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0번째 이야기, 그리고 첫 번째 이야기. '엑스가 두번이면'

글 입력 2021.10.12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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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번째 이야기.

'0에서 시작하는 이야기'에 대해 (기획의도)



최근 지방에서 꿈을 위해 상경했습니다. 자연스레 취업준비생들을 포함한 20대 또래 중후반 청춘들의 이야기에 유독 더 자주 눈길이 가곤 합니다. 영화던, 책이던, 드라마던 무엇이 되었던 간에 20대 중후반 불안정한 우리네들의 이야기에요.


상경 후 여러가지 현실의 이유로 고립되어 살아간다는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성장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이 일련의 과정들이 알을 깨고 나오는 성장의 의식인지, 아니면 되려 알 속에 갇혀버리게 되는 퇴보의 불행한 시작점인지 불안하기만한 제 감정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에세이보다는 가상의 인물들과 이야기를 통해서 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때로는 제 자신의 어떤 부분이 이야기 속에 직접적으로 녹아들 수도 있을 것이고, 스쳐지나가는 인연들과의 조각을 다시 짜맞추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해요.


제 이름의 자음은 모두 '이응', 그러니까 모두 동그라미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숫자 0에 좀 더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0이라는 숫자의 발음까지도 좋아합니다. 이렇게 아주 개인적인 취향을 토대로 0에게 아무것도 없는 수이기에 뭐든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의미를 부여하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 개인적으로는, 0이란 제게 나름 낭만적인 숫자입니다.


결론적으로는 소박한 욕심과 개인적인 취향에서 '0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0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는 매번 새로운 단편 소설들로 꾸려질 예정입니다. 첫번째 이야기, 두번째 이야기, 0에서 시작해 그렇게 차근차근 한편씩 연재하고자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고립되어 가는 과정이 독립하여 성장해 나가는 과정의 일부분인지, 아니면 그저 착각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운 청춘들의 감정을 가장 먼저 여러 이야기들로 시작할 예정입니다. 앞으로도 혼란스러운 시기를 지나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여러가지 방면으로 다뤄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청춘의 이야기로 시작한다고 해서 20대들의 이야기에만 한계를 짓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죽을때까지 청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청춘이라는 주제 속에서 다양한 나이대, 성별, 성장 배경을 지닌 인물들의 이야기를 고민해 나갈 예정입니다. 나아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소한 일상의 편린들을 여러가지 방식으로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마냥 어둡고 우울한 얘기도, 발랄하기만 한 얘기도 아닌 현실에 근접한, 그 자체의 뜨뜻미지근한 이야기를 담아 내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시작은 제가 직접 경험한 이야기에 살을 덧붙이고 발전시켜 쓴 이야기들로 구성 될 듯 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답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운 삶의 시기를 지나쳐가는 와중에도, 소소하게 웃을 일은 분명 있다는 사실을 녹여내고도 싶었습니다. 삶에는 혼란스러움과 행복한 순간, 지치는 순간 등등 그 모든 것은 늘 병렬식으로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끔은, 연재하는 소설과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도 종종 추천드리고자 해요. 편하게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

엑스가 두 번이면

ㄴ함께 들으면 좋을 곡. '큰새' by 다린


 

“근데, 있잖아. 그래도. 뭔가 모든 게 잘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시원한 가을 바람을 맞으며 밝게 외치는 곤의 모습 너머 불그스름한 노을이 점점 더 얇게 퍼져 나갔다. 겨울은 그런 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완연한 가을 바람을 느꼈다.

  

--

 

'노을이 지는 시간이었을까, 거의 어둠이 깔리던 시간대였을 거다. 아무튼 청량한 가을밤이 온전히 느껴지는 날이었다. 그런 날, 곤에게 뭐든 잘 될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 때의 황홀감.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이후부터 무언의 무력감에 사로잡힐 것만 같은 때가 오면, 나는 그때 그 순간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 잘 될거야.

... ...

우리는 고립되어가는 걸까, 세상 밖으로 나아가고 있는 걸까. 아마도 성장하고 있는 거겠지.’

 

--

 

먼 곳을 응시하던 겨울은 이내 시선을 거두고 다시 일기장에 무언가 이어서 써내려간다.

 

별안간 철문이 우렁차게 닫혔다. 쿵쿵쿵. 우렁찬 발소리가 들려온다. ‘이제서야 퇴근했구먼.’ 겨울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이제는 익숙한 발걸음, 아니 발망치 소리다. 그녀의 룸메이트 김곤은 늘 그랬듯 씩씩대며 현관문을 열어제꼈다.

 

“이따위로 산다면 내 생의 끝은 과로사일 것임이 분명하다.”

 

며칠 전 청량하다 못해 청춘이 넘쳐흐르는 듯한 대사를 외쳤던 곤. 그때 그 모습은 한 줌도 남기지 않은 채, 그녀는 비장하게 앓는 소리를 해대며 신발장 앞 맨바닥에 드러누웠다. 겨울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곤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창업을 시작했던 그녀였기에 딱히 해줄 말이 없기도 했다. 그런 곤을 보며 회사라는 무언의 바운더리에는 더더욱 손도 뻗지 않을테다 다시금 다짐하는 겨울이었다.

 

“그냥 거나하게 취해서 이세상을 잊고 싶다 제발…. 맞다. 너 오징어게임 봤냐? 오늘 불금인 김에 맥주 한 캔도 까고, 오징어게임 정주행 콜?”

 

곤은 얼마 전 외국계 주류회사의 영업부 소속 인턴이 되었다. 대학시절 내내 ‘경영대 알쓰 1대장’으로 불리우던 곤은 이제 술을 입에 달고 산다. 딱 3개월만 채우면 끝이라는 말과 함께. 조만간 자신은 꼭 전환될거라는 뒷말을 주문 외듯 읊조리며. 그러고보니 전환평가가 곧이었던가. 초여름에 입사했으니, 아마 그런 듯 했다.

 

아무튼 곤과 겨울은 -나름대로 분위기를 내고자 차린- 맥주 여러 캔과 건어물들을 접이식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채 드라마를 감상했다. 피가 난무하는 장면 속 빠르게 교차되어 지나가는 검은 화면 위로 겨울과 곤의 일관된 무표정이 겹쳐보인다. 창업 후 웬만한 우여곡절은 다 겪어봤던, 아니 여전히 겪는 중인 겨울의 눈에는 피칠갑한 사람들보다 황갈색 설탕 덩어리들이 보다 선명히 들어온다.

 

“저거, 저 달고나 요즘 얼마하려나. 나 망하면 레트로 갬.성. 달고나 포장마차 요런거 하나 해볼까.”

“어, 나랑 동업하면 내가 영업도 뛰어주고 마케팅도 해드릴게.”

“어. 그래. 그러시던가.”

 

그렇게 몇 번씩 오가는, 실없는 장난과 심드렁한 대꾸 사이에서 둘은 알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며칠 뒤 거래처에서 떼 온 물건을 한 짐 둘러매고 돌아오던 겨울은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익숙한 차림새의 곤이 벌건 대낮 길거리 위, 자신의 눈앞에 있었으니까. 회사에 있을 곤이 정장차림으로 골목 끝 뽑기 포장마차에 쭈그리고 앉아 설탕을 휘젓고 있었다. 야, 너 여기서 뭐해. 외치려던 겨울은 왜인지 아는 체 할 수 없었다. 요근래 늘 무표정했던, 때로는 찌들어있던 곤의 표정이 그날따라 말갛고, 그러나 동시에 이상하리만치 텅 비어 보였기에. 복잡한 심정의 겨울을 아는지 모르는지 곤은 뽑기 아주머니께 나지막히 물었다.

 

“사장님, 여기 포장마차 하시는데 얼마 들었어요? 아, 저도 이거 한번 해볼까 싶어서... .... 네네. 장사요. 에? 왜요 사장님. 요즘 젊은 애들 부업에 관심 엄청 많아요.”

 

의아한 표정의 아주머니가 뭐라 물으시는 듯 했고 곤은 그저 해맑게 대답했다. 주저앉은 채 몸을 앞뒤로 까딱까딱 흔들며. 할말이 없을 때, 감정에 자주 없던 동요가 생길 때. 그럴 때 곤은 몸을 앞뒤로 흔들어대곤 했다. 탁탁-. 곤이 휘저은 설탕 덩어리들이 철판 위로 던져졌다. 아주머니의 재빠른 손길을 따라 + 모양이 설탕 위로 새겨졌다.

 

“더하기? 곱하기? 아니다. 엑스? 엑스다. 엑스…. 하필 엑스 모양이네요. 사장님. 엑스자 뽑기에 실패하면 또 엑스니까 더블엑스네. 실패가 두번이면. 꽝... ....”

 

곤이 평소 의식의 흐름대로 내뱉던 싱거운 말장난에는, 그날따라 무거운 추가 말의 끄트머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듯 했다. 그렇게 반대편 끝에 서있던 겨울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한참을 망설이며, 곤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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