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2021 서울국제작가축제: 바디 시그널 [문학]

당신은 '언어'를 가지고 있습니까?
글 입력 2021.10.12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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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신이 가진 정체성을 그대로 인정받을 때, 가장 이상적이다."
 

 

이것이 작가들의 수다 <바디 시그널> 편의 첫 시작이었다. 2021 서울국제작가축제 포스터를 훑어보다가 '내가 나일 수 있는 방법'이라는 의미심장한 키워드에 이끌려 사전예약 링크를 받았는데, 사회자가 대뜸 이런 말을 했다. "아르헨티나는 최근 공식 신분증에 제3의 성 'X'를 표기하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시작부터 이런 흐름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라고 연신 뇌까리면서 나는 그렇게 강연에 빨려들어갔다.

 

 

 

"보편화는 폭력입니다"


 

강연에는 싱가포르의 시인 아만다 총, 그리고 한국의 소설가 최진영이현석 총 세 명의 작가들이 참여했다. <바디 시그널> 강연은 사실 말이 '강연'이지 허심탄회한 대화가 주를 이루었는데, 나는 이들의 대화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보편화는 폭력입니다."

 

먼저 아만다 총은 싱가포르 빈곤 계층 어린이들의 문맹퇴치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며, 그들을 통해 싱가포르와 같이 대외적으로 '부유한' 이미지를 가진 국가에서 '빈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배워가고 있다고 전했다. 그녀는 잘 포장된 한 사회의 이면을 파헤쳐 본 자신의 경험을 통해 '싱가포르는 잘 사는 국가이다'라는 보편화 아래 얼마나 많은 빈곤층이 묵살되고 있는가를 우회적으로 꼬집는다.

 

다음으로 최진영은 아예 대놓고 동일성의 폭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평범한 삶'이란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상기시킨다. 한국 사회에서 평범하게 살기 위해서는 대학을 졸업한 24세 경 번듯한 평생직장에 취직해야 하고, 30대가 될 즈음 번듯한 배우자와 결혼해야 하며, 퇴직할 때 쯤이면 자식들에게 손벌리지 않기 위해 노후를 준비해야만 한다. 최진영은 이러한 사회적 압박이 구성원들로 하여금 '나다운 삶'을 포기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마지막으로, 이현석은 이들의 말에 '그he; 타자다움'이라는 요소를 보탠다. 나로서는 매우 놀랍게도 그는 본인의 발언 차례가 되자 주저 없이 故 변희수 하사의 강제 전역 사건을 언급했다. 해당 사건에 대한 매우 깊은 유감을 표하면서 이현석은 우리가 각자 현재 표방하고 있는 성적 지향성이 과연 자연스러운 본능일지 혹은 사회적 학습의 결과일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또한 내가 '나다움'을 지킬 수 있는 사회가 되려면 나와 다른 타인, 즉 '그' 역시 '그다움'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청중에게 역설했다.

 

 

 

탈식민주의?


 

'나다움'에 대한 이들의 이야기는 제3자가 얼핏 듣는다면 어째 '문학'과는 영 접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재차 반복해서 묻고 있는 '나다움'에 대한 질문―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나의 자아상은 주입된 것이 아닌, 정말 내가 '원한' 것인가?―은 여성주의 문학 작품을 설명하는 한 가지 이론과 맞닿아 있다. 바로 '탈식민주의' 이론이다.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세계는 '중심''주변'으로 나뉜다. 그리고 중심만이 자신의 경험을 정확하게 표현할 언어를 가진다. 주변은 언어를 박탈당한 계층으로서, 자신의 경험과 일치하는 언어가 없다. 이때 중심부의 주변에 대한 지배는 단순히 주변의 독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지배의 흔적은 주변부 사람들의 무의식에 남아있다. 이 흔적을 없애는 것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지배의 시간동안 너무도 익숙해져서, 중심부의 언어가 본디 자신의 것이었는지 새로이 주입된 것인지 구별해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바디 시그널> 강연에서 세 작가가 역설한 내용들은 모두 위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일례로 아만다 총은 어린이 빈곤층 문제 외에 여성 문제에 대해서도 발언한다. "남성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사회화되었기 때문에, 유독 여성들이 질문을 할 때마다 사과를 하는 경향이 있다." 이때 여성들이 사과하는 것은 '무의식적'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사과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식하지 못한 채 사과를 한다. 이것이 바로 내면화된 중심부남성의 언어명령이다.

 

또한 각자 자신의 '바디 시그널'을 보여줄 수 있는 물건을 공개하는 시간이 되자, 여성 참가자인 아만다 총과 최진영이 각각 여성용품인 생리대와 브래지어를 공개한 데 반해 남성 참가자인 이현석은 자신이 아무것도 들고 올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콘돔을 가져올까 했으나, 콘돔 역시 오로지 남성만을 위해 사용하는 물건이 아니기에 포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아래와 같은 설명을 덧붙인다.

 


오랜 세월 동안

남성이 인간의 표준형이었기에

남성만을 위한 물건이 없는 겁니다.

 

이것은 오랜 세월동안 세상이 중심부인 '남성'의 언어로 설계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즉 세상의 모든 언어, 사물, 제도들은 기본값(default)이 '남성'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그러한 세상에서 주변부의 '여성', '아이' 등은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있는 '남성'과의 차이를 추가적인 노력으로 보완해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청결제 등 생활용품에 있어서도 '남성'은 시중의 기본 용품을 사용하는 반면에, '여성'과 '아이'는 별도로 제작된 용품을 사서 구매해야 하는 형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차이를 의식하고 있지 않다. 이것이 '원래 그렇고', '당연하기' 때문이다.

 

 

 

맺음말


 

나름 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문학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등장하지 않았음에도 이만큼 유익한 강연은 없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바디 시그널>은 문학을 향유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하는 기술,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보지 않는 법'을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이다. 문학을 사랑하는 당신의 '마음'을 위한 준비 운동이라고 보면 되겠다.

 

덧붙여 <바디 시그널>에 참가한 세 명의 작가 중 두 명은 소위 '전문직' 종사자다. 시인 아만다 총의 생업은 변호사다. 그리고 소설가 이현석의 생업은 의사다. 이들은 모두 생업에 성실히 종사하면서 틈틈이 문학 활동을 이어가는 작가들이라는 점이 나를 놀라게 했다. (이로써 '의사나 변호사정도의 직업을 가진 사람은 문학 작품을 쓸 수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나의 전제 역시도 해당 직군에 대한 폭력적 보편화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의 바르면서도 재치 있게 강연을 이끄는 사회자의 매끄러운 진행과,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다양한 개성을 확립한 세 명의 작가들이 모여 나누는 '나만의 신호' 이야기. 사실 단순한 '몸의 신호'보다는 훨씬 더 중요한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기에 <바디 시그널>이라는 명명은 썩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듯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손에 꼽는 정말 멋진 강연이었다고 회상할 수 있다. 21세기 현대 문학을 읽고 있는 사람이라면, 혹은 읽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한 번 들어보길 추천한다. 다음 작품을 읽기 위한 좋은 준비 운동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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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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