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보란 듯이 경계를 모조리 부숴버린 한 연극 - 보더라인 [공연]

다시 한번, 마법 같은 힘을 발휘해야 할 때
글 입력 2021.11.12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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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되자 안내가 흘러나온다. 객석이 살짝 어두워지나 완전히 꺼지진 않는다. 곧 사람이 무대에 등장한다. 연극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배우는 무대 가장 안쪽의 기다란 봉에 흰색 천을 달 뿐, 별다른 행동이나 대사를 하지 않는다. 흰색 천이 달린 봉이 올라가더니 스크린으로 변신한다. 이윽고 묵묵히 무대 가운데에 텐트를 친다. 어쩌면 연극이 시작한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


하고 싶은 메시지를 다 녹여내기에도 짧은 2시간 중 거의 2할에 육박하는 시간을 무대 세팅에 쓰다니. 기존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연출이었다. 연주자가 피아노 앞에 앉아있기만 하고 들어갔다는 존 케이지의 ‘4분 33초’가 떠올랐다.


놀라운 연출 기법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함께 몇 년 동안 교류하며 준비한 독일 배우가 코로나-19 방역 지침으로 인해 입국하지 못하게 되자, 실시간 화상 통화 프로그램인 Zoom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처음에는 걱정이 되었다. 인터넷을 통한 연결이 필연적으로 부르는 낮은 화질의 화면, 스피커에서 들리는 목소리, 떨어지는 생동감을 어떻게 해결할지 궁금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연출이 무대를 내려다보며 조명, 음악, 배우의 등장과 퇴장 타이밍을 맞추고 극 전반을 관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보더라인’은 배우 전부가 다른 장소에 있고, 심지어 연출가도 배우로 등장한다. 이 연극,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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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처럼 이 극에는 각자의 경계를 탈출하여 새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연극 ‘보더라인’을 준비하는 배우, 탈북자, 독일인. 유일하게 관객과 한 공간에 있는 배우는 독일인과의 협업을 위해 열심히 독일어를 익히고, 독일에 정착한 난민의 텍스트를 발췌하여 읽는다.


이렇게 배우가 익히고 배우는 노력을 통해 언어와 문화의 경계를 넘는다면, 독일인은 동독에서 태어나 통일 후 서독에서 자란, 어느 날 돌연 경계가 사라진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아직 경계가 사라지지 않았고 경계를 넘기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하며 경계를 넘고도 보이지 않는 경계와 마주하며 힘겨워하는 탈북민이 묘사된다.


등장인물이 있는 위치가 전부 다르다. 무대에는 한 명뿐이고, 독일인 배우는 본인이 사는 집(당연히 독일에 있다), 연출가도 본인의 집, 탈북민은 을지로 어딘가에 있었다. 떨어져 있는데도 등장인물 사이의 의사소통은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배우의 동선을 ‘제4의 벽’(연기하는 배우가 있는 무대와 객석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을 지칭하는 연극 용어)을 뚫고 나오게 짜기도 쉽지 않은데, 인터넷을 매개로 시간과 공간이 전혀 다른 배우와 관객이 소통하고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제거되고 동서 간 교류가 이루어졌지만, 마음 한편에 통일 이전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독일인. 온화했던 시선이 차갑게 식어버릴까 봐 차마 출신을 말할 수 없는 탈북민. 범죄 가능성을 이유로 살 곳을 얻지 못하고 쫓겨나는 난민. 연극도 시공간의 제약을 깨는데, 왜 사람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거대한 베를린 장벽이 부서지지 않고 건재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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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분필로 DMZ 철조망으로부터 선을 그어나가기 시작한다. 임진강역, 자유로, 서울 한복판을 지나 극장으로 들어온다. 선은 무대를 한 바퀴 휘감은 후 반대편 출구로 빠져나간다. 무대에 서 있는 유일한 배우는 천천히 원 주위를 돈다. 선이 이어져 있지만 기실 점의 연결임을 음미하듯이.


그리고 선을 따라 달린다. 몇십 킬로미터를 뻗어 나간, 앞으로 그것의 몇 곱절을 더 뻗어 나갈 선이 만든 교점이 바로 저기 있었다. 쭉 앞으로 가기만 했던 선이 겹친 유일한 곳.


어떤 물체가 원운동을 하려면 운동 방향이 끊임없이 바뀌어야 한다. 선이 가던 길을 멈추고 아까 지났던 곳으로 돌아오려면, 우리는 진행 방향을 바꿔야 한다. ‘만남’을 위해서는, 얼핏 보기에 공통점이 없는 것 같은 우리에게서 ‘교점’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살짝 경로를 틀어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얀 원에서의 배우의 뜀박질은, 비단 물리적인 경계의 해체뿐 아니라 우리도 모르게 일상적으로 행하는 차별과 분류가 사라졌으면 하는 몸부림의 표상일까.


**


다시, 아트인사이트에 올렸던 첫 글을 떠올려본다. 북한 땅을 떠나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고 생명수를 구하고자 했던, 황석영 작가의 소설 속 바리데기가 생각난다. ‘아직도 세상 도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하루라도 맘 편히 먹고 살아남기 위해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국경을 넘고 있었다.’


글을 마무리하며, 한 번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다름이 구별과 불편을 일절 낳지 않는 세상이 올까? 다름을 ‘인정’한다는 말조차도 사라지고, 다름이 일상이 될 수 있을까? 전 세계 인구 78억 명의 생각이 일시에 바뀌지 않는다고 하여 포기하기엔 이르다. 기존의 연극이 가진 특징과 고정 관념을 깨버린 ‘보더라인’처럼, 인류의 마음속 장벽은 절대 허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도 깨부수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만남의 시도이자, 더 이상 불가능할 것 같은 ‘연극’에 대한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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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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