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1인치의 장벽을 뛰어넘어 19세기 프랑스를 체험하다 - 오페라 라 보엠: 2021 서울오페라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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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에 펼쳐진 19세기 프랑스
다른 나라의 시대극을 보면 기분이 묘하다. 나에게는 작품의 공간적·시간적 배경이 모두 낯설기만 한데,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이라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나에게는 2020년대의 대한민국이 너무나 당연한데, 과거의 누군가에게는 최첨단의 미래일 것이고, 미래의 누군가에게는 오래된 과거일 것이라는 점이 흥미롭기만 하다.
2021년 10월 1일, 강동아트센터에서 오페라 <라 보엠>을 보면서 이와 비슷한 생각을 자주 했다. 분명 내가 있는 곳은 2021년의 서울인데 무대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력이 너무나도 생동감 넘쳐서 정말로 눈앞에 19세기 프랑스가 펼쳐진 것만 같았다.
<라 보엠>은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로, 크리스마스이브에 펼쳐지는 젊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극이다. 프랑스 작가 앙리 뮈르제의 소설 <보헤미안 삶의 정경>을 토대로 한 이 오페라는 1896년에 초연된 이후로 100년이 훌쩍 넘는 지금까지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오페라는 크리스마스 이브, 카페 모뮈스(Momus)로 간 친구들을 뒤로하고 쓰던 글을 마무리하기 위해 집에 홀로 남은 로돌프가 촛불을 빌리러 온 미미와 사랑에 빠지는 1막, 카페 앞 광장에서 인파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즐기다 로돌프의 친구인 마르첼로와 그의 옛 연인 무제타가 재회하는 2막, 황량한 겨울의 밤거리를 배경으로 무제타와 마르첼로가 이별하고, 미미가 곧 죽을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3막, 마지막으로 로돌프네 집에서 모두가 모여 미미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4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페라를 감상하는 내내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단연 무대 배경이었다. 로돌프네 집, 카페 모뮈스 앞 광장, 황량한 새벽의 밤거리, 그리고 다시 로돌프네 집을 배경으로 극이 진행되는데 이 중에서 2막과 3막의 배경이었던 카페 모뮈스 앞 광장과 밤거리 무대 연출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기존에 봤던 연극보다 훨씬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했고 곳곳에 자리 잡은 디테일한 소품들은 절로 감탄을 자아냈다.
<라 보엠>의 주요 인물은 로돌프와 미미, 마르첼로와 무제타 크게 네 사람이다. 로돌프와 마르첼로는 함께 사는 친구이기도 한데, 추운 겨울 땔감이 없어 원고를 태우는 시작 장면부터 이들이 가난한 젊은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촛불을 빌리러 온 미미는 처음 본 로돌프에게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이를 통해 미미 역시 평범한 노동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왠지 오페라라고 하면 특별한 이들의 비장한 이야기만 다룰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라 보엠>은 그런 나의 편견을 보기 좋게 깨고 평범한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다루었다. 그래서인지 내 눈 앞에 펼쳐진 이야기가 정말 19세기 프랑스 어딘가에서 일어날 법한 일처럼 보였다.
사실 이야기는 조금 통속적인 면이 없지 않아 있다. 평범한 사랑 이야기에 평범한 이별 이야기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만큼 <라 보엠>이 초연된 19세기에서 21세기 지금까지 인류의 사랑이 비슷한 방식으로 흘러왔다는 뜻일 것이다.
1인치의 장벽
흥미로운 건 프랑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탈리아어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외국어로 이뤄진 영화는 자주 봤지만, 공연을 외국어로 감상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외국어 공연이어도 자막이 달린 영상으로 본 게 전부였다.
공연장 양 끝에 있는 화면에서 한국어 자막을 확인할 수 있다. 처음에는 공연을 보면서 자막을 보는 게 익숙지 않아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조금 혼란스러웠다. 점차 적응되자 평소 외국 영화 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감상할 수 있었다.
공연을 보는 내내 제7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수상소감이 떠올랐다.
“1인치 정도 되는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
그의 간결한 이 한마디는 비영어권 국가 창작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영화뿐만 아니라 많은 예술 작품의 역사가 서양에서 영향을 받아 이뤄졌다. 서양의 인정을 받은 작품만이 뛰어난 작품으로 여겨졌고, 그 인정받은 작품 중에서 동양 작품이 설 자리는 없었다. 서양의 영화제는 항상 ‘그들만의 잔치’로 불렸는데, 그런 상황에서 골든글로브에 이어 아카데미까지 섭렵한 봉준호 감독의 쾌거는 아주 상징적이다.
봉준호 감독에게 외국어영화상의 영예를 안겨준 골든글로브 시상식은 그다음 해에 열린 제78회 시상식에서 1인치의 장벽을 실감하게 했다. 바로 미국 제작사에서 만든 미국인 감독의 영화 <미나리>가 한국어 대사가 90%라는 이유로 작품상 후보에 오르지 못하고 외국어영화상 후보에만 오른 것이다. 숱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수상 후보는 변동되지 않았고,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정이삭 감독은 다음과 같이 소감을 전했다.
“Minari is about a family trying to learn how to speak a language of its own. It goes deeper than any American language and foreign language ; It’s a language of the heart. I’m trying to learn it myself and to pass it on, and I hope we’ll all learn how to speak this language of love to each other, especially this year.”
“<미나리>는 그들만의 언어로 이야기하려고 노력하는 가족의 이야기이며, 그 언어는 단지 영어나 그 어떤 외국어가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온 진심의 언어다. 저 스스로도 그 언어를 배우고 물려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우리 모두 서로에게 이 ‘사랑의 언어’로 말하는 법을 배웠으면 좋겠다.”
이 수상 소감으로 정이삭 감동은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이 모인 국가 미국에서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국계 미국인 가정의 이야기가 외국 영화로 치부되는 아이러니를 품위 있게 비판했다.
<라 보엠>을 보면서 오프라인 공연에서조차 1인치의 장벽을 넘는 게 간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한국인들이 한국에서 하는 공연인데 외국어로 진행된다는 것에 살짝 거부감이 들었다. 점점 다른 언어에 익숙해지면서 외국어로 진행된 덕분에 유럽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에 더 몰입될 수 있었다. 1인치의 장벽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공연이 끝나고 함께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우리는 공연에 대한 소감을 주고받으며 문화생활이 우리 삶을 얼마나 윤택하게 해주는지를 얘기했다. 각자 삭막한 삶에 지쳐있던 우리는 19세기 프랑스의 삶을 만끽하며 잠시나마 익숙한 힘듦을 잊을 수 있다. 공간의 제약과 언어의 제약을 모두 허물었던 <라 보엠>을 관람한 그 날 밤만큼은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었다.
[진금미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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