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2021 서울국제작가축제: 시의 온도 [문학]

"시(詩)는 정신병이 빚어낸 아름다운 열매야."
글 입력 2021.10.24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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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WF

 

 

지난 10월 16일, 서울국제작가축제에서는 국내외 시인들을 초빙해 '시의 온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콘텐츠를 공개했다. 한국 시인 유계영과 안희연, 영국 시인 션 휴잇, 모로코 시인 림 바탈이 해당 회차에 참여했다. '시의 온도'라는 제목에서 이미 반 쯤은 마우스를 움직인 상태였는데, 지난 회차 '바디 시그널'에서 탁월한 진행 능력을 보여주었던 허희 씨가 사회자로 다시 출연한 것을 본 뒤에는 망설임 없이 링크를 클릭했다.

 

 

 

시(詩)가 부끄러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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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WF

 

 

이 강연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만한 지점은 시인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시를 부끄러워한다는 점이다. 유계영은 자신의 첫 시집 <<온갖 것들의 낮>>에 대하여 "펼쳐보는 것조차 힘들었다"며 "이제야 겨우 읽게 된 시집"이라고 평했다. 또한 션 휴잇은 자신이 쓴 시를 사람들이 읽을 때 민망함을 느낀다고 고백했으며, 지금도 작품을 쓸 때 독자들을 잊으려고 노력한다고 털어놓았다.

 

흥미로운 것은 보통의 인간이라면 똑같이 반응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당신이 '시를 쓴다'고 생각해 보라. 누군가에게 그것을 자랑스럽게 내어 놓을 수 있을 것인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면 질문을 이렇게 바꾸겠다. 당신을 모르는 사람에게 "글 쓰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가, "시 쓰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가?

 

'시를 씁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부끄럽게 다가오는 이유는, 시가 맥락이 없는 순간언어이기 때문이다. 소설이 기승전결을 갖춘 한 편의 영상이라면 시는 무작위로 일시 정지 버튼을 눌러 캡처한 1초의 화면과 같다. 그리고 영상 속 한 장면을 순간적으로 캡처했을 때, 보통의 경우 피사체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포착된다. 말끔히 정제된 모습으로 포착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자신이 쓴 시를 남에게 들키거나 보여주었을 때 민망함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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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WF

 

 

보통의 시에는 앞뒤 상황 설명이 필연적으로 생략되어 있다. 다시 말해 언어의 가장 중요한 축 중 하나인 시간의 흐름이 없다. 화자가 왜 이러한 표현을 선택했는지 혹은 화자가 왜 이러한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인지 시는 설명할 수 없다. 시간이라는 축이 존재하지 않는 시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3차원의 인간이 2차원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 동일하다. 그곳에는 화자의 언어를 감싸줄만한 그 어떤 설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자신의 시를 현실에서 마주 본 사람들은 항상 어색한, 그리고 벌거벗은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안희연은 시를 쓰는 이유에 대한 질문에 "시인이란 피부가 없는 사람"이라는 명언을 남긴다. 그녀는 좋은 시는 여러 갑옷을 두른 목소리가 아니라 피부조차 없는 듯한 날것의 목소리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동일한 질문에 대하여 션 휴잇은 "쓸모로 가득한 이 세상에 쓸모와 무관한 것을 만들기 위해 시를 쓴다"고 덧붙였다. 쓸모, 즉 '~를 위해 ~가 생겨남'이라는 인과관계로 짜여진 3차원의 현실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무쓸모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시(詩)의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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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WF

 

 

또한 애초에 모든 창작 작품에는 예술가의 의도에 반(反)하는 잉여물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가령 예술가 본인은 인물과 사건과 줄거리를 정말로 정교하게 설정해두었다고 생각했는데, 발표 후에 예상한 것과 다른 방향으로 작품이 해석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일제시대 문학평론가 임화는 이에 대하여 <작가와 문학과 잉여의 세계>에서 의도와 작품 간에는 낙차(차이)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작품에서 작가의 의도를 빼도 0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가의 지성과 감성의 차이가

잉여물이 생기는 계기라고 할 수 있으며,

작가의 지성이 채 지배해버리지 못한

'감성계의 여백'이 곧

잉여물이 들어앉는 영역이다.

 

임화는 그 잉여물은 창작자의 지성(이성)과 감성 사이의 괴리에서 기인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내가 '머릿속'으로 의도한 나의 작품과 '내 손으로' 만들어 낸 나의 작품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우리가 우리의 시들을 보면서 그토록 어색해하고 부끄러워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적어도 예술 창작에 있어서 감성은 지성을 누르지 못한다. 지성과 감성의 무의식적 합작으로 빚어진 시들은, 현실 속 이성적인 자아가 부끄러워하지 않기엔 너무 많은 비이성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시의 온도는 항상 뜨겁다. '시'는 우리의 내면에 맞닿아 있는 것으로서, 인간의 표현 중 가장 날것에 가까운 무언가다. 그것은 현실 세계 속 논리대로 제어될 수 없다. 안희연 시인이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애초에 내가 내 손으로 만들어낸 작품마저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에, 시를 쓰는 행위 자체가 아이러니하게도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하기 위한 행위인 것이다.

 

 
"시(詩)는 정신병이 빚어낸 아름다운 열매야."
 

 

몇 주 전, 독립 문집을 내기 위해 과외 두어 개를 더 시작했다던 내 친구가 말한 문장이다. 그 말을 하던 순간에도 그는 무척이나 행복한 표정이었다. 정확한 표현을 복기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말은 내가 근래 들었던 말 중 가장 인상적인 문장이 되었다. 표현 방식은 조금 충격적일지 모르겠으나 나 역시 이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기 때문이었다. 가장 불안정하고 뜨거운 상태에 놓여 있을 때, 우리의 언어는 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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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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