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터줏대감을 죽이기 위한 휘청거림 [문학]

글 입력 2021.10.10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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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는 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변연부로 밀려난 여성 서사를 부각하고, 자신의 욕망을 표출 및 추구하는 여성 인물을 통해 사회문화적 맥락 속의 여성을 보존해온 작가이다. 이번에 접한 작품은 박완서가 지닌 문학적 완성도는 물론 대중성까지 보장한 작품, <휘청거리는 오후>이다.

 

소설 <휘청거리는 오후>는 허성 씨와 그의 세 딸 ―초희, 우희, 말희―의 연애와 결혼 과정을 중심으로 한 허씨 집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소설적 재미가 상당한 작품이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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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의 순결을 상징하는 새하얀 면사포와 웨딩드레스, ‘버진로드’라는 노골적인 단어, 신부를 객체화해 그에 대한 소유권을 아버지에게서 남편으로 옮기는 행진 등은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의문을 지니게 된 고답적인 결혼 문화이다. 최근에는 버진로드 대신 ‘웨딩로드’라는 대체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신부는 신랑과 함께 입장하는 경우가 잦아졌으며, 마이크로 웨딩 등 완전히 새로운 형식의 결혼을 추구하는 부부도 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직 터줏대감처럼 건재한 낡은 생활양식과 낡은 도덕”을 벗으려는 시도로도 보인다. 게다가 수많은 젊은 층의 비혼 선언은 굴레에 안착하고 싶어도 이를 허락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체념인 경우도 있으나, 그 어떤 굴레에도 스스로를 속박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다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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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휘청거리는 오후>에서 등장한, 사랑이라는 감정적 영역에서 맺어진 관계가 끝내 결혼이라는 체를 거쳐 실리와 교환가치만이 남은 거래 관계로 전락하는 과정이 오늘날 우리에게 아주 낯선 행태는 아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이 터줏대감의 그림자가 선연히 드리운지도 모르겠다는 찝찝한 잔여감도 이 때문이었다. 이 소설 특유의 냉정하고 적나라한 서술 방식이 그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의 허위마저 벗겨내는 기분이라 더욱 그렇게 느낀 것 같다.

 

소설 속에서 ‘결혼’은 그 어떤 여성도 구원해주지 못한다. 맏딸 초희는 진실한 사랑이니 온전한 공동체로서의 가족이니 하는 가치의 순수성은 냉소하고, 오직 여성인 자신이 “울타리를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기회로써 결혼을 선택한다. 그는 자본과 권력은 물론 저에 대한 소유권까지 지닌 공회장을 위해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적극적으로 객체화한다. 또한 남성의 욕망이 그대로 투영된 여성상을 얌전히 드러내며 오히려 공회장의 무지를 냉소하는 것 하나를 유희 삼아 버텨낸다. 그러나 그의 서사는 결국 강제적인 임신 중절, 약물 중독, 이혼 직전인 파탄까지 치닫는 결혼 생활 등으로 귀결되며 스스로의 존엄을 비롯한 모든 것을 내어준 대가로 때깔좋은 명예 하나 끝까지 지키지 못하는 비극을 맞이한다.

  

그렇다면 초희와 달리 순수한 사랑과 그가 맺어줄 관계의 낭만만으로 결혼한 우희는 조금은 행복해져야 옳지 않은가. 심지어 그는 민수의 지독한 가난과 불 보듯 뻔한 시댁살이의 고생을 예견한 상태였고, 혼전순결이라는 기성세대의 고루한 법칙에 금까지 긋는 신여성의 면모까지 보여주었다. 그러나 결혼 후 우희는 숱하게 손찌검을 받는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되었고 ―심지어 그 피해자성을 인식하지도 못하는 상태이다― 결혼한 여성으로서의 체념에만 안주하게 된다.

 

허성 씨의 아내 민 여사 역시 ―구체적인 심리는 묘사되지 않지만―결혼을 거치고 아내와 어머니라는 정체성 외에는 거세된 상황에서 그저 속물적이고 유난스러운 여성으로 전락했다. 말희의 경우 초희처럼 중매를 거친 것도 아니며, 우희처럼 가난과 시집살이의 비극도 예견되지 않는데도 낙관이 들지 않는다. 그의 결혼이 허성의 자살을 낳은 요인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러할 것이고, 앞서 설명한 여성들이 비극을 맞은 이유는 가부장제와 뒤틀린 가족주의라는 공고한 이데올로기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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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화된 <휘청거리는 오후>의 한 장면

  

 

정녕 문제였던 것은 신랑감을 고르는 안목의 부족도, 결혼 준비의 미비도 아니라 가부장제 그 자체라는 의미이다. 그것이 타파되지 않는 이상 아무리 미국에 둥지를 튼다고 하더라도 허씨 집안에 뿌리 박힌 말희는 결혼을 통한 이상을 쟁취할 수 없을 것이다. 거기다 박사 공부에 매진한 남편을 내조하기를 기대받는 상황에서 말희가 약사로서의 커리어를 지속할 수 있을 지도 의문이다. 가부장제를 부술 수 없다면 그 어떤 결혼도, 그 어떤 맺음도 여성의 행복과 존엄을 보장하지 않는다. 결혼은 여성의 고전적인 성역할을 공고히하고, 여성을 옭아매는 또 다른 권력 관계의 형성일 뿐이다.

 

허성 씨는 이러한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인, 당대의 전형성을 지닌 남성이라 느꼈다. 그는 딸을 셋이나 가진 아버지로서 여성을 변연부로 밀어내고 을로 전락시키는 결혼제도의 모순과 가부장제의 무자비함을 인식하고 씁쓸해한다. 이를 비판하는 말도 종종 던진다. 그리고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몬 ‘가족을 부양하는 존재로서의 가장’의 역할을 실패했다는 절망에도 종종 빠진다. 이것은 왼손의 상처로도 대표되며, 가부장제 피해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지점이다.

 

그러나 동시에 남성이라는 권력을 쥔 상태로 아내인 민 여사의 뺨을 때려 무력으로 가장의 권위를 세우거나, 딸을 두고 ‘깨어진 그릇은 깬 자에게 종속시켜야 한다’는 등의 폭력적인 말을 일삼는 등 그 가해자의 신분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가부장제가 여성 뿐 아니라 남성의 삶 역시 황폐화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탁월한 지점이라 생각한다. 작가는 가부장제나 가족주의의 타파를 주장하는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는 대신, 그것의 허위와 비극을 가감없이 드러내며 결국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개인을 잃어버린 인물들을 담담히 보여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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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을 때면 자연히 오늘날 현대 사회를 돌아보게 된다. 가부장제 타파와 젠더 권력의 균형을 위해 많은 투쟁들이 발생하고 있지만, 그만큼이나 현상 유지에 만족하는 소시민적인 태도도 점차 공고해지는 실태에 속이 쓰릴 때가 잦다. 이로 인한 토론이 비판적인 사유로 이어지기 보다는 맹렬한 비난과 존엄의 훼손으로 막을 내릴 때가 대부분인 것도 문제이다.

 

제 밥그릇 하나 챙기기 어려운 사회에서는 인간으로서 함께 잘 먹고 잘 살자는 순수한 의미의 연대가 어려워지고 만다. 그러나 <휘청거리는 오후>는 이러한 사회 속에서도 소설과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터줏대감’을 드러내는 실천적 투쟁과 저항이 꾸준히 이뤄져야함을 역설한다. 모두가 자신의 피해자성만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을 해치는 이데올로기에 일조한 자신의 가해자성도 발견해 ‘터줏대감’ 죽이기에 힘을 더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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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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