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욕망의 지배구조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글 입력 2021.10.31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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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관심이 많은 작품이었다. 해당 희곡을 각색한 영화 ‘블루 재스민’을 매우 좋아하기도 하고, 대학교 1학년 때 학과 행사인 원어연극에 연기자로 참여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스탠리를 연기하기도 했다. 대학생들이 자치적으로 준비하는 연극인 만큼 예산이나 시간의 한계로 인해 아쉬운 점들이 있었기에, 이번에 전문가들은 같은 극을 어떻게 무대에 올렸을까 궁금해 관람하게 되었다.

 

 

[욕망이라는이름의전차]_공연사진6.jpg

 

 

블랑쉬는 몰락한 남부 명문가의 딸로 모종의 이유로 어느 날 오랫동안 왕래하지 않은 여동생 스텔라의 집을 방문하게 된다. 스텔라는 폴란드 혈통의 육체 노동자인 남편 스탠리와 2층짜리 집의 아래층에 세 들어 살고 있으며, 현재 임신한 상태다. 스텔라는 언니에 대한 막연한 반가움으로, 스탠리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가지들로 치장한 낯선 여인에 대한 떨떠름한 경계심으로 블랑쉬를 맞이한다.

 

처음에는 조금 삐거덕 거렸으나 그녀는 어쨌든 이곳 뉴올리언스에 정착하게 되고 스탠리의 친구 미치와 데이트도 하게 된다. 블랑쉬는 앞뒤가 맞지 않는 언행과 본인에 대한 지나친 상류층적 자의식으로 스탠리와 갈등을 맺게 되는데, 이후 평소에 블랑쉬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던 스탠리가 지인으로부터 건너 듣게 된 블랑쉬의 과거를 폭로해버리므로 그녀는 미치로부터 바람맞고 큰 정신적 충격을 받는 것도 모자라 스탠리 로부터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된다.

 

극 중 등장인물들은 모두 어떤 의미로나 주류에서 벗어난 이들로, 그들 각자의 계급의식, 인종의식, 성의식과 함께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욕망들 사이에는 명확한 지배구조가 존재한다.

 

무대구성과 동선을 포함한 전반적인 세팅을 눈여겨 보게 되었는데,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앙상한 뼈대처럼 보이는 길다란 각목들로 만든 가구들이었다. 침대틀과 찬장, 창틀, 의자 다리 등에서 미완성의 느낌을 받았고, 극이 진행되며 블랑쉬는 이 앙상한 가지들에 하얀색 천들-테이블보, 커튼, 휘장-을 덧씌운다. 그녀는 또한 무대 중앙에 위치한 전등에 종이 등을 씌워 방의 밝기를 낮추고 데이트 상대 미치와도 오로지 어두운 밤에 만난다.

 

자신의 얼굴과 과거를 포함해 많은 것들을 감추거나 왜곡하는 것이 극 전반에 드러나는 그녀의 행동 패턴이다. 실제로 거짓말을 제외하고 그녀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이곳에 오기전에 겪은 일에 대한 진실은 단 한번도 그녀의 입을 통해 나오지 않고 주변인들을 통해 발설된다(관점에 따라서는 그 소문들 역시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녀가 왜 허언을 일삼고 환상에 집착하게 되었는 지가 이 극의 핵심일 것이다.

 

 

[욕망이라는이름의전차]_공연사진8.jpg

 

 

스텔라는 삶에 고통이 필요하다고, 그것이 인생에 깊이를 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진 여자다. 그러나 삶의 고통과 남성의 폭력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녀는 스탠리에게 손찌검을 당할 때마다 3장처럼 떠나 버리고 싶다며 비명을 지르지만, 매번 스탠리 특유의 스텔라를 무장해제 시키는 성적 접근으로 인해 그를 떠나지 못한다. (1장의 초반부 스탠리가 등장하며 스텔라에게 건넨 고깃덩이는 두 사람의 육체적 관계와 성적인 접촉으로 인해 무마되는 폭력을 포함한 관계 전반의 성격을 드러낸다.) 스탠리의 성적 긴장감은 그가 블랑쉬와 처음으로 대면하는 1장 마지막 부분에서도 드러난다. 성적 긴장감은 블랑쉬의 삶 전반에 존재해 왔던 남성주체들의 시선과 무관하지 않다.

 

조금씩 땅을 팔아 서서히 몰락한 명문가 집안의 딸인 그녀는 계급이 강등되고 남편이 자살해버리자 전근대적 문화의 남부 여자로서 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몇 없었다. 그녀가 택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가는 것과 끝없는 사랑의 갈구/타인에 대한 의지밖에 없었고, 그녀가 좇을 수 있었던 유일한 환상이 사랑이었다는 사실은 인형의 집을 잃어버린 인형 같은 그녀의 객체로서의 처지를 보여준다.

 

‘당신이 누구든, 난 언제나 낯선 사람의 친절에 의지해 왔어요.’

 

낯선 사람의 친절은 가짜 친절, 애초에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임에도 그녀가 다시 기댈 수 밖에 없는 블랑쉬에 대한 남성들의 욕망 어린 시선과 맞닿아 있다. 남성 주체들이 가진 그 욕망과 폭력 어린 시선은 미치가 순간적인 충동으로 그녀에게 잠자리를 요구하면서 동시에 당신 같이 순결하지 못한 여자는 우리 어머니에게 보여줄 수 없다며 결혼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하는 장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는 여자는 성녀 아니면 창녀라는 여성에 대한 이분법적 인식이다. 누군가에게 기댈 수 밖에 없는 극중 블랑쉬는 욕망의 주체 이전에 욕망의 객체인 것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블랑쉬’의’ 욕망은, 블랑쉬'를 향한' 욕망의 하위에 있다. 욕망의 지배구조를 따져보았을 때 블랑쉬의 파멸의 근본적 원인은 그녀 자신의 욕망이 아닌 타인들의 욕망과 시선에 있기 때문이다. 블랑쉬 파멸의 원인이 그녀 자신에게 있다는 식으로 극을 받아들이는 것은 오독에 가깝다.

 


[욕망이라는이름의전차]_공연사진2.jpg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엔딩 부근에 원작에 없던 블랑쉬의 춤을 추가한 점이나 반복적인 슬픈 뉘앙스의 음악 사용이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다가온 점이다. 나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등장인물들에 대한 감정 이입을 유도하는 뜨거운 비극보다도 남부 저택 ‘(벨 리브)아름다운 꿈’의 매도로 대변되는 남부 귀족의 몰락, 전차와 육체 노동자들로 대변되는 산업화, 블랑쉬를 둘러싼 폭력적인 시선과 헛소문 또는 스탠리에 대한 스텔라의 순응 등으로 대변되는 남성의 여성에 대한 억압 등 당시 미국의 다양한 문제들을 총망라 하는 차가운 사회극으로 구현되기를 바랬다. 과거의 사랑(그것이 진짜 사랑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에 대한 환상적 묘사 대신 조금 더 담백하고 날렵한 극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이는 연출진의 새로운 해석이라 본다.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규모의 무대와 연기자들의 호연 덕분에 좋은 쇼 한 편을 본 느낌이다.

 

 

[노상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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