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회귀하는 모성, '티탄'과 '베네데타' [영화]

글 입력 2021.11.21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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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오피니언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비와 헌신, 그리고 희생으로서의 어머니는 이제 다 옛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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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더>, 2009년

 

 

어머니라는 존재 역시 한 명의 인간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은 가부장적 사회에 입각한 통념으로부터 은폐되었다. 자식을 위한 무조건적인 책임감과 온정을 견지한 해석으로 일관된채 어머니라는 상징성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여러 문화예술 분야에 오랜기간 소모되었다. 하지만, 시대가 흐르고 흘러 소비자들의 시선은 달라졌고 그 과정에서 기존의 상징은 탈상징화의 시도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이와 관련해서 탄생한 눈부신 결과물들 가운데 하나가 봉준호 감독의 <마더>일 것이다.

 

오해와 오인으로 점철된 나약하고 보호가 필요한 모성은 이제 구버전이다. 자식을 위해 내 몸 다바치는 어머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어머니이기 이전에 그녀, 그리고 그녀이기 이전에 한 개인으로서 그동안 외면해온 내면의 욕망을 수긍하고 실천하는 숨죽인 자아들의 움직임이 등장했다. 기존의 메커니즘을 전복시키는 상징적 쿠데타 행위는 분명 생경함을 넘어 불손하다는 세간의 인식을 등에 업은 채, 다음과 같은 말로서 행위의 주체들을 총칭할 것이다. 그 이름하여, 괴물.

 

그런 의미에서, 여기 주목해야할 두 어머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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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 영화 <티탄>, 2021년 / (右) 영화 <베네데타>, 2021년

 

 

한 명은 산모요, 다른 한 명은 성모다. 정확히는, 둘 다 비슷한 그 무엇에 가까운 존재다. 시작부터 끝까지 무엇하나 닮은 구석이 없는 두 여인은, 그러나 엄징한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철저히 외면 받을 운명의 母티브를 서로 공유하고 있다. 더불어, 어머이로서의 그녀들은 이제껏 마주하지 못했던 이미지 한 가운데에서 서슴없이 스스로의 욕망을 부르짖는다.

 

영화 <티탄>과 <베네데타>의 서사는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

<티탄>과 <베네데타>


 

영화 <티탄>과 <베네데타>는 "~ 같다"는 형용사가 무색할 만큼 그 자체로 괴물인 작품들이다. 영화의 만듬새는 물론, 작품 전체를 구성하는 이미지와 이에 내포된 함의가 오늘날 사회 통념을 박살내기 충분할 만큼 강렬하다는 점에서, 두 작품 모두 상업 영화 씬에서 마주하기 힘든 충격과 신선함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물론, 외피만 놓고 봤을 때 두 작품은 전혀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다. 전자가 세속적 세계관을 지극히 겨냥한다면, 후자는 가타부타 할 것 없이 성직자의 성스러운 삶이 배경의 주를 이룬다. 그럼에도 두 작품이 동일 선상에 위치할 수 있는 결정적 이유는 역으로서의 전제 또한 성립 가능하다는 점이다. <티탄>은 세속적인 세계에서 성스러운 이미지를 말도 안될 수준으로 구현하며, 반대로 <베네데타>는 성스러운 공간에서 자행하는 속된 욕망이 마그마처럼 뿜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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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 영화 <티탄>, 2021년 / (右) 영화 <베네데타>, 2021년

 

 

스스로의 욕망에 누구보다 솔직한 여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넘치는 욕구를 충족시킨다. 그 과정에서 극과 극은 절묘하게 이어진다는 전제를 성립시키는 금단의 이미지와 상징들이 관객을 끊임없이 도발한다. 가령, 두 주인공이 속한 공동체는 저마다의 소명의식(인명구조/신성추구)이 탑재됨과 동시에 각기 다른 이유로 남녀의 출입을 금하는 공간적 특성을 보유하고 있다. 그 사이에서 두 여인은 본인이 속한 무리 내에서 어느 편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에 위치한 채 전혀 환영받지 못할 욕망을 남 모르게 실현시킨다(공교롭게도 두 여인과 함께하는 파트너 역시 처지가 유사하다). 여성으로서 피치 못하게 갖추지 못한 남근의 존재는 자체적으로 마련함으로써 자신을 보호(젓가락)하거나 욕구 충족의 일환(목재 예수상)으로 대체된다. 두 편의 영화 모두 결단코 수컷이 주체가 아니다.


필연적으로 아웃사이더의 운명을 지닌 두 여인의 욕망을 향한 사투가 그럼에도 관객의 심기를 자극하는 근본적 원인은, 바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모티브로서 어머니에 기인한다는 점이다. 원인 모를 욕구 불만에 사로잡혀 수많은 죄를 일삼던 한 죄인은 부덕의 산실을 잉태함으로써 불분명한 성별 끝에 자신의 정체성을 어머니로 결정 짓는다. 반면, 성부와 성자의 이름으로 원죄를 지닌 우리 모두를 포용하는 성모의 자애는 당시 중세 사회의 통념으로부터 벗어난 동성애로 탈바꿈한채 주체못할 폭주의 원동력으로 자리매김한다. 두 편의 영화 모두 수위 높은 표현 기법에 입각한 감독의 야심찬 상징 활용을 토대로 자신의 욕구에 솔직한 새로운 형상의 어머니를 묘사한다.

 

여기서 새롭다는 인식은 그녀들이 뒤집어 쓴 괴물의 탈이란 외피를 통해 확연히 파악 가능하다.

 

 

 

괴물의 탈을 쓴 산모, '알렉시아'

<티탄> / 감독: 쥘리아 뒤쿠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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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nk you to the jury for letting the monsters in"

 

- 쥘리아 뒤쿠르노, 2021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소감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뇌에 티타늄을 이식한 '알렉시아'(아가트 루셀)는 지울 수 없는 그 날의 흉터와 함께 원인 모를 욕망으로부터 조금씩 매료되기 시작한다. 시간이 흘러 유명 댄서의 삶을 영위 중인 그녀는 그간 내면을 잠식해온 형태 불명의 욕망과 우연히 실체로 맞딱트리며 생전 느껴보지 못한 쾌감을 경험한다. 그날 이후 그녀는 자신의 뱃 속에 무언가가 차있다는 위화감과 함께 예기치 못한 일상의 변화를 겪기 시작한다.


2021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에 빛나는 <티탄>은 이제껏 실체가 불분명했던 한 여인의 기괴한 욕망이 발현되는 순간과, 그로인해 촉발된 한 여인의 정체성 변화 과정을 조망한다. 그 과정에서 존재감을 뚜렷히 발휘하는 섬뜩한 이미지들의 향연은 서사와 완벽히 부정교합을 이루며 관객과 주인공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일말의 여지도 마련해주지 않는다. 단 한차례도 철회하지 않는 영화의 불친절한 태도를 증폭시키는 대목은 단연 서사의 한복판에 서있는 알렉시아의 정체성에 기인한다. 그녀는 관객들이 영화 캐릭터를 향해서 기존부터 견지해온 시선으로는 접근조차 불가능한 전무후무의 캐릭터다. 추후 언급하게될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녀의 중간자적 포지션과 직결된 지점이다.


영화의 서사는 크게 두 가지 감정 형태를 원동력으로 삼으며 지체없이 클라이막스를 향해 전진한다. 이는, 스스로의 욕망을 적극 수용하고 행동으로 옮기는데 주저하지 않는 한 개인의 영역에서 먼저 촉발된다. 사고의 여파로 뇌 속에 티타늄을 삽입한 그녀는 퇴원하자마자 자신을 죽음으로 인도할 뻔한 자동차를 갑작스레 포옹하며 남모를 형태의 욕망을 점진적으로 체감한다. 날렵하게 접지된 차량내부를 은밀하게 훑고 지나간 영화의 인트로에서부터 암시된 그녀의 욕망은 수줍게 내민 한 소녀의 애정 표현을 기점으로 시간이 흘러 관객의 흥분을 증폭시키는 요염한 몸짓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보다 명확해진다. 자동차 보닛 위로 펼치는 알렉시아의 무대는 영락없이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한 몸짓으로 가득하다. 다만, 그녀가 상정한 유혹의 타겟은 불건전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성들이 아닌, 화려한 디자인으로 중무장한 차가운 금속 성질의 머슬카다. 자동차라는 비생명체와의 상식을 넘어선 애무 행위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을 나열하며 영화는 본격적으로 관객을 도발하기 시작한다.

 

생전 처음 느낀 죽음의 경험을 토대로 시작된 어느 피사체와의 연정은 알렉시아가 갈구하는 욕망의 실체가 죽음 그 자체임을 도입부에서부터 강렬하게 제시한다. 죽음을 탐하는 그녀의 몸짓은 스스로를 주체의 자리로 위치시키는 일련의 살인 행위를 통해서 불순한 욕망을 기어코 충족시킨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고정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새까만 젓가락은 심기를 거스르는 타자를 향해서 은밀하게 들이밀 수 있는 무기이자, 여성이기에 미처 달지 못했던 그녀만의 남근을 상징한다. 알렉시아의 타겟에 걸려든 먹잇감은 그녀가 깔아둔 죽음의 뻘판 위에서 무방비 상태로 자신의 목숨을 헌납한다. 이에 알렉시아는 단 한번의 심리적 동요 없이 그 날의 욕정을 해치우고 해소한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문제작 <크래쉬>를 연상시키는 쇳덩이와 고깃덩이의 기괴한 마찰 이미지는 곧이어 그녀의 일상을 뒤흔들 변화의 서막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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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티탄>, 2021년

 

 

적당히를 모르는 영화의 도발은 그녀가 욕구를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윤리적 잣대가 조금도 작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기반을 두고있다. 그와 관련해서 절정은, 자신의 과거를 손수 소멸시키는 화재 시퀀스다. 영화는 알렉시아와 부모 간의 관계에 별 다른 관심도 없다는 듯 가족과 연관된 전사前史는 조금도 등장시키지 않는다. 알렉시아와 아버지 사이를 꽉채운 냉기만 종종 묘사될 뿐 그 이상의 언급은 전무할 뿐더러, 그녀와 육체적으로 더 진한 연결고리를 지닌 모성은 카메라를 향해 뒷모습만 드러낼 뿐이다. 부성은 철저히 외면하고 모성은 그저 희미할 뿐인 가정은 알렉시아가 더 이상 의지하기 힘든 구시대적 공간을 가리킨다. 영화는 그렇게 알렉시아의 삶의 터닝포인트로서 자신을 억압한 가부장적 체계를 스스로 소멸시키며 독립을 선언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가족이라는 공동체적 가치를 과거의 산물로 치부해버리는 그녀에게 영화는 괴물의 탈을 기념으로 씌워주며 예측 불허한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또 다른 원동력을 제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어머니로 거듭나는 순간을 가리킨다.

 

스스로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불사하는 그녀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불안의 감정은 예기치 못한 타이밍에 무언가를 잉태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산모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 밖에 없는 불안과 염려는 흡사 타이탄(Titan: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거대하고 막강한 신의 종족)의 심장을 지닌 그녀마저도 피할 수 없는 수순이자, 몇 안되게 그녀가 인간이라는 인식을 관객들에게 일깨워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새빨간 피가 아닌, 자동차 기름을 연상시키는 시커먼 원색의 액체는 자연 법규에 철저히 위배된 욕망의 비윤리성과 그에 따른 댓가를 상기시킨채 형언하기 힘든 공포감을 조성한다. 피는 기름으로 대체되고, 욕구는 살인으로 치환되며, 새로운 탄생은 누군가의 죽음으로서 완성된다. 기성체계가 파괴된 그녀의 새로운 세계는 모든 가치 또한 전복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성별 또한 포함되는 부분이다. 그녀의 주체 못할 욕구가 파생시킨 흔적들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순식간에 범죄자로 전락한 그녀는 생존을 위한 임시방편으로서 자신의 성별을 전환하기로 결심한다.

 

10년 가까이 실종 중인 소년 '아드리안'의 소식을 우연히 TV로 접한 그녀는 갖가지 방법으로 쉽게 여자임을 확인할 수 없게끔 변장한 뒤 소년의 아버지 '빈센트'(뱅상 랭동)를 찾아간다. 물론, 빈센트를 제외한 나머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의문으로 가득하다. 그런 의미에서, 알렉시아의 사기극을 대하는 빈센트의 태도는 더더욱 눈길이 간다. 죽음을 갈망하는 그녀와 달리 소방서장으로 근무 중인 빈센트는 생을 소명의식으로 삼는 인물로서, 혼돈으로 점철된 그녀의 세계관에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심어주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졸지에 아들의 신분으로 빈센트를 따라서 소방관 업무를 배우던 알렉시아가 사람을 살리는 일에 생애 처음으로 관여하는 순간이 이를 미약하게나마 부각시킨다. 본디, 빈센트가 한 눈 파는 사이 다른 곳으로 탈출을 결심했던 알렉시아는 뜻하지 않게 그와 보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과거에 그녀가 느끼지 못했던 뜻밖의 유대감을 경험한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빈센트 역시 남모를 속사정을 지닌 이방인 같은 인물이라는 점을 상기해보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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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티탄>, 2021년

 

 

야삼한 밤에 그가 남몰래 투여하는 주사 바늘은 알렉시아가 그러하듯, 빈센트 또한 내면의 결핍을 대체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한 처지임을 방증한다. 이와 더불어, 동료 소방관들로부터 게이라는 루머를 지닌 그가 정말 동성애자인지는 (알렉시아와 가족 간의 과거가 그러하듯) 끝내 등장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가 남성으로서의 기능이 떨어진 상태라는 점을 영화는 은연 중에 암시한다(이를 바탕으로, 그가 맞는 주사는 기능 강화에 영향을 끼치는 스테로이드계임을 추측 가능하다). 육체 노동이 일상인 공동체 내에서 남성의 본분을 이행할 수 없다는 사실은 여자이면서도 남자 행세를 해야하는 알렉시아의 처지와 묘하게 대구를 이룬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티탄>은 메인 스트림에서 한창 떨어진 아웃사이더들의 공감 드라마로 읽을 수 있다. 물론, 영화의 전반적인 바이브와 비교했을 때 척봐도 어울리지 않는 지나친 감상주의에 입각한 해석임을 부정하긴 어렵다.

 

하지만, 영화 <티탄>은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감독이 의식이라도 한 듯,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스크린에서 표출되는 충격적인 이미지와 대조적으로 숭고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놀라운 경험을  보는 이들에게 선사한다. 앞서 상술했다시피, 영화의 도발적이면서도 불온전한 기운과는 너무나도 대치되는 감정으로서 생명중시에 입각한 기운을 다분히 표출하기 때문이다. 다만, 불온전한 욕망에서 시작해 신인류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예측불허한 서사 전개와 관련하여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주요한 분기점을 언급 안할 수 없다. 이는, 자신이 몸담지 않았던 세상으로 다시 귀속하겠다는 그녀의 결정과 관련지을 수 있으며, 그녀의 자기파멸적 행보와 대조적인 결단이기도 하다. 다만, 이와 관련해서는 뒤에 언급할 <베네네타>의 그것과 비교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시간은 중세 유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괴물의 탈을 쓴 성모 '베네데타'

<베네데타> / 감독: 폴 버호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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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xuality is the essence of life. Why are we so afraid to say that’s true?"

 

- 폴 버호벤, 2021년 IndieWire 인터뷰 중

 

 

<베네데타> 역시 스스로의 욕망에 솔직(혹은 굴복)한 인물의 들끓는 내면을 집중한다는 점에서 <티탄>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괴물이다. 다만, 이를 묘사하는 과정에서 사뭇 다른 메커니즘을 견지한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성적聖的 태도를 고수한다. 저마다의 욕구를 충족 시키는 과정에서 서로 속고 속이는 인간군상의 드라마는 설령 그 가치를 퇴색시킬지언정 퇴장시키진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신앙심을 지닌 '베네데타'(비르지니 에피라)는 자신의 부모님이 후원하는 페샤 수도원에 수녀로 귀의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신을 향한 믿음이 여전했던 그녀는 어느 날 눈앞에 도래한 예수의 환영을 목격하면서 그녀의 성스런 일상에 조그마한 균열이 발생한다. 점차 환영에 빠지는 빈도가 높아지는 가운데 그녀의 명성 또한 마을 전체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무아지경에 빠진 그녀가 내뱉는 말들이 신의 계시인지, 아니면 악마의 계교인지에 관한 진의여부가 뜨겁게 논의된다. 한편, 수녀원에 갓 귀속된 '바르톨로메오'(다프네 파타키아)는 속된 몸짓과 시선을 당돌하게도 베네데타에게 전하면서 사수의 잠든 육욕을 일깨운다. 증폭되는 수치심에 비례하는 흥분은 서서히 그녀의 신체를 잠식하며 성聖에 억압된 또 다른 성姓을 해금한다. 하지만, 늘 그렇듯 금기를 위반한 욕망은 죽음을 몰고 온다. 성모도 예외는 없다.

 

우리시대의 거장, '폴 버호벤'은 활동 50주년을 맞이했음에도 여전히 짖궃은 태도를 고수하며 끈적한 인간의 원초적 본능 속으로 다시한번 영화 팬들을 인도한다. 거부할 수 없는 욕망 앞에서 요동치는 사람들의 내외면에 누구보다 주목했던 그가 유럽 사회의 파장을 일으킨 한 레즈비언 수녀의 실화를 레퍼런스로 삼은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중세 사회의 금기로 적용되었던 동성애를 주도한 인물이 가장 성스런 공간의 책임자라는 모티브는 그 자체로 도발적이다. 성역 없는 시선과 손길로 관객을 경악시키는 황홀한 이미지를 구현해내는데 도가 튼 감독은 자신의 구미를 충분히 자극하는 테마를 토대로 그에 부합하는 파격을 선사한다. 수도원에서 맞이하는 첫날 밤, 갑작스레 자신을 덮친 성모 마리아상을 마주한 어린 베네데타의 모성을 갈구하는 인트로에서부터 감독은 이를 강렬하게 천명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도 때도 없이 베네데타의 눈 앞을 가로막는 환영은 감독의 악취미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자, 별 의미없는 이미지들의 나열 뿐이라는 뉘앙스를 통해 그녀를 향한 관객의 의심을 서서히 증폭시키는 기틀로 작용한다. 대체로 산짐승이나 도적들로부터 위험에 처한 자신을 주 그리스도가 구출해준다는 식의 환영 전개는 다분히 스스로에게 치중되었다는 의미에서 지극히 사적인 인상만 가득하다. 더불어, 백마 탄 그리스도라는 (다소 저렴해보이는) 기사의 이미지에서, 어린시절 우연히 길 위에서 마주한 흉칙한 도적의 얼굴로 점차 전환되는 그녀의 환영은 자신을 구하러 온 용사가 순식간에 그녀를 탐한다는 저열한 전개 양상을 띈다. 그럼에도, 수치심을 부여하는 상황과 너무나도 대조적인 베네데타의 역설적인 리액션은 종교적 함의를 크게 개의치 않는 감독의 대담함을 엿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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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네데타>, 2021년

 

 

베네데타의 환영과 관련해서 감독의 의중이 돋보이는 조악한 묘사는 신의 가호가 아닌 어느 독실한 여성의 무의식이 만든 허황된 꿈에 불과하다는 느낌만 한 가득 안겨준다. 무의미한 허구를 신의 가호라고 떠받들던 그 당시 종교계를 향한 감독의 힐난을 내심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물론, 그녀의 환영을 곁에서 지켜볼 타자의 시선이 개입할 수 없다는 전제가 그 당시의 종교계를 나름 변호해준다는 것 또한 감독은 이미 인정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지극히 사적인 상상을 성스런 계시로 둔갑시킨 한 여인의 정치적 면모에 적잖은 관심을 표명한다. 그와 관련해서 언급할 수 있는 또 다른 대목은 바로 이상과 현실이 공존하는 수녀원의 공간적 모순이다.

 

성스러운 공간이라는 인식과 달리, 영화 속 수도원은 이해 관계에 철저한 인물들의 정치적 행동들이 그 이면에 산재한다. 이는, 베네데타의 수도원 입속에 필요한 지참금과 관련해서 그녀의 아버지가 수녀원장인 '펠리시타'(샬롯 램플링)를 상대로 벌이는 협상 씬을 필두로 조금씩 폭로된다. 정치/종교계의 핵심 인사를 친인척으로 둔 사람들 이외엔 수도원 입회가 어려울 정도로 실제 역사는 종교가 곧 권력이었다. 이를 부각시키는 대목은 베네데타를 중심으로 구축된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성이다. 특히, 그녀를 수도원에 거둬들인 펠리시타와 베네데타의 관계는 상명하복에 입각했지만, 그녀가 신의 환영을 마주했다는 소식이 마을 전체는 물론 교황청에까지 전달되면서 굳건했던 수직관계가 순식간에 전복된다. 사실상 영화 <베네데타>는 정치 영화로 분류되어도 손색 없을만큼 수도원 내 알력 다툼이 서사의 또 다른 한축을 구성한다. 그 과정에서 '비르지니 에피라'와 '샬롯 램플링'의 호연을 기반한 베네데타와 펠리시타의 기싸움이 그야말로 압권이다.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명성을 기반으로 기세 좋게 성장한 베네데타의 존재가 수녀원장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거슬릴 뿐이지만, 수도원을 관리하는 입장에서 단순히 눈엣가시로 치부 할수도 없는 속사정이 그녀에게 있다. 이는, 비단 종교적으로 국한 될 수 없었던 거국적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신의 선택을 받은 수녀가 속한 수도원은 종교계의 명성을 높여줬다는 명목과 함께 교황청의 막대한 재정 지원을 받는 것이 명약관화한 수순이었다. 시시때때로 목소리를 달리하며 신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그녀의 무아지경은 얼마큼 사실에 근접하느냐에 따라 그녀 자신 뿐만이 아닌, 수녀원의 위상 또한 천지차이를 오갈 만큼 중요했다('비르지니 에피라'가 그 과정에서 엄청난 열연으로 무아지경에 빠져든 베네데타를 실감나게 표현한다). 그런 의미에서, 펠리시타와 베네데타의 관계는 부정하고 싶어도 쉽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적 딜레마를 가리킨다(흥미로운건, 베네데타와 더불어 펠리시타 역시 어머니의 포지션에 위치했다는 점이다). 그로부터 얼마 안있어, 교황청은 보다 명성있는 여인에게 새로운 수도원장 자리를 임명한다.

 

수녀원장과의 관계 만큼이나 베네데타를 사수로 모시는 바르톨로메오의 관계 역시 주종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바르톨로메오라는 이름과 함께 수녀원에 귀의할 수 있었던 근본적 이유는 베네데타의 집안에서 그녀를 위한 지참금을 마련해줬다는 현실적 이유 덕분이었다(그 과정에서, 그녀의 아버지는 딸의 부재에 따른 노동력 부족을 들먹이며 돈을 더 뜯어낸다). 이는, 그녀와 베네데타 사이의 관계가 어쩔 수 없이 채무관계에 입각한 갑과 을로 묘사할 수 밖에 없음을 은연 중에 드러낸다. 하지만, 성性적인 측면에 진입하는 순간, 둘의 관계는 조금 복잡해진다. 어린 시절부터 금욕을 주입받은 여타 수녀들과 달리, 어느 정도 나이가 찬 상태로 귀속된 바르톨로메오는 수녀원이 지향하는 규율에 반하는 짗궃은 손짓과 시선을 감추지 않는다. 물론, 그녀의 타겟은 당연하게도 자신을 거둬들인 베네데타의 정숙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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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네데타>, 2021년

 

 

다함께 신을 찬미하는 신성한자리에서 베네데타의 회음부를 대놓고 만지는 못된 손짓은 물론,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나신을 대놓고 응시하는 바르톨로에오의 시선은 평생을 신만 섬겼던 한 수녀의 잠재된 본능을 충분히 일깨워준다. 물론, 자신을 경솔하게 대하는 사제에게 그녀는 정신교육의 일환으로 징벌을 선사한다(사뭇 흥미로운건, 베네데타를 향한 바르톨로메오의 '시선'이 외면 당함으로써 그녀를 희롱한 자신의 '손'이 크게 다친다는 점이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고통으로 쓰러진 그녀의 곁에서 간호할 사제로 바르톨로메오가 다시 룸메이트로 들어선 순간, 베네데타의 마음 속에 1순위는 더 이상 신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대체된다. 이와 관련해서, 폴 버호벤이라는 감독의 악명을 제대로 드러내는 실체가 바로 친어머니로부터 어린 시절에 선물 받은 목재 예수상이다. 자신의 욕정을 보다 완벽해 메꿀 수 있는 남근의 대체 수단으로서 바르톨로메오가 정성스레 깎은 예수의 몸뚱아리를 그녀는 주저없이 은밀하게 자리잡은 욕망의 근원 속으로 채워넣는다. 그렇게, 다른 의미에서 그녀는 진정 신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베네데타>의 서사는 기본적으로 그녀가 신의 부름을 받았는지를 시작으로 사회적 관념에서 벗어난 동성애를 실제로 행했는가에 관한 진실 공방을 가리는데 주목한다. 그 과정에서 누구의 말이 거짓인가에 따른 위증죄가 사실상 영화가 극 중 인물들에게 칼날을 들이미는 가장 치명적인 이유임을 수차례 강조한다. 하지만, 감독의 시선은 그녀가 거짓을 했는가 아닌가에 큰 관심이 없을 뿐더러 그와 관련한 태도가 이미 정해졌다는 정황이 특정 쇼트들을 통해 충분히 암시한다. 카메라는 올곧이 베네데타라는 한 여인이 성모의 탈을 쓴채 벌이는 몸짓에 주목한다. 신과 교황으로 말미암은 수컷 중심의 보수주의 사회라는 당시 배경에 입각해서 바라보자면, 영화 <베네데타>는 스스로에게 너무나 솔직했던 괴물의 이야기다. 친모의 선물을 자신의 욕구수단으로 활용하는 성모의 과감한 이미지 하나만으로 이는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

 

성聖과 성性의 대비, 사회적 관념에 어긋난 동성애적 행각과 그 과정에서 수차례 등장하는 자기파멸적 성애 시퀀스는 감독의 큰 그림을 위한 지엽적인 부분에 불과하다. 엄청난 충격과 별개로, 이미지 하나만 떼어놓고 보았을 땐 결코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다는 판단은 반대급부로 영화의 탁월한 편집 솜씨를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더불어, 영화는 본다는 행위에 내포된 함의들을 적재적소로 활용하며 생생한 긴장감을 서사에 부여한다. 베네데타의 무아지경은 기본적으로 그녀만이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기인한다. 타인의 시선이 부재 중인 어두컴컴한 밤은 그녀의 욕망을 배가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수행하며, 수도원장을 둘러싼 그녀의 암투는 타자의 개입없이 마음껏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밀실 공간(원장실)을 갈구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바르톨로메오와의 밀회는 원장실 내부에 마련된 빈틈을 통해서 엿본 펠리시타의 은밀한 시선에 의해 발각된다. 아마도, 펠리시타 이전 시대의 수녀원장들이 설치해놓은 것으로 추정된 원장실 벽의 빈틈은 신의 이름으로 많은 인원의 수녀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시선을 적극 활용한 그 당시 집권층의 은밀한 권력수단의 한 예를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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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네데타>, 2021년

 

 

불건전한 일상이 순식간에 폭로된 성모는 사회적으로 위배된 욕망을 추구한 혐의와 함께 화형 선고를 맞이한다. 페샤 주민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죽음을 목전에 둔 그녀는,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군중의 시선들을 역이용함으로써 엄청난 선동 효과를 발휘해내는 생의 마지막 쇼를 통해 지난한 진실공방의 마침표를 스스로 찍는다. 당시, 유럽 전역을 감싸던 흑사병의 그늘이 자아낸 서슬퍼런 풍경 속에서 성모의 수난을 주도한 기성체제의 부역자들은 성난 군중의 손길에 의해 무기력하게 난도질 당한다. 그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가는 베네데타의 이미지는 사실상 성모의 탈이 벗겨진 개인의 전락을 가리킨다. 그렇게 그녀는 연인의 손을 꼭 붙잡고 파국의 현장에서 벗어나 깊은 산 속으로 운신하며 끝내 생존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다시 수녀원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두 번의 기로

두 번의 귀환


 

<티탄>과 <베네데타> 모두 작품의 행방을 좌우하는 중대한 선택의 기로 앞에 두 여인을 위치시킨다. 각자 이전에 머물렀던 곳으로 귀환을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서 장고 끝에 내린 그들의 결정은 관객의 입장에서 결코 납득하기 힘든 그녀들의 회귀의지를 내포하고 있다. 더불어, 그들의 선택이 최후에 이르러 자신들의 정체성을 어머니로 귀결시킨다는 점은, 수많은 공통점들을 공유하는 두 작품 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그것이다.

 

알렉시아는 원래부터 경찰의 포위망을 피하기 위한 일환으로서 빈센트의 아들을 연기하는 도중 그의 빈틈을 노려 탈출할 계획이었다. 몇 차례 시도 끝에 원하던 자유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 그녀는 뒤도 안돌아보고 빈센트의 집을 뛰쳐나온다. 하지만, 도주 과정에서 대기 중인 버스 안에 착석한 그녀는 잠시 후에 뒷자리에 앉은 4명의 무뢰배들로부터 희롱 당하는 한 여인을 곁에서 지켜본다. 남성들의 도를 넘는 치근덕거림에 어찌할 바 모르는 그녀의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던 알렉시아는 떠나는 버스를 뒤로 한 채 정류장에 홀로 서있는 쇼트를 통해 자신의 결심을 드러낸다. 그 길로 그녀는 빈센트를 다시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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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티탄>, 2021년

 

 

엄밀히 말해서 그녀의 결정은 여러모로 많은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여인의 몸으로서 홀로 살아가기 힘든 현실의 각박함을 언급하기엔 앞서 보여준 예측불허하면서도 난폭한 알렉시아의 캐릭터성과 비교했을 때 쉽사리 연결되지 않는다. 홀로 남겨진 빈센트가 염려되었다는 추측 또한 이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크게 설득력이 없다. 되려, 상정된 결말을 위해 석연찮은 개연에도 불구하고 감행한 의도된 복귀가 오히려 전체적인 맥락을 가늠했을 때 더 와닿는다. 클라이막스와 직결된 그녀의 귀환은 가뜩이나 울퉁불퉁한 영화의 서사 전개 과정에서도 다분히 이질감이 느껴지는 지점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알렉시아의 귀환과 관련한 여러 이유를 추측 가능케하지만, 대다수는 핵심에 도달하지 못한 채 꿈보다 해몽식 해석으로 귀결된다. 이제껏 마주하지 못한 욕망이 낳은 신인류의 생경한 바이브를 클라이막스에 기정한 듯한 전개 방식은 전반적으로 이질감이 다분하다는 점에서 조화라고는 눈꼽 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프랑켄슈타인의 얼굴을 연상시킨다. 물론, 영화의 불건전한 바이브와 오히려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점은,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영화의 진실은 달리 정의되고 판단될 것이란 점이 제일 명확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다만, 충격과 공포가 엄습하는 와중에도 온 몸이 티타늄으로 구성된 새로운 생명체의 탄생이 촉발시키는 엔딩 시퀀스의 기이하면서도 장엄한 숭고함을 감안하면, 흡사 자식을 보호하기 위한 모성의 잠재적 본능이 그녀의 귀환을 이끌었다는 또 하나의 추측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서두에 언급되었던 구버전으로서 모성의 상징성을 다시 끌고온 해석이자, 그녀의 '되'돌아가는 행동의 방향성과 충분히 결부 지어서 언급할 수 있는 대목으로서 예측 불허한 작품에 걸맞는 기묘한 윤리적 귀결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티탄>은 수차례 선을 넘은 끝에 드디어 자신만의 새로운 선 속으로 안착한, 괴물의 탈을 쓴 한 어머니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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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네데타>, 2021년

 

 

반면, 베네데타의 경우, 죽음이라는 태풍으로부터 가까스로 벗어난 상태에서 모든 사태가 종결된 이후 비로소 선택의 순간이 그녀의 눈 앞에 등장한다. 자신이 겪었던 페샤의 수난은 금새 잊어벼렸다는 듯, 그녀는 자신과 함께 수도원을 탈출한 바르톨로메오를 뒤로한 채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가겠다고 천명한다. 이 모든 과정들을 지켜본 관객들과 유사한 표정으로 깊은 의문을 표하는 바르톨로메오에게 그 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말만 남긴 그녀는 그렇게 유유히 마을로 되돌아가는 모습만 남긴 채 사라진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그 날 이후 죽는 그 날까지 수도원 바닥에서 식사했다는 베네데타의 후일담은 그녀의 말로가 예상했던 그대로였음을 다시한번 확인시켜 준다.

 

그녀의 이해할 수 없는 복귀는 수녀로서의 정체성을 끝내 버리지 않겠다는 일말의 소명의식과, 그럼에도 자신은 잘못이 없다는 철판 같은 의지라는 두 가지 요인을 도출 할 수 있다. 여기에, 비루한 욕망에 눈이 멀대로 먼 스스로를 징벌하는 마음으로 비참한 미래를 자초했다는 견해 또한 내비췰수 있지만, 이는 전자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별도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건, 베네데타 또한 비록 아우라는 소멸되었을지 언정, 성모로서의 남은 책임을 다하기 위해 그녀 또한 다시 '되'돌아간다는 알렉시아와 유사한 행위의 방향성에 기인한다. 알렉시아와 마찬가지로, 베네데타 역시 욕망을 수없이 소진한 끝에 다시 모성으로 회귀한다.

 

 

 

회귀하는 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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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더>, 2009년

 

 

어머니라는 정체성과 함께 굴곡진 서사에 마침표를 찍는 두 여인이지만 기존의 모성과는 확연히 다른 구석을 지녔다. 채워도 끝이 없는 블랙홀 마냥 욕망을 지속해서 갈구하던 그녀들의 내면은 때로는 비윤리적이면서도, 가히 신성모독에 준하는 행위를 촉발한다. 규범에 어긋난 이들의 행동을 사회는 광기 혹은 이단으로 치부하며 사회와의 철저한 격리를 이들에게 촉구한다. 기성체계의 환영을 절대 받을 수 없는 이들은 형언할 수 없는 존재로서 괴물이라는 오명을 안긴다. 물론, 누구보다 솔직한 이들에게 어쩌면 찬사로 들릴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그 누구도 아닌 오직 자신만을 위해 기꺼이 괴물의 탈을 뒤집어 쓴채 욕망을 향해 지체없이서 돌진할 수 있다는 솔직함이다. 그 과정에서 쏟아지는 온갖 비난의 눈초리는 그녀들에게 감내할 거리도 못된다.

 

그럼에도 주목할 수 밖에 없는 건 결국 어머니로서 다시 돌아간다는 그녀들의 행위이자 회귀의지다. 기존의 문화예술 분야에서 마르고 닳도록 소모되었던 '그' 헌신적인 모성을 지향하는 바가 결코 아니다. 그녀들의 회귀는 어머니라는 새로운 정체성과 함께 보다 폭 넓은 함의로 구축된 새로운 상징체계를 향한 또 다른 일보 전진이다. 이들은 단지 어머니라는 맡겨진 역할과 임무에 준하는 책임을 다할뿐, 결코 자신을 우선 순위에 배제하는 법은 없다. 홀몸에 익숙해진 나머지 누군가를 잉태하고 출산하며 결정적으로 보듬어줄 수 있는 포용심을 미처 갖추지 못한 관계로 실수를 연발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과오를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인채 맡겨진 소임을 이들은 다한다. 어쩌다 두 여인의 우선 순위에 다른 누군가가 함께 공동 1위를 차지할 수 있을지언정, 자신이 포함되지 않는 경우는 절대 없다. 자아가 사라진 모성은 알렉시아와 베네데타의 세계에 더 이상 아무런 상징도, 의미도 발휘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서두에 잠깐 언급했던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를 다시한번 꺼내 볼 필요가 있다. 아들이 연루된 살인사건의 전말을 알게된 '엄마'(김혜자)는 그에 따른 번뇌로부터 해방되길 바라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억을 잊게 해준다는 허벅지 부위에 침을 놓은채 어디론가 떠난다. 자신을 싣고 떠나는 버스 안에서 벌어지는 광란의 춤사위 한복판으로 들어간 그녀는 그렇게 자신과 같은 처지의 동료들과 함께 과거로부터의 해방을 시도한다. 보다 우회적이고 은유적인 방식에 입각했을 뿐, 자신의 욕구를 적극 표출하고 행동으로 옮긴 다는 점은 <티탄>과 <베네데타>의 해금 행위와 사실상 동일하다. 그렇게, 자신을 둘러싼 모든 금기를 해제하는 과정에서 욕구는 완벽히 충족되고, 자아는 완벽히 실현되며, 모성은 새롭게 정의된다.

 

영화 <티탄>과 <베네데타>의 서사는 바로 여기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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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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