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순수와 소통의 경계에서 -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글 입력 2021.11.16 11:11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그림책은 다음에 올 사람, 아직 미정인 존재를 위한 책이다. 주류 사회가 요구하는 언어로 스스로를 온전히 설명하거나 변호할 수 없는 사람들, 권력의 중심부에 서본 적 없는 이들을 향한다. 이들이 겪어나갈 세계는 그리 녹록지 않다. 위계는 촘촘하고, 경쟁은 잔혹하다. 좌절, 실망, 모욕, 상실, 상처가 필연적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쉽게 안 변해." 다음에 올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절망적인 이야기는 없다. 그림책은 부지런히 속삭인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가 아니야. 더 자유롭게 비틀고 꿈꾸렴. 너에겐 이곳을 더 좋게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어."

 

- 작가의 말 중에서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 표1.jpg

 

 

책을 출판함으로써 수익활동을 하는 것, 그림을 그리면서 수익활동을 한다는 것. 언뜻보면 이상과 낭만으로 가득한 일들이나, 이 두가지 모두 그리 순탄치 않다. 그렇다면 그림과 책을 결합한 그림책을 내는 작가들의 삶은 어떨까.

 

사람들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은 인터뷰에 남다른 관심이 있는지라 이 책이 더욱 반가웠다. 그림책 작가로 살아가고 있는 10명의 인터뷰이들을 만나 작가생활에 대한 이상과 현실, 그럼에도 작업을 계속 해나가게끔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10명의 인터뷰이들의 기록은 읽기 쉽고 다정한 대화를 그대로 옮겨두었다. 그러나 평균 10년여 이상의 시간을 작가로 살아온 이들의 작업에 대한 고찰은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책이라는 매개체 뒷편에서 다양한 재료와 고민을 기반해 자신만의 그림체를 만드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일러스트레이션을 통해 출판 목적의 책을 만든다는 것은 관람자 역할을 할 독자들을 고려해야하는 것이기에, '삽화로서 기능하되 조형성을 갖춘' 스타일을 구축하고자 많은 애를 쓴다. 다만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키를 잡아주는 것은 출판사와 편집자이다. '찬찬히 생각해보면 작가 활동을 위해 반드시 많은 사람들의 지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는 소윤경 작가의 말은 그림책 작가에게 있어 큐레이터와 갤러리스트의 역할을 해주는 것이 출판사와 편집자임을 알 수 있다. 서양화를 전공하며 비슷한 결의 진로에 관심있는 사람으로서 소윤경 작가님의 인터뷰가 가장 와닿았다.

 

 

Q.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파리국립8대학에서 조형예술을 전공하셨지요. 거기에서 '자폐적인 현대미술'에 회의감이 드셨다고요.

 

A. (중략)…미술계를 움직이는 자본과 권력의 힘을 목격했어요. 강대국의 오만함, 유행, 줄서기 같은 것도요. … 현대미술은 예술을 위한 진보에 골몰하느라 세계와의 소통은 뒷전으로 밀어두었지요. 하지만 원래 화가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그림을 생산하는 사람이었어요. 근대 모더니즘 시대 이전까지는 늘 실용적 목적에 맞추어 그림을 그렸지요. 화가의 원래 역할로 살아가겠다 결심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일러스트레이터 활동을 시작했어요.

 


'사람들은 쉽고 친절한 것을 만만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어렵고 불친절한 것은 괜스레 추켜세운다. 일러스트레이션은 회화에 비해 친절한 예술이기 때문에 괄시받는 경험이 있었을 것 같다'라는 인터뷰어의 질문은 지금의 내게도 큰 공감이 되는 것이었다. 단순히 개념적 레이어에 대한 이야기를 떠나서도, 불필요하게 내재되어있는 위계가 있다는 것에 절절히 공감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최대한 안정시키고자 과감하게 고요한 지역으로의 이사를 결심했던 작가님의 결단이 와닿았다. '예술이 생활보다 숭고하고 우월하다는 말을 믿지 않기에','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기에','열심히 일하고 정당히 돈을 벌어 세금을 내는 화가라는 직업인이고 싶기에' 예술을 위한 예술보다 예술가로 살아가는 법을 선택한 사람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림책은 두께가 얇고, 페이지 수가 적다. …(중략) 그렇다면 스무 장의 원화를 생산하기 위해 작가는 몇 장의 그림을 그릴까?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그림책 작가들이 가진 특수한 능력에 감복한다. 바로 아낌없이 버리는 능력이다. 최종적으로 실릴 그림은 스무 장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떤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생각을 끈질기게 펼쳐낸 다음(이들에게 생각을 펼친다는 건 그려본다는 뜻이다), 진부하거나 구체화하기 어렵거나 기대와 다른 효과를 내는 아이디어를 버린다. 처음 그림책 작가들을 취재할 때, 작가의 서랍에 보관된 수많은 스케치들, 원화 B컷들, 견본책들이 너무나 아깝게 느껴졌다. 내 눈에는 그것들도 모두 훌륭해 보였기 때문이다.

 

- 본문 중 인용

 


섬유예술을 전공한 뒤 그림책 작가가 된 유준재 작가의 인터뷰는 일러스트레이션과 같은 대중적 상업예술과 예술 자체를 즐기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 사이에서 작가가 지향해야하는 마음가짐을 일러준다. '어떻게 하면 이 경험이 다음의 작품에 도움이 될까'를 궁리하며 다음에 작업하고 싶은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지향점, 목표의 유무가 동일한 생업 활동을 하더라도 모든 것의 의미가 달라진다고 본다.

 

먼 곳을 두리번거리지 말 것, 일상 속에서 가능성을 찾을 것, 작은 가능성을 정성그레 가꾸어 키워갈 것.

 

아베 히로시 작가의 강연에서 얻은 창작자의 태도를 잊지 않겠다는 말이 단박에 이해되었다. 사실 순수예술을 공부한 입장에서 여전히 '예술가'로 사는 것과 '창작자'로 사는 것이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느끼면서도 필드 안에서 그 경계를 구분짓는 것이 아주 첨예하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그림책 작가들은 나와 같은 갈등과 고민 속에서, 자신들이 배우고 사랑하는 것을 어떻게 하면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형태로 만들어 갈 수 있는가를 고민한 것은 아닐까. 그 결과는 결국 대중친화적인 매체인 책이나 미디어들을 자연히 향하게 되었을 것이다.

 

공통적으로 소개된 작가들이 만난 매개가 책일 뿐, 이들에게 있어 그 경로가 되어줄 수 있는 것이 또 다른 매체였다하더라도 인터뷰의 결은 같았을 것이다. 다만 특수한 지점이, 그림책은 '남녀노소' 모두와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텍스트가 빠진다하더라도 삽화만으로 어느 정도의 서사를 전할 수 있어야한다. 그 과정에서 그림이 다소 설명적이거나 수단적인 성격으로 변질된다해도 그보다 사회와의 의사소통, 커뮤니케이션 아트로서의 기능을 최우선의 가치로 추구하는 것이다.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이 나에게는 무척 운명같다고 느꼈다. 나 또한 인터뷰 작업을 하며 책과 그림을 창작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데, 늘 순수예술의 울타리 안에서 나와 닮은 생각을 하는 이들은 적다는 갈증이 있었다. 어렴풋 스스로의 성향은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통해 작가들이라면 누구나 놓이는 경계들 사이의 간극에 공감했다. 흥미로운 것은 내 생각보다 이 책에 소개된 작가들이 굉장히 순수예술 계열의 미술을 공부한 사례가 많았다는 것이다. 보다 응용미술과 가까운 공부를 한 사람들이 많겠지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 갈증을 누구보다 극심하게 느끼고 고민했을 작가들이기에 '그림책'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는 것의 가치를 분명하게 목표로 설정하고 작업할 수 있는 자신과 확신이 생겼겠구나 추측했다.

 

상업예술과 순수예술의 치열한 경계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좁혀지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고정관념 탓도 있겠지만, 다른 어떤 가치관도 작가의 주제의식과 개념보다 우위에 두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 순수예술만의 '순수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가치는 여전히 높은 존중이 필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렇다고 하여 상업예술과 자신의 작업을 결부시킨 또 다른 경로를 탐색한 작업의 창조 정신이 폄하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상업예술을 하면서도 순수예술가들이 가지는 긍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고민하게 되는 책이었다. 아마도 그 답은 작가로서의 정신을 작가 스스로가 놓지 않는 것. 소통을 지향했을 뿐 타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다른 어떤 이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소위 '동시대 미술'이 전개되고 있는 작금의 현대에서 그림책 작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데 모아볼 수 있어 무척 큰 환기가 되어준 책이었다. 나는 향후 5년, 10년 뒤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의 경계 중 어떤 쪽에 가까운 사람이 되어있을까 그려본다.

 

 

[지현영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17141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2.01.27
Copyright ⓒ 2013-2022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