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굿바이, 제임스 본드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2021, 캐리 후쿠나가)
글 입력 2021.10.08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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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You only live twice.'

 

유명한 격언이자 67년도 작 007 영화의 제목이다. 자신의 삶이 한 번뿐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비로소 두 번째 삶이 시작된다는, YOLO와 비슷한 뜻이지만 여기서는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위기의 순간, 사람은 자신의 지나온 삶을 똑바로 응시함으로써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는 007이 지금껏 숱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이자, 007 시리즈가 60년 넘게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는 말 그대로 007을 두 번 살게 만들었다. 그의 제임스 본드는 초인적인 능력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눈빛 한 번으로 여성들을 침대로 보내는 선배 007들과 다르다. <카지노 로얄>(2006)에서 새파란 신입 요원으로 등장한 그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배신한 여인 베스파 린드를 잊지 못하는 사람이자, <스카이폴>(2012)에서 임무를 위해 자신을 버린 첩보기관에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는, 가장 인간적인 007로서 침체된 007 시리즈에 두 번째 삶을 가져다주었다.


물론 그가 등장한 모든 007 영화가 비평과 흥행에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크레이그의 007이 대체 불가능한 매력을 갖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의 마지막 영화인 <노 타임 투 다이>가  전작 <스펙터>(2015)의 오명을 씻는 아름다운 이별이 될지, 아니면 이번에도 시리즈의 고질적인 단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가라앉을지, 다사다난한 시리즈의 마지막을 극장에서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프닝 1.jpg

 

   

도입부, 즉 첫인상이 중요하지 않은 작품은 없겠지만, 오프닝에 대한 이야기 없이 007 영화를 논할 수는 없다. 그만큼 팬들이 가장 기대하는 요소 중 하나인데, 필자도 <노 타임 투 다이>를 보러 간 날 영화관에 5분 정도 늦게 도착하자 표를 다시 예매하고 영화관에서 한참을 기다렸을 정도다. 그만큼 기대를 많이 하고 본 오프닝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크레이그의) 007 시리즈 최고의 오프닝을 뽑을 때 자주 언급되는 <스카이폴>(2012)에 맞먹을 정도로 좋았다.

 

영화는 연인 마들렌(레아 세두)과 함께 숨어 지내는 본드가 베스파의 무덤을 찾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본드는 그를 살리기 위해 그를 배신한, 자신이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베스파를 추모하며 감상에 젖는다. 그러나 그 순간, 본드는 전작에서 처리한 줄 알았던 악의 조직 ‘스펙터’의 습격을 받는다. 마들렌을 데리고 가까스로 도망치는 데 성공하지만, 그는 마들렌이 스펙터와 내통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와 헤어지기로 한다. 두 사람의 이별로 마무리되는 20분 남짓한 도입부는 첩보물의 모든 요소를 훌륭하게 집약하는데, 감정이 없어 보이는 비밀 요원의 인간적인 모습, 아름다운 로케이션, 화려한 액션과 감각적인 촬영, 적재적소에 쓰이는 특수 장비, 가장 가까운 사람이 배신자일지도 모른다는 첩보물 특유의 비극성을 모두 담아내며 엄청난 몰입감을 선사한다.

 

이어지는 오프닝 크레딧엔 다니엘 크레이그가 주연을 맡은 전작의 오프닝에서 쓰인 요소들이 여럿 등장한다. <카지노 로얄>의 트럼프 카드, <퀀텀 오브 솔러스>(2008)의 모래와 사막, <스카이폴>의 물과 추락의 이미지가 한 오프닝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그의 지난 여정을 상기시킨다. 이외에도 이중나선, 일본식 가면, 독초 등 본작의 악역과 관련된 요소를 이용해 다채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본작의 악역을 형상화한 커다란 조형물은 <스펙터>의 오프닝을 떠오르게 한다.

 

강렬한 오프닝을 잇는 초반부도 이에 못지않게 쫀쫀하다. 악의 조직 스펙터가 생화학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테러를 저지르는 장면과 본드가 스펙터와 관련된 증거를 찾기 위해 CIA의 신입 요원 팔로마와 함께 쿠바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장면은 다채로운 볼거리로 가득하다. 액션도 액션이지만 화면의 구성과 색감이 기대 이상으로 감각적이다. 파란색이나 녹색을 베이스로 깔고 노란색이나 빨간색으로 포인트를 준 화면은 일견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떠오르게 하는데, 어둠 속의 총격과 폭발을 심미적이고도 선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굉장히 좋은 선택이었고 본다.

 

여기까지는 007 시리즈에 또 하나의 명작이 추가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강렬한 도입부와 인심 좋게 퍼담은 액션, 매끄러운 촬영과 멋진 화면에 전작을 향한 오마주까지, 영화는 여러모로 다니엘 크레이그와 멋지게 이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악역 1.jpg

 

  

그러나 멋진 오프닝과 흥미로운 초반부를 지나고 나면 영화의 긴장감은 급속도로 힘을 잃는다. 이는 상당 부분 메인 악역의 빈약함에서 기인한다. 사실 전작의 잘못이기도 한데, 그동안 세 편의 영화에 걸쳐 자신의 부하들을 이용해 본드를 괴롭힌 세계관 최고의 악당, ‘스펙터’의 보스 블로펠드가 전작 <스펙터>에서 허무하게 잡히는 바람에 시리즈의 방향성이 붕 떠버렸기 때문이다.

 

제작진의 선택은 크게 두 가지였다. 네 편에 걸쳐 서사를 쌓아 온 시리즈 최고의 악역 블로펠드를 다시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전혀 새로운 악역을 등장시킬 것인가. 제작진은 전작에서 어그러진 이야기를 억지로 짜맞추기보다는 새로운 악역을 통해 서사를 재구축하기를 선택한다. 어린 시절 자신의 가족을 죽인 스펙터에게 원한을 가진 새로운 악당 룻지퍼 사핀(라미 말렉)을 등장시키고, 본드와 블로펠드를 포함한 모두가 그의 계획에 놀아나게 만든다. 그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전작의 악당 블로펠드를 끔찍하게 죽이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엄청난 지략과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 소름 끼치게 낮고 서늘한 목소리 톤에 배우의 열연까지, 짧은 시간 안에 악역의 존재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그럼에도 본드 시리즈 악역의 고질적인 문제는 그대로다. 온갖 잔인하고 냉혹한 척은 다 하다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본드를 확실히 죽일 기회가 있어도 그를 내버려 둔다. 물론 본드가 죽으면 작품은 끝이니까 어쩔 수 없다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개연성을 확보하는 장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스카이폴>의 악역 라울 실바(하비에르 바르뎀)를 개인적으로 007 시리즈 최고의 악역으로 뽑는 이유도 이런 맥락이다. 그가 007을 죽이지 않은 것은 자신의 계획을 위해서였으며, 그의 목적은 오로지 M이었기 때문에 굳이 기를 쓰고 007을 죽일 이유도 없었다. 또한 그에게 007은 M에게 버림받는 기분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회유의 대상이기도 했다. 라울 실바는 결국 007에게 패배하지만, M을 후회 속에서 죽게 했기에 나름대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반면 사핀의 행위에는 개연성이 그다지 뚜렷하지 않다. ‘내 가족을 죽인 블로펠드에게 복수를 마쳤으니 다음은 생화학 무기를 통해 전 세계적 혼란을 초래해야겠다.’ 하는 사고의 흐름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거대한 비밀 기지 같은 영화적 장치와 상황들로 한껏 분위기를 잡지만, 행위의 동기가 부재한다는 점은 가려지지 않는다.

 

작중에서 사핀의 입을 통해 그가 본드와 비슷한 존재임이 언급되고, 그 또한 본드처럼 스펙터에게 모든 걸 빼앗겼다는 점을 계속 드러내는 것을 보면 영화 내에서 둘의 유사성이 강조된다는 느낌이 드는데, 차라리 그럴 거였다면 사핀을 모종의 이유로 각국의 정보 기관이 지켜주지 못한 스펙터의 피해자로 설정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당하면서 모든 걸 잃은 그가 DNA 무기를 통해 전 세계의 범죄 조직과 첩보기관을 없앰으로써 그들에게 복수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평화를 이룩하겠다는 신념을 가진 악당이었다면, 그의 대립쌍으로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이후 누구도 믿지 못하다가 자신과 함께한 동료들과 가족에 대한 믿음을 회복함으로써 구원받는 본드의 서사가 더 선명해지지 않았을까.

 


본드 1.jpg

 

 

이런저런 아쉬움은 있지만, 크레이그 본드 시리즈의 오랜 팬으로서 마지막 장면에는 코가 시큰해졌다. 물론 007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낸 뒤 죽음을 맞는다는 결말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고 이에 일정 부분 공감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했음에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자신이 소속된 첩보기관에 배신감과 회의감을 갖기도 하는 가장 인간적인 007,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에게 나름대로 어울리는 결말이라는 생각도 든다. 총도, 폭탄도, 끔찍한 고문도 그를 죽이지 못했지만, 그를 멈춰 서게 한 것이 사랑하는 가족을 죽게 할지도 모르는 ‘DNA’ 무기였다는 것은 꽤 흥미롭다.

 

그런 맥락에서 본작에 등장하는 DNA 무기의 이름이 ‘헤라클레스’라는 점은 본드의 최후를 암시하는 동시에 제작진이 생각하는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를 은연중에 드러내는 듯 보인다. 그리스 신화의 가장 유명한 영웅 헤라클레스는 히드라의 독에 당해 죽지도 못하고 고통받는 처지가 되자 스스로 분신하여 최후를 맞지만, 그 업적을 인정받아 신과 같은 존재가 된다. 인간으로 태어나 초인적인 과업을 완수하고 신이 된 사나이. 제작진이 생각한 제임스 본드는 아마 그런 존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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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다니엘 크레이그의 퇴장과 함께 또 한 시대가 끝났다. 가장 이질적인, 동시에 가장 매력적인 제임스 본드는 더 이상 사람들이 초인적인 능력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눈빛 한 번으로 모든 여성을 침대로 이끄는 007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물론 그런 요소들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많은 개선이 이뤄진 것은 사실이다).


이제 그에게 보내는 경의를 뒤로 하고,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 될 또 다른 혁신을 고민해야 할 때다. 그런 점에서 이번 작품에 등장한 007의 후임자가 흑인 여성이라는 것은 상당히 유의미한 행보다. 이는 다음 007이 꼭 백인 남성이 아닐 수도 있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만약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시리즈의 전통과 시대적 요구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겠다는 일종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고민이 멈추지 않는 한 007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007은 언제나, 두 번 살기 때문이다.

 

 

[박호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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