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가루 분, 먹을 식

글 입력 2021.11.07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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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식 (粉食) : [명사] 밀가루 따위로 만든 음식을 먹음. 또는 그 음식.’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인천으로 무작정 떠났다. 첫 방문은 아니고 4년 전에 한 번 다녀간 적이 있었던 제법 유명한 집이다. 수원에서 2시간이 넘는 쉽지 않은 여정을 달려간 것은 단지 이곳에 다시 가보고 싶다는 이유 하나뿐이었다.

 

도착하자마자 가게 입구의 높은 계단이 여전히 나를 반겼다. 그곳의 계단은 허기를 참으며 달려간 나의 배를 한 번 더 고프게 했다. 만약 ‘분식’이라는 이름을 우습게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가벼움마저도 충분히 채워줄 것이라는 위풍당당함이었다.

 

숨이 가득 찬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다른 한 손으로는 휴대전화 QR 체크인을 한다. 그 짧은 순간도 나의 허기를 더했다. 한쪽 벽면의 메뉴판을 힐끔 쳐다보곤 서둘러 자리를 잡았다. “특돈가스에 소스 따로요!” 돈가스 애호가인 나는 평소 습관대로 툭 내뱉고 나서야 이내 편안함을 찾은 듯했다.


주문하고 나니 문득 예전 생각이 났다. “아뿔싸! 여기는 양이 엄청나지.” 아니나 다를까 오랜만에 온 티를 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마지막으로 왔던 때는 내가 식단관리를 하기 전이었고, 그 당시에는 쫄면을 주문했었다. 처음에는 눈앞에 보이는 엄청난 양에 한번 놀라고 마지막에는 절반도 먹지 못하고 남겼던 것이 떠올랐다. 짧은 기억을 떠올리고 나니 5분도 안 되는 새에 돈가스 4장이 나왔다. 이제는 이미 그때 기억이 대부분 떠올랐다는 듯 직원의 빠른 서빙 속도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3년 동안 외식 메뉴로 돈가스를 먹다 보니 4장을 연이어 써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오히려 손끝에 느껴지는 바삭함은 더욱 내 손을 신나서 춤추게 했다. 돈가스를 썰어 놓고 한 입 넣으니 인제야 여유가 생겼다. 쉴 새 없는 젓가락질로 음식을 넣는 사람들의 표정과 몸짓들, 내가 앉은 자리의 주변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의 신속한 칼질과는 다르게 지금부터는 전보다 더 천천히 돈가스를 즐기겠다는 마음을 불끈 먹었다.


돈가스를 먹는 것에 오롯이 집중하려던 찰나, 내 맞은편에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여자아이와 아버지가 보였다. 그 아이는 분홍색 티셔츠를 입고 머리를 하나로 묶어낸 분홍색 머리 끈을 하고 있었다. “아빠, 나 이거 썰기 힘들어.”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대는 표정을 보는 순간, 나는 조금은 더 먼 옛날로 돌아 가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름 돈가스 애호가의 엄격한 철칙으로써 나는 내 앞에 놓인 돈가스가 식어 가는 것만큼은 절대로 용납할 수가 없다. 그러한 이유로 그 조각들을 차례로 내 입 속에 넣으면서도 속으로는 동시에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분홍색이 무척 잘 어울리는 아이야. 네가 나중에 자라서 어른이 되면 지금의 이 언니처럼 아빠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돈가스를 능숙하게 썰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우연히 그것을 먹으려는 도중에 같은 메뉴를 먹고 있는 또 다른 아이와 부모님을 보게 되면 잠시 멈칫하겠지. 분명 나처럼 어린 시절 아빠에게 투덜대던 너를 다시 떠올리게 될 거야. 참 많이 닮았겠지. 그래도 그 기억 때문에 네 앞에 놓인 돈가스가 식어가는 것을 놓치지 말려무나. 왜냐면 그사이 식어버린 돈가스를 먹어야 하는 어른이 된 지금의 너가 더 슬플 수도 있을 테니까. 그저 지금 느끼고 있는 손끝 바삭함에 더욱 집중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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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만에 먹은 돈가스는 분식의 그 뜻처럼 더는 내게 가벼운 식사가 아니었다. 지금도 변함없이 푸짐한 양은 긴 시간 굶주림에 지친 배를 채우고도 남았다. 그리고 나에겐 잠시 스쳐 지나간 흔적이었으나 아버지와 함께 돈가스를 먹던 아이의 진한 분홍빛은 나의 마음을 오랜 시간 따뜻하게 채워주었다.


오늘 분식집에서의 나, 그 속에서 또다시 나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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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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