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삶 안팎의 냉장고

글 입력 2021.11.1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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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동을 언어 삼아 말을 걸어오는 것들이 있다. 그 기묘한 경험을 한 건 자취방으로 이사한 첫날 밤이었다. 얼기설기 쌓인 이삿짐들을 밀어둔 나는 피곤을 이기지 못해 일찍 몸을 뉘였다. 그러나 아무리 부양할 건 나 하나뿐이라지만 갑작스레 세대주가 되었다는 사실이 막막해 잠이 오지 않았다. 복잡한 머리를 애써 식히며 몇번이나 뒤척이던 중이었다. 그런 나의 상념에 균열을 가한 것은 심상찮은 진동 소리였다. 처음에는 ‘딱!’하고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이내 몇 번 쿨쩍대는 소리가 튀더니 요란한 진동이 길게 이어졌다. 나는 소리의 근원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다름 아닌 냉장고가 있었다.

 

태어나서 냉장고를 그렇게 강렬하게 인지해본 건 처음이었다. 집이 작아지니 들리는 것이라고는 냉장고 소음뿐이었던 것이다. 소음 때문에 더더욱 잠에 들 수 없었는데도 짜증나긴커녕 어쩐지 신비한 기분이 들었다. 돌아 누운 나는 작게 진동하는 하얗고 각진 몸뚱어리를 응시했다. 그때부터 내 상상력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냉장고 안의 문명을 그린 넷플릭스 시리즈 「아이스에이지」나 박민규 작가의 「카스테라」, 켄 리우의 단편 「상태변화」등 냉장고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떠오르면서, 세상이 온통 냉장고 안과 밖으로 나눠져 있는 것 같다고 감각한 기묘한 순간이었다. 말하자면 소음이 시작되는 곳과 하달되는 곳으로 나눠진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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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시리즈 '아이스 에이지' 스틸컷: 주인공들이 냉장고 속 문명을 발견한 장면

 

 

그렇게 한참 냉장고의 수다에 집중하다 그에 익숙해질 때쯤 잠들었던 것 같다. 다음날, 물을 마시기 위해 연 냉장고는 여느 때처럼 평범했다. 그 안에는 빙하기 문명도(아이스 에이지/ 넷플릭스), 훌리건의 영혼도(카스테라/박민규), 누군가의 생명을 의미하는 작은 얼음 조각(상태변화/ 켄 리우)도 아닌 아침식사가 되길 기다리는 방울토마토 한팩이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진동은 여전했다. 사람이 숨소리를 내듯, 기계도 진동음을 낸다는 것이 왜 그리 세삼스러웠는지 모를 일이다. 그때부터 난 자취가 아닌, 냉장고와 기이한 동거를 시작했다. 짐을 정리하기도 전에 각종 사진을 꺼내 냉장고를 꾸미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이제 그것은 동반자에게 건네는 최소한의 애정 표현이 되었다.

 

 

 

냉장고라는 아고라(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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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는 기본적으로 음식의 신선도를 유지해주는 주방 가전제품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 가정의 냉장고는 그 이상의 역할을 한다. 어떤 가족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 집의 냉장고를 보면면 된다고 감히 주장한다. 상상해보라. 당신은 낯선 집의 냉장고 앞에 섰다. 먼저, 각종 메모가 적힌 커다란 마그넷 보드가 눈에 띈다. 둘째주 수요일부터 주말까지를 가로지르는 선분이 그어져 있고, 그 위에 ‘여름 휴가’라고 쓰여 있다. 셋째주 토요일에는 덧그린 동그라미와 함께 누군가의 생일이 표시되어 있다. ‘이번주 설거지 담당’이라는 글씨 아래에는 몇번을 지웠다 다시 쓴 자국 위로 누군가의 이름이 올라 있다.

 

이제 그 주변으로 시선을 옮겨보자. 바랜 정도가 제각각인 사진들이 색색의 자석에 모서리를 맡기고 있다. 나들이 복장의 가족들이 브이를 빼들고 웃는 사진, 졸업장을 높이 쳐든 학사모 차림의 아이 사진, 누군가의 하얀 결혼 사진 등. 그 옆으로는 소소한 상장, 크레파스가 묻어나오는 아이의 그림, 거칠게 휘갈겨진 식료품 리스트, 여행 기념품으로 사온 듯한 돌하르방 모양의 자석들까지…… 돌이켜보면 서로 얼굴 맞대기 힘들었던 우리 가족의 ‘아고라’ 역할을 했던 것 역시 냉장고였다.

 

그럼 이제 냉장고 문을 열어보자. 어쩌면 그 집의 가장 내밀한 공간이라고 해도 모자람 없을 테다. 특정 식품이 한켠에 잔뜩 쌓여 있다면 냉장고 주인의 유난스러운 입맛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밀폐용기에 들이찬 반찬들이 벽돌담처럼 정갈하게 올라 있다면 손이 야무진 이의 작품이겠거니 생각하며 그의 음식맛이 꽤나 궁금해진다. 철지난 다이어트 식품으로 가득 찬 냉동고를 보면 우스운 동질감까지 느낄 지 모른다. 혹여나 수상한 색의 액체로 채워진 페트병이 죽 꽂혀 있다면 주의하라. 당신이 보리차인가 싶어 집어든 통이 뭘 어떻게 우려낸 육수일지 모르니.

 

이처럼 냉장고는 누군가의 취향, 버릇, 생활 습관까지를 적당히 흡수해 하나의 총체성을 이루는 기계이다. 가전제품 중에서 한 집안을 이토록 적나라한 동시에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TV는 보지 않아도 냉장고를 열어보지 않는 이는 없다는 점은 의식주 중 ‘식(食)’의 욕구를 가장 즉각적으로 충족시키는 냉장고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한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함께 사는 가족 구성원과 통하고 싶은 ‘심(心)’의 욕구 역시 충실히 채워온 것이 바로 냉장고이다. 안은 차갑게 음식을 식히고, 밖은 따듯하게 관계를 데워온 냉장고는 이러한 의미에서 아주 인간친화적인 기계처럼 보인다.

 

 

 

냉장고, 집사가 되다


 

냉장고는 음식의 신선도를 유지한다는 기본적인 역할만으로도 이미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꾼 바 있다. 냉장고의 발명으로 식료품 보관 기간이 증가했고, 이는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함은 물론 괴혈병, 식중독 등 음식 섭취와 관련된 질병 발병률을 현저히 낮췄다. 또한 양질의 영양소 섭취를 가능케 하며 인류 평균 신장과 수명까지 증가시켰다. 냉장고의 효용성이 증명된 공간은 가정뿐만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전쟁 역시 냉장고 기술의 덕을 보았다 평가한다. 효율적인 식량 공급을 통해 노동 및 전쟁의 장기화를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냉장고는 오늘날 다시 한 번 도약해 ‘두뇌’를 가지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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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일명 ‘스마트 냉장고’가 그 유용성을 공고히 하는 세태이다. 특히 이는 앞서 설명한 냉장고의 커뮤니케이션 효과를 발빠르게 인지하고 이를 IoT의 도입으로 극대화한 결과이다. 스마트 냉장고는 내부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식재료 보관 상황을 파악하고, 유통기한이 임박한 식품들 위주로 요리법을 추천해주기까지 한다. 또한 부족한 식재료를 자동으로 주문해주는 것은 물론, 요리하는 이의 충실한 비서 역할도 겸한다. 음식이 익는 데 걸리는 시간에 맞춰 알람을 설정하는 것은 물론 날씨를 안내해 그에 맞는 메뉴를 추천해주는 방식 등으로 말이다. 우리는 냉장고 집사의 탄생과 흐름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가족 소통의 장을 한다는 냉장고의 부가적인 역할을 스마트 패드나 메모의 도입으로 더욱 용이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급격히 상승한 가격을 고려하면 IoT 기술과 냉장고의 접목은 불필요하다 비판하는 목소리도 작지 않다. 그렇기에 스마트 냉장고 상품은 현재까지 큰 시장성을 지니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에게는 아직 레시피가 딱딱하게 나열된 액정보다 직접 써붙인 메모와 추억의 사진들로 어지러운 냉장고 풍경에 마음이 기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냉장고가 지닌 커뮤니케이션 기능은 가정 내에 한정되기 때문에, 단순히 편지에서 메신저 앱으로 발달해온 통신·소통 기술 발전의 수순을 그대로 적용해 도약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기는 어렵다. 스마트 냉장고보다는, 냉장고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제품들이 더욱 시장성을 지닌 이유는 이 때문이다. 예시로, 각 식품 특성에 맞는 온도를 제공하거나 특별한 소재로 식품 위생을 보장하는 등의 신기술을 접목한 제품들이 그러하다.

 

IoT 냉장고의 아쉬운 성과는 산업적인 요인과 관련 있겠지만, 어쩌면 우리는 기계가 지나치게 똑똑해지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냉장고에 들어가야만 했던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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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냉장고의 인간친화적인 측면을 중심으로 논했으나, 냉장고는 그 자체로 아주 비밀스러운 공간이라는 점에서 섬뜩한 얼굴 역시 감추고 있는 듯 하다. 냉장고는 스릴러 장르의 서사 콘텐츠에서 ‘살인자의 공범’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잦다. 정확히 말하자면 살인을 은폐하는 역할로 악용되곤 한다. 잔혹한 살인마들이 범행을 저지른 후 그 사실을 은폐하고 시신의 악취를 방지하기 위해 냉장고에 시체를 보관하는 수법은 숱하게 들어본 바 있을 것이다.이는 픽션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 많은 살인자들의 범죄 은폐 수법이기도 했다.

 

이의 일례로 ‘냉장고 속의 여자(Women in refrigerator)’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이는 1994년 발행된 히어로 만화 「그린랜턴」으로부터 유래했다. 주인공 카일 레이너는 악당 메이저포스에 의해 잔인하게 토막살해 당한 여자친구 알렉스의 시신을 냉장고에서 발견한다. 이를 계기로 카일 레이너의 진정한 힘이 발휘되고, 악당을 물리친 그는 전무후무한 영웅으로 성장한다. 즉, ‘냉장고 속의 여자’는 서사 속에서 남성 캐릭터에 인해 잔인하게 살해되거나 그의 폭력에 신체·정신적 외상을 입는 여성 캐릭터는 물론, 여성이 남성 히로인의 성장 동력으로 단순히 이용되고 마는 서사의 클리셰를 비판하는 말이다.

 

냉장고 중에서도 특히 냉동실은 식품을 그대로 얼려버린다는 점에서 ‘시간의 멈춤’ 이미지 역시 지니고 있다. 더군다나 대상의 고유한 특성인 냄새나 촉감까지 모두 없애버린다. 여성에 대한 서사적 폭력을 ‘냉장고’를 사용해 표현한 것은 이 특성과 관련지어 설명할 수 있다. 즉, 여성을 일시적으로 소비해버리고 마는 하나의 ‘식품’처럼 대하는 서사적 클리셰를 지적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여성 캐릭터의 고유성과 입체성을 모두 ‘얼려버리고’, 냉장고의 주인, 즉 남성의 배와 욕구를 채우는 방식으로 이용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은 앞서 설명한 냉장고의 효율성마저 섬뜩하게 다가오게 한다.

 

냉장고의 비밀스러운 이미지와 현상을 오래 유지한다는 특징이 페미니즘적 개념에 용해되어 사용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지금껏 냉장고에 갇혀버릴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여성들에 대해 생각하면, 냉장고는 앞서 설명한 따뜻한 가정의 아고라로서가 아닌, 안에서는 자의로 열 수도 없는 차갑고 밀폐된 공간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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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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