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질성의 낙원 [도서/문학]

<백년의 고독>(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1967)
글 입력 2021.11.26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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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변화시켜 온 원동력 중 하나는 서로 다른 것들의 충돌이며, 외부적 이질성에 대한 포함과 배제의 양상은 근대화의 가장 문제적인 주제다. <백년의 고독>을 압축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흔히 '마술적'이라는 단어에 시선을 빼앗기지만, 축축한 열대의 환영을 걷어낸 자리에는 동질성과 이질성의 차원에서 근대성의 문제를 깊이 있게 고찰한 '리얼리즘'이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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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공동체에 가까운 마콘도에 들이닥친 근대화의 바람은 기존 공동체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으며, 이들은 때로 신문물의 긍정적 측면에 매료된다.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통한 근대화는 마콘도가 파멸에 이르는 첫걸음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원시 공동체의 내부에 존재하는 동질성의 저주를 극복하고 삶을 지속시킬 유일한 수단이기도 했다. 작품의 첫 번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가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극찬한 ‘불타는 얼음’은 근대화의 양가성을 함축하는 소재인데, 뜨거운 동시에 차갑고, 파멸의 씨앗인 동시에 구원의 수단이라는 모순적인 긴장감은 근대성의 본질에 대한 멋진 요약이다.

 

그러나 근대적 질서의 최종 목표가 체계적인 시스템을 통해 개인을 통제하고 이질성을 억제하는 것임을 생각하면 결국 외부의 질서는 마콘도의 파멸을 잠시 지연시키는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마콘도의 사람들이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던 동질성의 저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근대적 질서는 그들에게 매혹적인 선택지로 다가왔지만, 근대성은 정치 권력과 자본주의를 통해 원시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동시에 철저하게 파괴한다.

 

부엔디아 가문의 사람들은 정치적 이념 투쟁에 깊게 뛰어들었다가 초라한 죽음을 맞기도 하고, 자본주의 질서의 불합리함에 맞서다가 폐인이 되기도 한다. 벗어날 수 없는 근대성의 저주는 그 스스로가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한 ‘재해’로 인해 제 발로 마콘도를 떠나고 나서야 끝이 나고, 폐허가 된 마콘도는 끝내 내부의 저주로 파멸하며 고독의 역사를 마무리한다.

 

작중에서 바나나 농장의 형태로 등장하는 자본주의 식민화 과정은 근대적 권력이 개인을 억압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마콘도의 사람들이 표면적인 합리성 아래 인간을 노예 상태로 만드는 자본주의적 배제에 저항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농장에서 착취에 가까운 대우를 받는 마콘도의 사람들은 부당함을 느끼고 법적 대응을 모색했지만, 그들은 근대적 사법 질서에 의해 철저하게 농락당할 뿐이었다. 그들은 경제적, 법적 질서의 내부에 있으면서도 그것으로부터 추방된 셈이다.

 

그들은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절망적인 현실을 인식하고 집단 행동을 통해 비극적인 질서에 균열을 내려고 했지만, '계엄령'이라는 국가적 예외 상태 아래 이들은 마땅히 죽어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들의 죽음을 다른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권력에 의해 흔하게 자행되는 언론 통제나 은폐의 희생자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질서를 체화한 개인이 권력의 주체이자 객체가 된 세계에서 예외적 존재는 정상적인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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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의 '바나나 대학살'을 주도했던 유나이티드 프루츠 컴퍼니


 

그렇다면 인간은 결국 근대성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작품의 주인공들에게 파멸은 예정된 결말이었지만, 마르케스는 그들이 파멸에 이르는 방식에서 근대성을 초극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백년의 고독>에서 외부의 현실에 부딪혀 좌절한 부엔디아 가문의 사람들은 그들의 내면으로 수렴하면서 비극적 질서에서 벗어난다. 가문 내부의 저주인 동질성을 극복하기 위해 수용한 외부의 질서 역시 또 다른 동질성으로 향하는 길임을 깨달은 부엔디아 가문의 사람들은 ‘고독과 명예로운 조약’을 맺는 방법을 배운다. 고독을 수용하는 것은 자아의 개별성을 인식하는 일이자, 이를 통해 타인과 나의 이질성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고독은 일반적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비극성에 대한 은유이자 인물의 현실 도피로 읽히지만, 누군가는 ‘헤아릴 수 없는 고독 속에서 보지 못했던 사실을 명확하게 보기도’ 한다. 우르술라는 고독을 통해 집안의 모든 사물을 볼 수 있게 되며, 바나나 농장에서 일어난 학살의 유일한 생존자인 아르카디오의 존재를 인식한다. 이는 주체의 지위를 박탈당한 채 살아 있지만 살아 있지 않은 자들을 직시하는 과정이다. 특히나 마술적 사실주의의 세계에서 현실과 환상, 죽음과 삶이 맞닿아 있음을 생각하면 이들에게 고독은 단순히 초라한 파멸로 향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 너머의 단계로 나아가는 하나의 방법론이기도 하지 않을까.

 

문학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나와 다른 것, 즉 타자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문학이 근대성의 핵심 가치인 동질성을 그토록 경계하는 건 사뭇 당연한 일이다. 그런 면에서 <백년의 고독>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돼지 꼬리가 달린 인간’은 근대성의 부작용과 오랫동안 맞서 온 문학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일지도 모른다. 근친상간이라는 극한의 동질성의 산물이 극도로 이질적인 존재라는, 어쩌면 마술적 사실주의의 극한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현상은 근대성이 그토록 추구하는 목표의 예정된 허무(이를 피하고자 ‘예외 상태의 생명’과 같은 내부적 타자를 어떻게든 구성하려는 그들의 노력은 그 자체로 문학적 아이러니다)를 꼬집는 동시에, 나와 다른 타자를 통해 온전해질 수 있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역설하는 것이 아닐까.

 

 

[박호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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