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존재의 이유 - 4

글 입력 2021.11.27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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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이 걸려 내부가 정리되고 나서야 드디어 바깥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내 주변 사람들, 내가 몸 담고 있는 세상, 보이지 않는 곳 너머, 인간 관계 같은 것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것, 보이지 않는 관계를 지탱해주는 것, 사람들이 관계를 유지하는 이유 등이 궁금해졌고 나아가 그것들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이미 본능을 나름대로 정의해놓고 있던 내게 관계라는 키워드를 풀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과거에 건너왔던 그 과정을 비슷하게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난 다시 질문하기 시작했다.

 

관계란 무엇인가. 왜 사람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가. 왜 그토록 관계를 중요시 여기는가. 관계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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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인간이 처음 관계 맺는 장면을 생각해본다면, 인간의 첫 관계 대상은 모체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았던 물질이 세포 분열을 통해 조금씩 성장하고 탯줄로 모체와 연결되어 양분과 산소를 공급 받으면서 처음 관계를 형성한다. 이때 태아는 무조건적인 의존 형태로 모체와 관계를 맺는다. 태아가 모체에게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적으로 모체가 태아에게 베푼다.

 

이런 상황은 태어나고 나서도 똑같이 유지된다. 여리고 어린 아기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움직일 수도, 밥 먹을 수도 없다. 오로지 우는 것, 그래서 자신의 존재를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만이 아기의 유일한 능동적 행위다. 부모의 도움 없이는 어떤 활동도 불가하다. 만약 부모가 없다면, 그래서 아기를 보호해 줄 누군가가 없다면 이 아기는 반드시 죽는다.

 

아기는 매순간 자신이 죽을 수도 있음을 자각하며 살기 위해 발버둥친다. 죽음을 목전까지 경험한 아기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며 이런 방식으로 각인된 공포는 결국 아기를 관계에 의존하게 만든다.

 

더이상 부모에게 기대지 않아도 될 나이가 되면 아이는 생명의 위협을 전처럼 크게 느끼지 않는다. 배고플 때 스스로 무언가를 찾아 먹고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며 하고 싶은 말도 능동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적절한 환경에 놓인 아이는 전처럼 죽음의 공포를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아기일 때 가졌던 공포심은 무의식 속에 남아 관계에 대한 갈증을 불러일으킨다. 어릴 때 겪었던 공포가 관계로 인해 해소됨을 느낀 아이는, 따로 의식하지 않아도 관계가 여타 공포스러운 상황을 해소시켜 줄 효과적인 수단임을 알고 있다. 관계가 만병통치약처럼 쓰이는 것이다.

 

아이는 새로운 관계를 맺고 보지 못한 장소에 가게 되며 이전에는 하지 못했던 경험을 누리는 과정에서 다양한 공포를 마주하게 되는데, 이때 대부분의 아이들은 관계를 통해 이를 해결하려 한다. 관계가 미지의 공포에 효과적인 카드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적절한 관계로 불안을 해결하며 성장하지만 몇몇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관계를 쉽게 맺지 못하는데 이런 경우 이 아이들은 새로운 공포인 집단, 무리, 사회로부터 고립될지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게 된다.

 

관계를 맺지 못하여 무리로부터 떨어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죽음의 공포와 맞먹는다. 왜? 이전까지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으니까. 죽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했으니까. 물론 아기 때와 달리 관계를 맺지 못해서 죽을 일은 거의 없겠지만 과거의 순간이 무의식적 기억에 남아있는 아이 입장에서는 본능적으로 관계를 맺지 못하면 큰일 날 수도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착각은 아이 시절 뿐만 아니라 인간 생애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관계를 생존, 내지는 생존에 유리한 수단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즉, 인간에게 관계란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고안해 낸 생존 방법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관계를 맺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 친구와의 절친한 관계, 가장 친밀한 연인 관계, 스승과 제자의 관계, 뜻을 같이 하는 타인과의 관계부터 시작해서 개인과 집단의 관계, 집단과 집단의 관계, 개인과 국가의 관계, 국가와 국가의 관계 등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관계는 두려움으로부터 시작되며 인간은 관계 외 다른 방법으로는 두려움을 해소하지 못한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인간은 두려움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다. 두렵다는 핑계를 대고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타인의 등 뒤에 숨어있으면 무언가가 제대로 보이는가? 눈 앞을 가리면 내 앞에 실존하는 무언가가 사라지는가? 보이지만 않을 뿐, 그것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관계는 그렇게 두려움을 가려주는 안대 역할을 한다. 그것은 두려움을 온전히 해소하는 것이 아니다. 해소했다고 자기 위로 하는 것이다. 피가 철철 흐르는 사람에게 관계라는 반창고 하나만 붙여주고선 이제 피가 보이지 않으니 넌 온전히 치료된 것이라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관계란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의 일종이라고 다시 표현할 수 있다.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관계라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며 두려움을 제대로 직면하지 않고 남에게 기대 그것을 해결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자신의 고유한 두려움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영원히 두려움에 끌려다니게 된다. 허나 인간은 관계라는 도피망을 선택함으로써 두려움에게서 계속 도망치는 선택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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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가 회피의 수단으로 인간사에 적용된다는 점에서 관계는 진실되지 않다. 모든 관계는 회피다. 두려움을 마주하지 않으려, 두려움을 직면하지 않으려 인간이 선택한 부차적 방안이 관계다. 관계속으로 자신을 내맡겨 보기 불편한 자신의 근본적 두려움을 잊어버리려 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 잊혀질지 모른다는 공포, 사람들 사이에서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관계가 아니면 자신을 규정하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들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한번 도망치면 계속해서 도망치고 싶어진다. 그렇게 인간은 영원히, 죽을때까지 도망만 치다가 삶을 마감한다.

 

두려움이 없는 온전한 상태에서 맺은 관계만이 진실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진실된 관계는 너무나 이상적이어서 현실에서는 볼 수 없다. 현실 세계의 관계가 도피처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관계의 진정한 의미는 빛을 잃고 만다. 진실된 관계란 상상으로만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 세계와 비슷하다.

 

유토피아가 존재하는가?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진실된 관계가 존재하는가? 진실된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된 관계는 없다, 허구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관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관계는 없다. 관계가 없으므로 관계로부터 기인한 모든 것들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정이라고 부르는 것들, 그런 것들이야말로 우리의 눈을 속이는 그릇된 가치들이다. 정에 가려져 있는 실존하는 두려움을 보아야 한다. 정을 통해 편안한 상태에만 안주하려는 인간의 나약한 진심을 알아차려야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완전한 이타적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된 사랑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사랑이 존재한다고 믿는 이유는 해결되지 못한 내적 두려움이 사랑을 통해 해소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랑의 힘이 두려움을 극복하게 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대로 사랑은 두려움을 해소시킬 수 없다. 사랑은 두려움을 가리는 역할만 할 뿐이다. 안대를 한 개 쓸 것을 두 개 씀으로써 더욱 보이지 않게 할 뿐이다. 두려움에 기인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결국 사랑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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