
글 입력 2021.12.15 0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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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거장 감독 로이 안데르손의 2019년 작 <끝없음에 관하여>는 3~4분여의 짧은 단편 수십 개를 엮어 만든 영화다. 각 클립들의 개별성은 독특하고 독립적이어서, 흔히 접하는 기승전결 스토리라인으로 정리할 수 없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도, 뚜렷한 목표와 욕망도 없다. 이름 모르는 보통 사람들의 삶을 몇 분 정도 관찰하다가, 이내 아무 접점 없이 다른 이에게로 화면이 돌아갈 뿐이다. 단편, 일상, 나레이션. 이 세 가지 형식이 변수 없이 반복된다.


때문에 영화의 단위도 압축된다. 중간에 컷을 나누지 않는 원샷원컷이기 때문에 하나의 쇼트(shot)는 그 자체로 하나의 씬(scene)이 된다. 각 씬과 씬 사이는 연속성 없이 분리되기 때문에 씬은 곧 시퀀스(sequence)가 된다. 즉 부등식화 해보자면 [쇼트=샷=시퀀스] 형태를 가진 영화인 것이다.


각 씬(이자 쇼트이자 시퀀스)이 이어질 필요 없다니. 그럼 컨티뉴이티(장면의 연속성) 같은 거 신경 안 쓰고 막 찍어도 되는 거 아니야? 하겠지만 오히려 이 경우가 더 어렵다. 모든 씬 별로 고유의 상황과 설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 <끝없음에 관하여>가 대단한 점은 이런 것이다. 카메라 무빙조차 없는 적막한 3분 안에 즉각적으로 ‘흥미로운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 카메라의 구도, 건물과 소품의 배치, 인물의 표정과 행동, 간단한 대사만으로 순식간에 ‘극’의 짜임새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명백한 ’기술(skill)’이다.


짧은 시간 안에 완성도 있는 단편극을 만들어내는 로이 안데르손의 스킬은 크게 다음과 같은 것들을 활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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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화각과 깊은 심도


 

만약 한 씬을 찍을 때 단 한 대의 카메라만 쓸 수 있다면 무조건 마스터샷(씬 전체 상황을 담아내는 샷)을 찍어야 할 것이다(이것을 비틀어 독창적인 구도를 만들어내는 경우도 물론 많다). <끝없음에 관하여>는 인물과 장소가 한 번에 포착될 수 있는 넓은 풀샷의 화각을 선택한다.

 

또 심도를 깊게 맞춰 저 멀리 있는 작은 풍경에까지 초점을 맞춘다. 하나의 화면엔 모든 정보가 담겨있다. 숨기거나 감추는 것 없이 관객에게 관찰(혹은 관음)할 권리를 제공한다. 몇 분여의 롱테이크가 이 관찰에 충분한 여유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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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통용의 배반


 

그렇다면 이런 화면에서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인물과 시공간, 특히 사건과 장애물에 대한 선택은 스토리텔러의 가장 중요한 직책이다. 로이 안데르손은 건조하고 적막한 환경에서도 약간의 트릭만으로 흥미와 궁금증을 자아낸다. 예를 들면,


부러진 구두 굽 때문에 절뚝거리며 걷고 있는 여자. 그녀는 표정은 몹시 지쳐 보이면서도 모든 걸 잃은 듯 허망해 보인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순 없지만 그녀가 밀고 있던 유모차는 텅 비어있다.


아버지가 딸을 끌어안고 울고 있다. 딸의 가슴에선 피가 철철 흐르고 눈을 뜬 채 죽어 있다. 오열하는 아버지가 몸을 비척거리자 그의 손에 든 칼이 보인다.


성직자는 정신과 의사에게 괴로움을 호소한다. 치과 환자는 의사의 거친 치료 때문에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그 어떤 의사도 환자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거나 배려해주지 않는다. 의사들은 무심하고 짜증스럽게 환자를 문전박대 한다.


우리는 아이가 있는 유모차를 끌고 가는 엄마나, 살해당한 딸을 보고 분노하는 아버지나, 적절하고 전문적인 치료를 제공하는 의사를 기대한다. 아마 그것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풍경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작은 흠집으로 그것을 배반한다. 면밀히 관찰할수록 점점 커지는 일상 속 균열, 말 한 마디 없는 정적 속에서도 단숨에 흥미를 끌어내는 연출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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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밍


 

감독은 감정과 반응을 시간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걸 안다. 어떤 동작이 오래토록 지속되면서 차츰 그것에 익숙해질 때, 순식간에 다른 상황을 개입해 관객을 놀라게 한다. 롱테이크 러닝타임 중간에 그것을 삽입함으로써 느슨해진 관객에게 조용한 자극을 준다. 예를 들면,


바텐더는 참을성 있고 예의 바르다. 그는 다소 거만해 보이는 손님의 비위를 잘 맞춰주고 그의 옆을 보좌한다. 능숙한 솜씨로 와인을 따르는 바텐더. 새빨간 와인이 잔에 채워지는데… 그가 멈추지 않는다. 결국 와인은 넘쳐흘러 하얀 테이블보를 흠뻑 적신다.


저 멀리서 무언가를 끄는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은 길을 터놓고 그 광경의 주인공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마침내 조금씩 형체가 보인다. 거대한 십자가를 이고 오는 남성, 그 옆에서 채찍질하며 욕하는 사람들. 십자가의 무게에 몇 번이고 주저앉지만 이 행진은 끝나지 않는다.


어두운 지하실. 쿵쿵 거리는 대포음과 함께 천장이 흔들린다. 군복을 입은 남성들은 고주망태가 되도록 취해있다(아니 취하려 한다). 그들의 절망과 포기가 느껴지지만 뚜렷한 원인을 알 수는 없다. 곧 문을 열고 한 남자가 들어온다. 잘 차려입은 군복 위로 까맣고 빽빽하고 네모난 콧수염(히틀러)이 보인다.


물리적 시간을 컷 없이 온전히 경험하는 것은 매번 다른 감상을 준다. 고정된 화면 속 변화를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로이 안데르손은 정적인 화면에서 와인(액체), 십자가(중량), 역사적 인물(학살자)로 움직임을 삽입한다. 목적을 파악할 수 없을 때의 느슨함을 타이밍 좋게 파고들어 씬을 변주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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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음에 관하여>의 서사를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뚜렷한 주인공과 그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 과정을 보여주는 드라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로이 안데르손이 보여주는 상황엔 모두 외로움, 우울, 상실, 소통부재 등의 감정이 깔려있다. 누구는 이 작품이 무미건조한 인간세계를 형상화했다 하고, 누구는 종교와 욕망 사이 무의식의 발현이라 하며, 누구는 교체되는 시대에 대한 이행이라고 말한다. 그가 특정한 대상을 특정한 형식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다만 다소 심오한 주제와 감성을 차치하더라도 이 영화는 테크닉 만으로 훌륭한 평가를 받을 만하다. 화각과 심도로 황금비율 맞추듯 정교하게 배치된 화면. 고작 몇 분여의 단편들이 계속 새로 태어나는 와중에도 첫 컷부터 단번에 흥미를 자극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사건을 변주시키는 적절한 시간의 활용. 객관성을 유지하는 일편적인 대사와 개인의 정서를 전달하는 프레임 속 이미지까지.


로이 안데르손은 스토리텔러이자 화가(화면구상가)로서 모범적인 미쟝센 사용을 보여준다. 미세한 변화와 동작만으로도 상황은 충분히 흥미로워질 수 있다. <끝없음에 관하여>는 짧고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법을 아는, 거장의 영리한 영화다.

 

<끝없음에 관하여>, 로이 안데르손, 2019, 스웨덴, 독일, 노르웨이.

 

 

[박태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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