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존재의 이유와 과거에 대한 대답 [도서/문학]

박노해 시인의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글 입력 2021.11.27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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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글은 에디터의 주관적인 해석과

견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박노해, 1980년대 ‘노동 해방’을 외치며 노동, 저항 시인으로 활동하던 그는 노동자의 의견을 피력하고 그들을 대변하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그를 ‘박해받는 노동자의 해방’을 줄인 ‘박노해’라고 정의 내렸다. 그의 첫 시집의 『노동의 새벽』은 불공정한 세상에 대한 환멸 그 자체였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더불어 자신의 감정을 섞어 토해내기도 하면서, ‘시’를 통해 노동자의 차별과 부당한 노동환경을 고발하고 있다. 노동자였던 그에게 노동이란 ‘전쟁 같은 밤일’이며, ‘가난한 멍에’였다. 또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 일 뿐이었다.


이러한 구절 하나가 가슴 깊게 와 닿는 이유는 그가 써 왔던 시의 대부분은 눈으로 보고, 직접 경험한 일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생경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그의 『노동의 새벽』에서 유독 환멸과 절규가 느껴지는 것은 괜히 그런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어떠한 결론도 없이 그냥 그가 느꼈던 세상에 대한 불만과 비인간적인 현실에 대한 고발, 그것뿐이었다. 당시 희미해져 갔던 그의 존재와 의식처럼 시에도 그 힘을 싣지 못한 것이다. 이는 다음의 시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평생토록 죄진 적 없이/이 손으로 우리 식구 먹여 살리고/수출품을 생산해 온/검고 투박한 자랑스런 손을 들어/지문을 찍는다/아/없어, 선명하게/없어,/노동 속에 문드러져/너와 나 사람마다 다르다는/지문이 나오지를 않아/없어,/정형도 이형도 문형도/사라져 버렸어 ……

 

<지문을 부른다> 中


 

올 어린이날만은/안사람과 아들 놈 손목 잡고/어린이 대공원에라도 가야겠다며/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손목이 날아갔다……/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기름 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36년 한 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

 

<손 무덤> 中

 

 

평생토록 일하면서 그는 그의 존재를 어느새 잊고 살았다. 손을 들어 지문을 찍으려고 하지만 지문이 찍히지 않았다. ‘없어, 선명하게 없어’라는 역설적인 표현을 통해 ‘선명한’ 자신의 존재를 찾지만, 정말 아주 선명하게도 분명히 없다. 그의 지문과 함께 그의 존재가 말이다. 인간을 구분 짓는 자신의 뚜렷했던 정체성은 어디 가고 ‘수출품을 생산해 온 검고 투박’함만이 남았다.


또한 손으로 먹고사는 노동자는 손마저 잃었다. ‘아들 놈 손목’을 잡아야 할 손이, 일을 해야 할 손이 사라졌다. 이는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도, 노동자로서의 정체성도 잃게 되었다는 뜻이다. 박노해 시인은 이런 노동자의 존재들이 하나둘씩 희미하게 사라짐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아야 했다. 이러한 박노해 시인의 시는 마치 시 안에서 주어진 광경이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그 상황이 너무 적나라해서 슬픔 그 이상의 것이 담겨 있다. 답답한 현실 속에서 반복되는 상황이 너무나 힘들었던 그는 시로서 이 부조리한 세상을 알리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단순 현실 고발만 시에서 강조하고 있어 한계점도 드러난다.

 

하지만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기득권층을 옹호하기만 바빴던 정부는 노동자들의 생존 움직임을 차단하고 탄압하려고만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가 할 수 있었던 일들 중 시를 쓰며 외쳐야 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시대 상황을 고려해보면 왜 이러한 시들이 나왔는지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시가 당시에는 ‘투박하고 검은’ 존재였겠지만, 시간이 흘러 지금까지도 똑같은 노동 문제가 대두되고 있기 때문에 박노해 시는 빛을 머금고 살아 움직이고 있으며 읽어야 할 시가 되었다. 누군가는 그의 시가 자기중심적이라고 말하지만, 시를 통해 노동자들의 마음을 대변하여 노동자들이 시로나마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고, 노동자들의 비애를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정말 노동 해방을 외치던 박노해 시인의 말처럼 진짜 그가 바라던 세상이 왔는가? 물론 이전보다 나아진 점은 있겠지만, 지금 현실에서도 노조들의 파업과 노동 투쟁을 벌이며 노동문제는 지금까지도 잔존하고 있다. 몇 십 년간 수없이 외쳐대던 박노해의 세상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사실상 오기 힘든 현실에 가깝다. 세상의 벽에 부딪히면서 많은 사건을 겪은 그가 써온 시들을 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그의 내면에도 조금씩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볼 수 있다. 노동 시인으로 시작했던 그의 시는 이제는 노동가뿐만 아니라 현실의 벽에 부딪힌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위로하고 쓰다듬는다.

 

노동자가 얼마나 힘든 생활을 하며 비인간적인 노동 현실을 이겨냈는지에 대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기만 했던 『노동의 새벽』, 사회 부조리를 풍자하기에 그쳤던 그의 두 번째 시집인 『참된 시작』에서도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진정한 존재 의식은 비로소 네 번째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에서 드러난다. 이렇게만 이야기한다면 그동안 박노해 시인이 그 시대 노동자들이 ‘피해자’라는 인식을 주창하고, 연대의식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이 네 번째 시집에서 ‘힘을 모아 단결하고, 투쟁하자’라는 시를 썼을 것이리라 추측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박노해의 세상은 시간이 흘러도 사회 구조상 불가능한 현실에 가깝다. 그렇기에 단순히 연대 의식만을 강조하지 않으며, 이 세상을 이겨내는 법 또한 알려주고 있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안데스산맥의 만년 설산/가장 높고 깊은 곳에 사는/께로족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희박한 공기는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발길에 떨어지는 돌들이 아찔한 벼랑을 구르며/ 태초의 정적을 깨뜨리는 칠흑 같은 밤의 고원/어둠이 이토록 무겁고 두텁고 무서운 것이었던가/추위와 탈진으로 주저앉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때 /신기루인가/멀리 만년설 봉우리 사이로/희미한 불빛 하나/산 것이다

 

어둠 속에 길을 잃은 우리를 부르는/께로족 청년의 호롱불 하나/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빛은 저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세계 속에는 어둠이 이해할 수 없는/빛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거대한 악이 이해할 수 없는 선이/야만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 정신이/패배와 절망이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이/깜빡이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여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적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삶은 기적이다/인간은 신비이다/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그가 이 시를 쓰기 시작한 시점부터 자기반성적 성찰이 돋보이며, 세상에 대한 시인의 깨어있는 의식과 자각이 드러난다. 이전 시처럼 단순 현실 고발보다 적대적인 태도를 조금은 내려놓은 화합과 포용 정신도 보이며, 어떻게 하면 거침없는 이 세상 속에서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혜안, 그리고 삶의 방향 제시를 통해 세상과 싸워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에서 이유는 나와 있지 않지만 박노해 시인 일행이 ‘안데스산맥의 만년 설산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사는 께로족 마을’에 가고 있었다. 왜 그가 시에서 이 마을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는지는 그가 그동안 써 왔던 시들을 보면 유추해볼 수 있다.

   

 

우리 세 식구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나의 하늘이다/프레스에 찍힌 손을 부여안고/병원으로 갔을 때/손을 붙일 수도 병신을 만들 수도 있는 의사 선생님은/나의 하늘이다……/죄인을 만들 수도 살릴 수도 있는 판검사님은/무서운 하늘이다/……/높은 사람, 힘있는 사람, 돈많은 사람은/모두 하늘처럼 뵌다/아니, 우리의 생을 관장하는/검은 하늘이시다……/아 우리도 하늘이 되고 싶다/짓누르는 먹구름 하늘이 아닌/서로를 받쳐 주는/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이고 싶다

 

<하늘> 中

 


그에게 하늘은 푸른 하늘과 검은 하늘 두 가지였다. 노동자로 일했던 현실에서는 푸른 하늘이 없었다. 온통 검정이 세상을 뒤엎고 있었다. 그런 그가 찾아가는 곳은 께로족 마을,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있는 마을이다. 시에서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 발길에 떨어지는 돌들이 아찔한 벼랑을 구’를 정도로 이 마을을 가는 길은 험난하고 생존의 위협을 느낄 만큼 가기 힘든 곳이다. 마치 박노해의 세상처럼 말이다. 그곳은 박노해가 바라던 것들이 있는 곳이었을 테고,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런 세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함을 알리고 있다.

 

그가 늘 바라던 염원을 이루고, 노동자 구원의 세상으로 가는 길은 숨이 찰 만큼 힘든 길이며, 발길 쪽으로 떨어지는 돌들은 그들이 가지 못하도록 막는 무수한 존재들이다. 또한 그는 ‘어둠이 이토록 무겁고 두텁고 무서운 것이었던가’라며 그 어둠의 세력이 너무나 커서 그들을 향한 두려움의 감정도 보인다. 이러한 상황 속 구세주처럼 빛을 찾아 들고 온 누군가, 바로 께로족 청년이 작은 호롱불 하나를 들고 온 것이다. 그 순간 박노해 시인은 희망을 보았다.

 

그냥 우리의 일상에서 누군가가 든 호롱불을 발견했을 때는 그 호롱불이 어떠한 의미가 있겠는가. 춥고 어둡고 죽음의 공포가 엄습한 극한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작은 호롱불일지라도 크게 와 닿을 수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는 아무 생각도 없던 물체에도 그 감정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께로족 청년이 아무 생각 없이 호롱불을 들고나왔다하더라도, 그 빛은 누군가의 희망이 될 수 있다. 나는 이 ‘께로족 청년’의 의미가 아주 크다고 생각한다. 그들을 구한 것은 박노해 시인이 이야기하던 하늘이 아니었다. 그가 우러러보던 사장도, 의사도, 판검사도 그 어떤 누구도 아니라 그냥 께로족이라는 한 마을에 살고 있는 청년이었을 뿐이다. 이 시는 자본가, 기득권층에 대한 비판도 있으면서 그 시선은 일반 서민들에게 있다. 그들의 존재를 비추는 건 호롱불을 든 마을 청년, 일반 서민이었다.

 

이 시 말미에서 박노해 시인은 계속 되풀이해서 이야기하며 우리의 존재 이유에 대해 말한다.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빛은 저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 기득권층의 세력이 크고, 비록 우리의 삶에 깊게 관여하고 있을지라도 우리 서민들은 마을 청년이 들고 있던 호롱불 같은 작은 희망에도 큰 힘을 얻고, 어두운 설산을 걸어갈 용기를 얻게 된다고 강조한다. 결국 그 불빛 하나만 있어도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은 현실을 극복하려는 끈기와 열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박노해가 말하는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 됨을 알린다. 끝이 아니라 희망으로 가는 새로운 시작이다. 그의 세상은 언제 올지 모르는 세상이다. 하지만 희망마저 존재하지 않는다면 약자들은 존재의 이유가 없어진다. 그래서 박노해는 현재가 과거보다 더 나은 삶이 되었듯이 시간이 지나면서 후대에 더 나은 세상이 오기를 바라며 그 희망의 끈을 놓지 말자고 이야기한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시는 과거 박노해 시인이 쓰던 시들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이자 위로이다. 사라진 지문처럼 존재조차 희미해져 버린 ‘그’들에게 희망은 있으니, 바라던 세상은 오고 있으니,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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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시인의 내면에 다양한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노동 시인이었던 박노해의 시는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해주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한 혼돈의 도가니인 현재까지 말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온 세상이 마비된 현재, 현재까지도 우리는 어둠과 공포가 엄습한 안데스산맥의 만년 설산을 걷고 있다. 우리는 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아직 보이지 않는 그 빛을 찾아 헤매고 있다. 또한 많은 피해가 있었고, 이러한 삶에 지친 이들도 많이 존재한다. 박노해 시인의 시처럼 ‘희망은 불멸’이고, ‘삶은 기적’이다.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기적은 언젠가 일어날 테니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

 

이 시가 이 삶에 지친, 또는 희망을 바라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그의 시는 이제 노동자들을 위한 노래가 아니다. 인간 내면의 상처를 돌보는 시로써 작용하고 있다.


이렇듯 시인 박노해의 시는 분명 호소력이 있다. 지치지 않고 현실을 고발하는 데에 앞장서고, 나아가 모순이 많은 지금 이 세상에 대해 희망을 주는 시인으로서 그가 주는 힘이 깊게 전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진실로 자신의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그의 외침을 동경한다.

 

 

[이윤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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