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정원] Prologue, 언어의 정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글 입력 2021.11.18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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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정원>이라는 제목명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영화에서 차용했습니다.

 

 

오늘의 글은 높임말로 시작해보겠습니다. 갑자기 새삼스럽게 말을 높이는 이유가 무엇이냐고요? 제가 지금부터 개시하려는 프로젝트가 어쩌면 꽤나 외람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제 안에서 움을 트곤 좀처럼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개 하룻강아지는 좀처럼 범이 얼마나 대단한 지를 체감하지 못하기에... 말이라도 높여보며, 공손히 저의 뜻을 전달해보고자 합니다.


그 전에 잠깐, 본격적인 설명에 앞서 조금은 뜬금없긴 하지만 스무고개 놀이로 이 어색함을 풀어볼까 해요. 설명되어 있는 글을 잘 보시고, 답을 맞춰주시면 됩니다.


 

나는 누구일까. 그리고 어찌될까.


나는 나무에 그려지고 돌에 새겨지며 태어났다. 내 첫 이름은 ‘오해’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들 필요에 의해 나를 점점 ‘이해’로 만들었다. 나는 내 이름이었거나 내 이름의 일부였을지 모를 그 낱말을 좋아했다. 나는 복잡한 문법 안에 담긴 단순한 사랑, 단수이자 복수, 시원이자 결말, 거의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노래다. 하루치 목숨으로 태어나 잠시 동안 전생을 굽어보는 말이다. 내 몸은 점점 붇고 이름 또한 길어져, 긴 시간이 흐른 뒤 누구도 한 번에 부를 수 없는 무엇이 됐다. 그렇지만 이제 나는 이 세계를 돌아가게 하는 동력, 쓸모 있는 죽음, 단지 그뿐인 채로 사라진다. (…)


태어나 내가 처음으로 터트린 울음, 어쩌면 그게 내 이름이었을지 모른다. 죽기 전, 허공을 향해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어떤 이의 절망, 그것이 내 얼굴이었을지 모른다. 복잡한 문법 안에 담긴 단순한 사랑, 그것이 내 표정이었는지 모른다. 범람 직전의 댐처럼 말로 가득 차 출렁이는 슬픔, 그것이 내 성정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내 이름을 못 왼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순 있다. 당신이 누구든 내 말은 당신네 말로 들릴 것이다.


- 김애란, 침묵의 미래

 


‘나’가 누구인지 눈치 채신 분이 있을까요?


맞습니다. 나무에 그려지고 돌에 새겨지며 태어나는 것, 오해로 시작되었지만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소통의 수단으로 만들어버리고 만 것, 이제는 이 세계를 돌아가게 하는 동력이기도 한 것…. ‘나’는 바로 ‘언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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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사이트 에디터 분들이라면 동감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제가 글을 꾸준히 쓰며 느낀 가장 큰 기쁨은 추상적인 감정에 머물러 있던 것들을 끄집어내어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만히 놓아두면 휘발되어버릴 것이 분명한 그것들을 언어라는 공통된 약속으로, 활자로 조각해낼 수 있다는 사실. 그곳에 여러 감정과 기억들을 저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가슴 벅찬 설렘으로 다가왔습니다.

 

언어라는 테두리 안에서 우리가 소통할 수 있음은 감사한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종종 이 테두리가 감옥의 쇠창살처럼 차갑고 싸늘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 울타리 안에 갇혀서 표현되는 말들은, 같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게 될 때가 잦으며 때때로는 그로 인해 뜻을 완전히 오역하게 되는 경우마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슬픔을 나타내는 의미의 단어를 살펴보겠습니다. 서글프다, 애달프다, 비애, 속상하다, 섭섭하다, 구슬프다, 애통하다, 애석하다, 우울하다…. 금세 여러 단어들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단어를 골라서 저의 구체적으로 슬픔을 표현한다 한들, 제가 어디가 얼마만큼 아린지, 어떻게 슬픈지 제가 느끼는 그 단어의 의미 그대로, 감정의 크기까지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요? 저는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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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작가들의 책을 읽다 보면 종종 이런 것이 가능한 이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적확한 문장들을 비수같이 내리꽂는 그 정경을 보면 가끔은 자괴감이 일 때도 있지만, 보통은 그것을 넘어서는 감동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합니다. 언어를 다루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고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완벽한 문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지지부진한 제 글 솜씨에 비참해 하고 있을 무렵 다시 만나게 된 이 문장은, 완벽한 문장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절망할 일은 아니라는 의미로 새롭게 들렸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완벽하게 정의내릴 수 없는 것에 낭만을 느끼고, 그래서 그 답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찾아내기 위해 고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문학과 예술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겠지요.

 

언어를 다루는 이들의 고뇌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20년 넘게 번역을 해온 베테랑 번역가 권남희는 원문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고 번역하기 위해 조사 하나 하나에도 공을 들이며, 이야기가 독자에게 정확히 가닿기 위해 아직까지도 직역과 의역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한다고 합니다. 안희연 시인은 ‘사실은 흰 접시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데 흰 접시의 테두리만 만지작거리는’것을 시라고 표현하기도 했으며 이병률 시인의 시 중에는 ‘사실 내가 쓰려고 쓰는 것이 시라기 보다 쓰지 못해 쓰는 것이 시일 때가 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특히 김훈 작가가 <칼의 노래>의 첫 문장인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에서 ‘꽃이’가 맞는지, ‘꽃은’이 맞을지 고민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유명한 일화입니다. 모두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고 있는 것이죠.


혹시 떠오르는 장면이 있으신가요?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 박진영 PD가 인상을 찌푸리며 녹음실에서 “다시, 아니야, 감정이 부족해. 다시.”라고 외치는 모습이 떠오르곤 하는데요. 그다지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이 작업에 이들이 이토록 치열하게 몰입하는 이유는 음악을 하는 이들에게도 표현하고자 하는 적확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전달하기를 원한 정확한 의미는 숨소리나 밴딩 등의 미묘한 차이로 판가름이 나고요. 음악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화예술작품에는 창작자가 꼭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그들만의 언어로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저를 하룻강아지로 칭한 까닭을 말씀드릴 시간이 온 것 같습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언어로 기의를 오롯이 담아낼 수 없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증명되어 온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르지 못할 나무는 자꾸 쳐다보고 싶어집니다. 저명한 작가들도 아직까지 종종 고뇌하고야 마는 일을, 에세이 프로젝트라는 명목 하에 변변찮은 내공으로 시도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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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정원>은 문화예술 작품에서 얻은 사유를 풀어내는 과정을 통해 여러 언어들을 저만의 사적인 해석으로 재정립하는 에세이 프로젝트입니다. 이러한 프로젝트를 진행한 사람이 제가 처음은 아니겠지만, 누구에게나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관념적인 단어들에 대해, 이 시절의 저만이 정의내릴 수 있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양한 작품들에 내포된 창작자들의 고유의 언어를 발견하고 저만의 사전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기획하였습니다.


무언가 확신에 차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확신을 얻기 위해 누구나 고개를 주억거리게 될 정도의 치열한 고민과 노력을 반복한 사람들에게는 남다른 아우라가 느껴집니다. 20대의 내가 호기롭게 정의내린 단어들을 30대가 되어 돌아본다면 코웃음을 칠 수는 있겠으나, 스스로에 대한 무한한 확신은 끝없는 좌절과 반복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가끔 좌절하고, 견디며, 그러나 반복하며 써내려갈 예정입니다. 그 언젠가의 나에게 아우라의 '아'자라도 느껴지길 바라면서요.


에세이는 격주에 한 번씩 기고됩니다, 다음 편은 ‘사랑’이라는 언어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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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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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어의 정원'이라니, 제목부터 제가 좋아하는 단어들의 조합이라 이끌린 듯 들어왔고, 언어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공감가는 부분이 많아 처음부터 끝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습니다.

      저 또한 적확한 문장들을 비수같이 내리꽂는 정경을 마주할 때면 자주 깊은 감동을 받곤 하는데요. 그런 지점에서 항상 언어의 힘을 느낍니다. 흐릿하고 불완전한 생각과 감정을 '언어'라는 그릇에 담아 가시적으로 표현해내고 나면 훨씬 형태가 잡힌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그것이 언어의 본질적인 역할이기도 하겠지만요.

      요즘에는 '어떤 단어로, 어떤 표현으로 온전히 내 감정과 생각을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끊임없이 품습니다. 그때마다 한정된 언어에 갇혀있는 제 모습과 표현 방식에서의 미숙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다시 절망이고 비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나님의 글에서 "완벽한 문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이라는 문장을 만나고 저 또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결국 언어에는 완벽함이란 없고 늘 불완전하기에 다양한 모습으로 늘 재정의되고, 그에 관한 이야기들도 뻗어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늘 꽂히는 단어가 생기면 시간을 충분히 갖고 저만의 사전으로 재정의를 내리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그래서인지 이번에 세나님의 고유한 시선으로 뻗어나갈 언어 사전이 반갑고 또 흥미롭게 다가오네요. 세나님의 섬세한 언어 조각을 피워낼 다음 언어의 정원을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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