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욕망을 타고 극락에 도착한 여자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글 입력 2021.11.01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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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_욕망이라는이름의전차_최종포스터.jpg

 

 

처절하게 외롭고 가슴 아픈 극이다. 지금 이 시간, 어느 장소에서 블랑쉬와 같은 욕망으로 인해 발생된 고통을 느끼고 있을 여성에게 바치는 리뷰가 되겠다.

 

귀족의 혈통을 갖고 태어난 블랑쉬는 첫사랑 앨런과의 만남을 여전히 잊지 못한 채 그 기억을 잡고 살아간다. 그러나 순수한 시절을 가득히 채워줬던 가문과 사랑은 블랑쉬에게 텅 비고 짙은 상처만 두고 사라진다.

 

그 고통을 감내할 정신의 내공이 아직도 쌓여있지 않은 블랑쉬는 그렇게 고향을 떠나게 된다. 장소의 고향은 떠났지만 혈육이 이어진 또 다른 고향, 여동생 스텔라가 있는 집으로 들어가 함께 살게 된다. 스텔라는 폴란드 계통의 가부장적이고 힘으로 제압하려는 스탠리를 남편으로 두고 있으며, 스탠리 옆에는 미치라고 불리는 친구도 함께 있다.

 

미치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주기엔 다른 역할에 비해 비중은 작지만, 과거에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던 성에 대한 고집스러운 사상에 비웃음을 쳐 주고 싶은 역할로 나와 욕망의 무서움을 한층 더 높여주기에 마땅했다.

 

 

[욕망이라는이름의전차]_공연사진1.jpg

 

 

그런 사람이 꼭 있다. 아무것도 몰랐을 시절. 그러니까 세상 물정을 몰라 계산하는 법을 몰랐던 순수한 시절에 갇혀 사는 사람.

 

그때 사랑이라는 짧은 경험을 한 사람은 더 깊게 도취되어 있다. 현실에서는 직접적으로 보지 못했지만, 영화나 소설 그리고 공연을 접하면서 항상 느끼는 지점은 그 감정에 포커스를 맞춰 서사에 힘을 싣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왜일까. 인간에게 사랑은 중독성이며 의무이자 보고 느끼는 자극성을 주기에 적당하기 때문일까. 또 하나의 비슷한 공통점은 비교적 어린 나이에 했던 사랑을 잊지 못한다. 여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 블랑쉬처럼 자신에게 직접 구멍을 파내고 파내 그 안에 벗어나지 못할 관을 하나 만들게 된다.

 

다시 공연의 자세한 내막을 살펴봐야겠다. 블랑쉬와 그녀의 여동생 스텔라, 그리고 스텔라의 남편 스탠리는 작고 그리 밝지 않은 집에 함께 살며 계속 부딪힌다. 스탠리는 스텔라가 여전히 과거 귀족 생활에 벗어나지 못해 치장을 하고 우아하게 사려고 발악하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이는 스탠리의 자격지심에서 비롯한 찌질하고 속 좁은 경계태세를 보여준다. 그는 폴란드계의 노동자로서 인종차별을 받으며 살아왔으며 미국인으로 인정받길 욕망하고 있었다. 이 욕망은 가정생활에 영향을 주며 선을 넘게 된다. 아내 스텔라에게 폭력을 범하며 집안 내에 왕이 되어야 직성이 풀리고 힘을 적재적소한 환경에 사용하지 못하는 나약하고 쓰잘머리 없는 욕망으로 분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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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남편의 행동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주는 스텔라에게 언니 블랑쉬는 계속 언질을 넣어준다. 언니로서 동생에게 하고 있는 제대로 된 역할이 자신의 가정을 깰까 봐 두려운 스탠리는 블랑쉬가 밝히고 싶지 않은 과거를 퍼뜨리기 시작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미치는 그녀에게 순결하지 못하다는 공격적인 핍박을 준다. 그러니깐 미치는 아내로 맞이할 여성에 대한 완성도를 성적인 관념에 욕망을 맞추어 상대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존재로 부각된다.

 

또 스탠리와 미치와 얽힌 블랑쉬에게는 ‘어떤 욕망’이 욕망이라는 전철을 타고 극락에서 멈춰 관객들로 하여금 “그 욕망을 벗어내주고 싶다”라고 생각하게끔 만든 그녀의 인생을 되짚어 봐야 할 필요가 있다.

 

블랑쉬는 안정적인 사랑을 평생 바라는 도취에 빠져야 세상을 깨끗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자로 살 수 있는 여자였다. 그러나 관계에서 간절히 원하면 뜻대로 만들어주지 않듯 블랑쉬는 사랑의 처참한 아픔을 경험했다.

 

그런 그녀에겐 QOL(Quality of Life)로 불리는 여러 비율을 만들어냈어야 했다. 사랑은 다른 관계에서 충족되지 않은 감정을 선물해 주지만, 사랑이 부서지고 재만 남을 때 다른 요소가 내 삶을 지탱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블랑쉬는 언제나 첫사랑과 주고받은 사랑 같은 욕망을 채워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인데, 앨런이 떠나가고 나서 그 욕망을 깊고 대놓고 그려내기에는 나약해진 사람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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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더 큰 나를 만들어내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능력 중 하나다. 그러나 욕망이 주체가 아닌 객체의 대상으로서 작동될 때는 건전하거나 건강한 욕망에서 멀어져만 간다. 나약하게 만들어주는 지름길이 될 수 있으며, 더 심할 때는 자신을 갉아먹는 자해의 길로 빠져들 수 있다.

 

욕망을 넘어 누가 와도 채워지지 않을 갈망 때문에 여전히 블랑쉬는 짧은 친절로 그녀를 유혹하는 남자의 손길을 여럿 거친다. 상대가 누구든 언제나 낯선 사람의 친절에 의지하다가 그가 떠나가면 또 다른 그들이 찾아오는 친절에 잠시 안정된다.

 

인간은 싫다고 해도 관계의 망 안에서 허우적 되며 살아간다. 어떤 사람을 만날 땐, 처음 받은 에너지로 다른 시간들을 지탱하게 도와주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내게 악영향이 담긴 상처만을 남겨두고 아무렇지 않게 안녕을 고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경험이 많아질수록 나이가 올라갈수록, 사람이 어렵다고 말하는 이유다. 표면과 표면만 있는 관계라면 얼마나 좋을까도 생각해 보지만 그러면 욕망이 탄생되질 않는다. 아무런 자극이 없으니깐.

 

또 그렇지만 이 자극을 순수함이 발목을 잡아 블랑쉬처럼 욕망에 대한 갈피를 못 잡아선 안 된다. 욕망을 담되 욕망 안에선 똑똑하게 주체가 되며 객체가 되는 순간을 당당하게 꺼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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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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