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극복하는 게 아니라 통과하는 일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글 입력 2021.10.22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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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하지 않은 중년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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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망했다. 완전히 망했네.” 달동네로 이사를 와 숨을 고른 주인공의 첫 마디다. 영화감독의 죽음으로 돌연 직장을 잃게 된 상황에서 완전히 망해버렸다고 말하는 주인공 찬실(강말금). ‘실직한 중년 여자’의 설정이라면 주인공은 앞으로도 안쓰럽고 불의한 상황에 놓일 것이고(놓여야 하며) 그럼에도 소매를 걷고 강인하고 악착스럽게 이겨낼 것이다(이겨내야 한다). 이러한 전개는 한국 드라마에서 오랫동안 목격해왔던 전형적이고 보편적인 서사로 보인다. “언니. 이런 산 공기를 쐬고도 다시 못 일어나면 언니는 사람도 아니야.” 창밖을 바라보는 절친한 후배 소피(윤승아)와 찬실. 중년 여자 찬실은 어떻게 역경을 이겨낼 것인가.


그러나 앞서 걸어가는 찬실은 낮은 계단에서부터 발을 헛딛는다. 어떤 사건과 악역 없이도 혼자 덤벙 넘어지는 그녀에게 나는 으레 팔짱을 풀고 걱정스레 지켜본다. 다행히도 그녀의 이름은 빛날 찬(燦)에 열매 실(實), 찬실(燦實)이가 아닌가. 당장에 돈이 너무 없다고 한탄하면서도 “내가 돈 빌려줄까?” 소피의 말에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아니. 일해서 벌어야 된다.” 이 대목에서 알 수 있듯 찬실은 물러터진 열매가 아니다.

 

그렇게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소피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을 하게 된다. 소피의 집에 찾아온 불어 선생님 김영(배유람)에게 다리를 긁으며 자신을 새로 온 가사도우미라고 소개하는 찬실에게는 어째선지 창피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자긴 영화PD 였는데 망했다며 처음 본 이에게 자신의 실패를 별스럽지 않게 말하는 그녀의 캐릭터가 돋보인다. 이제 이야기의 행로는 상투적인 서사가 아닌 고무장갑을 끼고 앞머리를 머리핀으로 올린 찬실이가 결정하게 될 것이다.

 

 

 

울고 웃는 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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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을 만나고 온 그날 밤, 찬실은 김영의 꿈을 꾸게 된다. “영이 씨. 저 한번만 꼭 안아줄 수 있어요? 나 10년 만에 남자 처음 안아 봐요. 더 세게 안아주세요. 더 꼬-옥.” 김영과 포옹하는 엉뚱한 꿈에서 깨어난 찬실은 물 한컵을 들이킨다. ‘미칬나? 점점 미치 가는 기가!?’ 그녀에게는 어떤 상황도 유러머스하게 만드는 ‘귀염성’이 있다.

 

그러나 찬실은 오랜만에 만난 영화제작사 대표에게 자신의 역할을 무시당하자 처음으로 화를 내기도 한다.

“그동안 영화 열심히 만든 거 내가 너무 잘 알지. 그래도 현실이라는 게 있는 거니까. 내 말 너무 섭섭하게 듣지 마.” 

“현실이 뭔데요? 콕 집어 주세요. 대표님은 제가 어떻게 일했는지 못 보셨잖아요.” 

‘나아-쁜 년. 영화가 뭔지도 모르면서….’


착잡한 마음으로 마당에서 빨래를 하고있는 찬실에게 장국영(김영민)이 나타난다. 영화 <아비정전>의 하얀 민소매를 입고 맘보춤을 추던 장국영의 ‘복장’만 같은 수상한 남자는 자신이 장국영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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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귀신이세요?” 귀신 장국영을 만나게 된 찬실은 내가 이제 돌아버렸구나 울먹이지만 금세 보이지 않는 것도 보인다는 귀신 장국영을 찾아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게 된다.


“제가 다시 영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 그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뭐가 문제예요?”

“자기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게 문제죠. 어떨 땐 확 남자라도 만나 정신을 좀 딴 데 팔아 보고도 싶고 그렇죠?”

“족집게네. 진짜 나 자신에 대해서 깊이깊이 생각 좀 해봐야겠어요.” 


이제 정신 차리고 영화 일에 집중을 해야 하는데 찬실에게는 자꾸 김영이 떠오른다. 장국영을 다시 마주친 찬실은 김영과 잘 지내게 된다는 그의 말에 “그렇죠? 진짜 잘 지내죠?” 하고 들뜬 채 도시락을 싸들고 김영에게 찾아간다. 하지만 좋은 누나라고 생각한다는 김영의 대답을 듣고 그녀는 실망한 채 뛰어간다. 뛰어가면서 도시락도 놓쳐버리고 버스에서 서럽게 우는 찬실이를 보고 있으니 내 마음도 처연해진다.


집에 돌아와서 만난 장국영은 찬실의 어깨를 잡으며 말해준다. 

“외로운 건 그냥 외로운 거예요. 사랑이 아니에요. 찬실 씨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야 행복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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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실은 진심을 다해 시나리오를 쓰고 설레는 남자에게 계산 없이 직진하고 영화 취향이 다른 그에게 실망하여 도시락을 함께 먹으며 웃고 또 마음을 거절당한 그녀의 울음은 한입 먹은 아이스크림을 떨친 아이처럼 서럽다. 찬실은 가사도우미 일을 쉬면서 어김없이 언덕을 오르고 산책을 한다. 주인집 할머니의 시를 읽으며 소리 내어 엉엉 울기도 하고 집에 있는 책들을 정리하게 된다.

 

주인집 할머니와 밥 한그릇을 비워낸 찬실은 이렇게 얘기한다.

“저 안 놀아요! 바빠요. 이제 할 거 많아요.”

 

 

 

충분히 슬퍼하다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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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강인한 인물이 역경을 이겨낸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렇다면 찬실은 어떻게 슬픔을 이겨냈다고 말할 수 있나. 오히려 그녀는 슬픔에 굴복하는 것과 가까워보인다. 애초에 ‘슬픔을 이겨낸다’는 말이 상응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어떨까. ‘빛의 속도’처럼  슬픔과 나의 시간이 동일한 속도로 흘러가는 것이라면 슬퍼하는 자의 몫은 그저 그 시간을 함께 통과하는 일 뿐일 것이다.

 

찬실은 아버지에게 이런 편지내용을 받았다. 

‘빨리 떨쳐버려라. 너무 슬퍼하지 말고 용기내서 다시 일어나라.’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버지의 위로편지도 장국영의 예언도 필요하지 않다. 슬픔을 어서 극복해야 하는 찬실이들에게 이 영화를 권한다. 낯선 설렘에 기대보고 왜 그랬을꼬 후회도 해보고 풍선 바람 빠지듯이 기대감도 잃어보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비참히 엉엉 울어보고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방문을 닫고 고독의 밤을 보내보라고. 그리고 나서 묵혀둔 책을 단단히 묶어 내다 버려보자. 그러다보면 어느새 찬실이처럼 어느 시점으로 넘어와 있을지도 모른다.

 

*겨울은 춥고 비참하고 공허하며 어서 사라져야 할 계절이다. 그러나 조급해한들, 겨울은 겨울의 시간을 다 채우고서야 한동안 떠날 것이다. 고통이 그런 것처럼.

 

한정원 <시와 산책>에 나온 구절처럼, 겨울은 겨울의 시간을 다 채우고 나서야 떠난다. 겨울에는 겨울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슬픔은, 극복하는 게 아니라 통과하는 일이다.


* 한정원, <시와 산책>, 《시간의 흐름》, 2020

 

 

[박수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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