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ROMA [영화]

혼돈 너머에 자리하고 있는 것.
글 입력 2021.11.11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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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부모라는 단어에 이질감 느낄 때가 있다. 부모라는 것이 말 그대로 부와 모를 지칭하는 단어인데 다들 정자와 난자로 생겨났음은 명백한 사실이니, 그렇다면 이 세상에 부모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싶겠지만, 부모라는 것은 있다가도 없을 때가 참 많다.


홍길동만 봐도 그렇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부모가 있지만 부모가 없는 이런 경우가 과거엔 수도 없이 많았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단순히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가족과의 종속이 영원할 거라 믿을 수는 없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영화 속 사 남매에게는 분명 그들을 존재하게 한 아버지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아버지가 다른 여성과 바람피우는 장면을 목격한 그 찰나의 순간, ‘내 아버지가 아니야’라는 단 한마디 말로 그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고 부모와 가족이라는 복잡하고도 내밀한 이 관계는 끊어지고 만다.


 

 

ROMA


 

이 영화는 혼란과 혁명의 시기가 도래한 197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한 중산층 가정을 관통하는 격변의 시기를 주인공 ‘클레오’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길고 긴 오프닝 시퀀스, 관객을 향해 타일 바닥을 타고 내려오는 물의 모습이 마치 파도가 치는 듯하다. 약 3분간 카메라는 미동도 없이 그저 타일 바닥만을 보여준다. 관객은 궁금증을 자아내는 화면 밖의 소리를 들으며, 쓸려오는 물 표면 위로 보이는 비행기만을 지켜볼 뿐이다. 카메라가 고개를 들어 그 너머를 보여주고 나서야 이곳이 어느 가정집 복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관객은 클레오를 따라 집의 시작인 복도에서부터 내부 더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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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고 화목해 보이는 가정과 클레오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 보인다. 그러나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란 말에 맞게 클레오와 가정 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함께 가정부 일을 하는 아델라 남자친구의 사촌 ‘페르민’과의 성관계로 클레오는 임신을 하게 되고 페르민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 사 남매의 어머니인 소피아는 남편의 외도를 알고 힘들어하지만 그런 클레오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챙겨준다.

 

아버지가 퀘벡에 있다고 거짓말하고 있던 소피아는 아이들에게 진실을 말하고, 임신한 몸을 이끌고 페르민을 찾아간 클레오는 그에게 창녀 취급을 받았고, 1971년 학살이 일어나던 날 결국 아이를 유산하게 된다.

 

죽은 사람처럼 꿀 먹은 벙어리가 된 클레오, 소피아와 아이들과 함께 바닷가로 이별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한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는 그들의 모습은 가정부와 고용자의 관계가 아닌 가족의 모습에 더 가깝다.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물에 빠진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클레오는 거친 파도를 향해 걸어간다. 수영을 못 하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구해낸 아이들에게 둘러 안긴 클레오는 입을 열고 그녀의 속마음을 꺼낸다.

 

 

 

멕시코의 계급구조



과거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를 받던 멕시코는 19세기 초 독립하였지만, 사실상 지배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독립 이후 여전히 잔존하고 있던 지배 계급에 대한 저항으로 20세기 초 수많은 혁명 지도자들이 등장하였지만, 영화 ROMA에서 나타나듯 20세기 후반에도 백인 엘리트 사회계층과 원주민들 간 계급 격차는 줄어들지 않고 더 굳건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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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이러한 모순적인 사회 구조를 자각할 수 있는 요소들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클레오는 페페와 옥상에 누워 쉬면서 이런 게 죽는 거라면 “죽어 있는 것도 괜찮다.”라고 말한다. 이 장면을 통해 피지배계급이 얼마나 쉴 틈 없이 일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복도에 늘비한 개똥을 치우는 것도 소파가 아닌 바닥에 무릎 꿇고 앉는 것도 모두 그녀의 역할이다. 학교에 아이들을 데리러 오는 유모들이 대개 클레오와 같은 하위 계층 여성들이라는 사실이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바르세나 대농장에서 산에 불이 나자 모든 이들이 불이 난 쪽으로 뛰어간다. 아이들은 재미있는 일인 것 마냥 작은 불씨에 물을 붓고 발로 밟는다. 큰불이 난 쪽에는 카우보이모자를 쓴 성인 남성들이 불을 끄려 애쓰고 있지만, 그들의 고용주이자 부르주아 계급에 속한 이들은 불에서 열 걸음 떨어져 와인이 담긴 유리잔을 손에 쥐고 고상하게 그런 그들의 모습을 관전하고 지시 내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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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와 종속 관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노래 부르는 한 남성을 주목한다. 화재라는 부차적 상황에서 빠져나와 더 큰 세계를 어우르고 있는 거대한 불길, 불평등한 권력 구조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는 것이다. 환기이자 거리 두기, 명백한 감독의 의도이다.


 

 

어머니라는 이름


 

남편의 외도를 알고 난 후 소피아는 클로에에게 이렇게 말한다.

 

- 우리 여자들은 늘 혼자야.

 

강해져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지만 이 말이 클레오에게 위로가 되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피지배계층보다 더 낮은 계급인 여성 피지배계층에 속해 있는 그녀가 어머니라는 이유로 아버지 없이 아이를 키워야 함에는 필히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인내가 따랐을 것이다. 그렇기에 후에 그녀가 죽은 아이에 대해 '원치 않았던 아이'라고 말하기까지 얼마나 큰 죄책감을 느꼈을지 감히 상상하게 된다.

 

영화 초반, 페페와의 대화 중 말을 하지 않는 페페에게 클레오가 묻는다.

 

- 왜 꿀 먹은 벙어리가 됐지?

- 말 못 해, 나 죽었어.

 

영화 후반, 페페는 아이를 유산한 클레오를 보면서 그녀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고 말한다. 그런 그녀를 보듬고 그녀의 입을 열게 하는 것은 소피아와 네 아이들이다. 바다에 빠진 소피와 파코를 구하고 클레어와 소피아 그리고 네 명의 아이들이 서로를 끌어안는 장면은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 : 페미니즘의 혁명](1970)에서 언급되는 혈연관계없이 편의로 구성된 가정의 모습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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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전작 <그래비티>의 마지막 장면은 이러하다. 아이를 잃고 삶을 살아갈 이유가 없던 주인공 '라이언 스톤'역의 산드라 블록은 사고로 인해 우주를 홀로 떠돌다 종국에는 삶의 의지를 되찾고 지구로 복귀한다.

 

비상 탈출선을 타고 바다로 추락한 그녀의 모습은 정자가 난자를 뚫고 들어간 것을 의미하고, 바다를 헤엄쳐 나와 육지로 올라오는 장면에서 두 발과 두 손을 짚고 해변가로 올라오던 그녀가 마침내 두 발만으로 땅을 내딛는 모습은, 아이의 탄생 그리고 성장과 흡사하다. 곧 그녀의 재탄생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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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마>에서도 이와 유사한 연출이 등장한다. 영화의 첫 장면, 오프닝 시퀀스에서 클레오는 파도치듯 밀려오는 물바다의 반대편으로 멀어져 갔지만,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그녀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파도를 향해 걸어나간다.


- 나는 과거에 뱃사람이었는데 물에 빠져 죽었어. 파도가 엄청났거든. 번개가 쳤어. 난 수영을 못 했어. 아주 어둡고...


페페가 전생에서의 죽음을 얘기한다. 마치 복선처럼 클레오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거대한 파도-원치 않던 임신과 유산-에 맞서 이겨 두 발로 걸어 나오는 클레오, 이는 죽어있던 삶으로부터의 복귀, 새로운 가족과 인생, 그녀가 재탄생하는 장면이다. 마침내 우리는 그녀의 삶과 새로운 가족을 응원하게 된다.


섹스와 원치 않은 임신, 학생 시위와 대학살, 남편의 외도, 배신, 유산, 여성이라는 존재와 가족의 의미, 사회적 불평등 그리고 흑백이라는 영화의 표현 방식까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관객에게 던지는 목소리는 너무나도 명확하게 내리 꽂히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의 보모이자 어머니였던 ‘리보’에게 전하고자 했던 마음까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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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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