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생각하고 싶은 당신을 위한 지적 유희: 도서 '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

글 입력 2021.09.28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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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사이트를 통해 책을 접하다보면, 예술분야 그 중에서도 특히 미술 관련 도서들을 접할 기회가 많이 생기는 편이다. 미술은 재밌고 궁금하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어렵게 느껴지는 분야라서, 미술 분야 도서들을 읽으면 언제 읽어도 새롭고 흥미롭다. 누군가가 먼저 미술 작품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을 제시해주기 때문에 그 관점에 입각해서 따라 생각해보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 도서 "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을 보았을 때에도 당장에 이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학자의 깊이 있는 시선과 예술 작품을 향유하는 감성이 만나 어떤 새로운 시각을 경험하게 해 줄지 기대가 되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저자 이진민은 내가 상상했던 인문대학 철학과 출신의 철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정치철학자였던 것이다. 책을 펼치기 전에 날개깃에 쓰인 저자의 배경 소개를 보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정치철학을 세부전공으로 선택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정치학도가 아니었던 것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사회과학 텍스트들을 계속 읽어서 그런지 나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다 딱딱한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코 말랑말랑하지 않은 이 학문을 박사과정까지 꾸준히 공부한 저자가 어떻게 미술과 철학을 풀어낼지, 특히나 저자의 배경을 고려해 정치철학과 예술을 연결지을 수 있을지 너무 궁금해졌다.


 



< 목 차 >


들어가는 말


1. 천지창조를 바라보는 발칙한 시선: 니체는 왜 신이 죽었다고 말했나


2. 투명한 유리병에서 인간의 품성을 찾다: 공자와 베버에게 보여주고 싶은 그림


3. 기묘한 균형으로 쌓여 있는 책 구경: 너도 옳고 나도 옳을 때 우리는 어떻게 공존할까


4. 빨간 사과에 대한 서로 다른 욕망: 인간은 왜 사회와 국가를 만드는가


5. 공작새와 오리의 서열은 누가 정하나: 허영심과 불평등, 그리고 법률


6. 가로등과 매화가 달빛을 대하는 방식: 아름다움의 속도를 철학하다


7. 왜 클림트는 혹평에 시달렸을까: 정의를 위한 불의의 그림


8. 정의는 왜 여신이 담당하는가: 양날의 칼을 쥔 자의 책임


9. 여신의 눈을 가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정의로운 눈 뜨기와 공정한 눈 감기


10. 가면 쓴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 집단의 광기와 개인의 자유


11. 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신과 죽음, 그리고 전쟁 속에서 발견한 개인


12. 소녀들의 눈을 멀게 한 카펫: 태피스트리 작품들과 나이키 공장의 아이들


13. 공이 굴러간 곳에서 니체를 다시 만나다: 그늘 속 어른과 빛 속의 어린아이


감사의 말

 




저자 이진민이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그 중에서도 세부전공으로 정치철학을 선택했다는 배경을 읽고 나니 그가 가진 학문적 배경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거기에 머릿말에서 독자들에게 '같이 놀아요' 라며 부담스럽지 않게 철학과 예술을 접하고 즐기길 권하는 세련된 문장에 벌써부터 매료되고 말았다. 그런데 다음장을 펼치며 목차를 보는 순간, 그 모든 설렘은 그야말로 정점을 찍어버렸다. 어떻게, 시작부터 니체를 논할 생각을 했을까. 저자가 정치철학자니까 정치학적 개념들을 분명 다룰 것이라 예상하면서 아마도 무난하게 홉스와 로크, 루소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던 나의 안일함이 낯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놀랍게도 "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은 시작과 끝을 온전히 니체로 맺는다. 허무주의의 대명사로 알고 있을 니체에 대해, 적어도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다시금 생각해보길 바라는 듯한 저자의 안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목차만 보아도 느낄 수 있다. 이 책이 비단 예술 작품을 어떻게 감상하는가의 차원에서만 접근하는 책이 아니라는 점을 말이다. 이 책은 미술 작품을 보면서 어떻게 철학적 영역으로까지 사고의 저변을 넓혀나갈 수 있는지, 저자 이진민 스스로가 가진 정치철학적 배경을 바탕으로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사고의 확장성을 보여주는 책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걸 이만큼 잘 표현한 책이 없다 싶을 정도로, 저자는 자신이 아는 것들을 바탕으로 예술 작품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철학적 개념들을 재치있게,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로 독자들에게 풀어서 설명한다. 유리병 하나에 공자의 군자불기를 떠올리고 그 외연을 확장시켜 베버에까지 이르는 이 깊이감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른다. "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에서 펼쳐지고 있는 이 일련의 흐름들은 명백히 지적인 유희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 중 일부에게는 어쩌면, 작품 하나 속에서 어떻게 이 많은 철학적인 것들을 생각해낼까 하는 걱정이나 두려움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어떤 부연 없이 작품과 나만 존재하는 상황에서 혼자 감상한다면 이만큼 사고를 확장시켜 감상에 깊이감을 더할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결코 쉽게 긍정의 결과를 내지는 못할 것 같다. 사고의 깊이란 절대 한 순간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가 바라보듯이 작품 면면을 살펴보면서 생각하는 훈련을 하다보면, 저자 이진민이 먼저 펼쳐나간 생각의 발로들처럼 다양한 방향으로 사고가 발전되는 훈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들어가는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독자들이 철학과 예술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눈으로 보면서 생각해보는 놀이'로 즐겨보길 바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저자가 보여준 즐거운 지적 유희의 순간들 속에서 내 생각을 조금씩 덧붙여보게 만들었던 장면들을 되새겨보고자 한다.


*


이 책의 알파와 오메가인 니체는 정말 어려운 철학자다. 니체의 비범함으로 인해 그의 족적을 하나하나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도 분명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가 나에게 너무 어려웠던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바로 내가 크리스천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니체 외에도 수많은 철학자들이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가 유독 어렵게 와닿았던 것은, 그만큼 맹렬하게 기독교와 크리스천들에게 팩트폭행을 하는 철학자는 없다 싶을 정도로 촌철살인들의 논리들을 그가 남겼기 때문이다. 책에서 저자 이진민은 '철학을 공부하면서 크리스천이 아닌 것에 늘 감사한다'고 한 문장을 남겼는데, 이 익살스러운 문장에 웃음이 나는 동시에 또 한 번 뼈를 맞는 기분이었다. 뼈 아프게 부럽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겠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그의 공격력이 가장 높은 것이 아니다. 니체는 기독교 신앙생활에 근간을 이루는 부분을 명확히 꼬집어 지적하고 있다. 바로 가치전복Transvaluation이라는 개념을 통해서다. 니체는 크리스천들의 신앙생활 속에서 '노예 도덕'을 보았다. 참고 순종하고 견디는 것이 일반적으로 억압이라 생각되는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신앙적으로 이런 순종을 미덕으로 보는 것을 보고 노예 도덕으로 보았던 것이다. 주인 도덕의 좋고 나쁨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인 도덕에서의 좋은 것을 노예 도덕의 나쁜 것으로 치환하여 노예 도덕에서 선으로 보는 것을 바로 가치전복으로 보았던 셈이다. 기독교에서는 분명 원죄 개념이 존재하고, 신의 주권을 인정하는 동시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권없음을 선언하며 신의 주권과 임재를 외치므로, 니체가 말하는 모든 것들은 그야말로 기독교를 사정없이 두들겨 패는 느낌이다. 그런 니체는 인간이 노예 도덕에서 벗어나 그저 카오스에 불과한 영원회귀의 심연을 직시하고, 그 허무를 껴안고 인생을 다시금 헤쳐나갈 것을 주문한다. 허무주의자로 알려진 니체가 사실은 누구보다도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위버멘쉬는 뭔가를 넘어선 사람이라는 뜻이다. 초인이라는 일본식 번역의 여파가 컸기에 요즘에는 위버멘쉬라는, 독일어 발음을 그대로 차용해서 쓴다. 그렇다면 인간이 무엇을 넘어섰을까. 바로 앞선 논의를 생각하면 간단하다. 신과 같은, 이른바 절대자 또는 초월자를 넘어섰다는 의미다. 인간을 노예 도덕의 굴레에 속박시키는 절대자 또는 초월자라는 존재로부터 자유로워져 존재 그 자체로 주체적인 개인으로서 실존하는 사람을 위버멘쉬로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니체는 사람이 처음엔 노예 상태의 낙타에서 시작해, 거기에 의문을 가지는 사자로 성장하여 최종적으로는 파괴와 부정, 허무를 넘어 모든 것을 긍정하는 '어린 아이'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어린 아이 같은 위버멘쉬가 되어, 마치 어린아이처럼 지금을 가장 행복하게 만끽하는 새로움과 긍정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니체가 기독교에서 쓰는 메타포와 동일한 '어린 아이'를 썼다는 점은 또 재미있는 부분이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는 마태복음 18장 3절의 성경 구절을 보면 기독교적 구원이 임하는 대상 역시 어린 아이라는 동일한 비유 대상을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동일 메타포를 사용하기 때문에 더더욱 기독교와 니체의 관점이 차이가 극명해진다. 천국이 어린 아이들의 것이라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이유는, 아이의 의존성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의 순수성 역시도 여기에 포함되기는 한다. 하지만 어린 아이의 메타포를 통해 성경에서 드러내는 것은,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신을 앙망하고 또 어린 아이가 마치 부모에게 온전히 의지하고 신뢰를 표하는 것처럼 의존하는 모습이 바로 신앙인이 신이 주관하는 일련의 흐름에 순종하고 의지해야 하는 모습이라는 점이다. 오로지 어린 아이의 순수성과 긍정성 그리고 자유로움에 초점을 맞추는 니체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지점이다. 그래서 니체는 크리스천에게 정말 재미있는 동시에 어려운 철학자다. 이러한 니체에 대한 논의를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시작해 펠릭스 발로통의 '공'으로 맺는 정치철학자 이진민의 식견은 더 말해 무엇하랴. 그야말로 광활하다.


*


"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의 모든 챕터들이 아주 흥미롭고 재치있다고 느꼈지만, 개인적으로 내 눈을 사로잡았던 또 다른 꼭지는 바로 9번 챕터, '정의로운 눈 뜨기와 공정한 눈 감기'였다. 부제만 보아도 너무나 흥미롭지 않은가. 어느 한 쪽만 옳다고 딱 잘라 말하기 정말 어려운 문제다. 얼핏 보기만 해도 무지의 베일을 꺼낼 주제구나 하고 유추할 수 있는 이 챕터를 다루기 위해, 저자 이진민은 눈을 가리고 있는 정의의 여신을 매개체로 활용했다. 한 손에는 저울, 다른 손에는 칼을 든 채로 눈을 가리고 있는 정의의 여신은 그림뿐만 아니라 동상으로도 다양하게 볼 수 있다. 물론 눈을 가리지 않은 정의의 여신 모습을 담은 작품들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눈을 가린 모습들을 더 많이 봤던 것 같다. 확실히 정의의 여신하면, 안대로 눈을 가린 그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그 눈을 가리운 정의의 여신을 보며, 정치철학자 이진민은 존 롤스를 떠올렸다. 롤스의 사상을 간단하게 표현할 순 없지만 요약해서 말하자면, 어떤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지의 베일을 쓰고 각 개인의 원초적 입장에서 생각함으로써 절차를 정의롭게 갖춰야 하고, 그래야만 그 결과인 제도가 정의롭다고 본다. 즉 절차의 공정성으로부터 사회적 정의와 공공선이 담보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가 챕터의 부제로 명시한 것처럼 '공정한 눈 감기'가 바로 이것인 셈이다. 하지만 아이리스 영은 롤스와 대비되는 주장을 편다. 과연 제도를 만드는 행정가들이 무지의 베일을 뒤집어 쓰고, 자신이 겪어본 적조차 없는 약자들의 입장을 제대로 대변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특히 영은 사회 내의 차별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기보다는 성별, 국적, 인종 등 집단적 차원에서 주로 발생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따라서 집단적 차이를 인정해야 차별의 대상이 되었던 소수 집단이 그 차별에 맞설 역동성을 비로소 갖게 된다고 보았다.


롤스의 정의론도, 그리고 영이 그리는 정의에 대해서도 모두 정의 구현을 고민한 만큼 양쪽 모두 설득력이 있다. 생각해보면 과거의 나는 그 중에서도 롤스에 좀 더 마음이 기울었던 것 같다. 인간의 이기심에서 시작되어 사실은 가장 정의로운 결과를 이루는 롤스의 정의론이 더 가깝에 와닿았던 이유는, 말 그대로 인간의 이기심을 배제하고서는 정의를 논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타심보다도 어쩌면 더 인간의 심연에 가까운 이기심으로 정의로운 결과를 산출하는 것이, 이타심에 기대어 정의를 이뤄내는 것보다 훨씬 더 현실성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지금도 롤스의 정의론은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재의 시점에서는 아이리스 영이 말하는 정의에 대해서 더욱 생각해보게 된다. 과연 무지의 베일을 쓰면, 인간은 온전히 공정해질 수 있을까. 가정 상으로는 무지의 베일을 우리가 상정하고, 원초적 입장이 된다고 예상해볼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인지 사회 정의를 위해 좀 더 현실적으로 정의를 구현할 방법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다. 양극화가 심해지고 사회 구성원 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특히나 내년에 대선과 지방선거라는 두 개의 큰 이벤트를 앞두고 있는 이 대한민국의 정의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이 나라가, 이 사회가 추구해야 할 정의란 무엇인가. 이 고민들을 직시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 앞에는 그야말로 끝없는 사고의 광야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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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를 막론하고, 누군가가 뭔가를 잘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그가 선보이는 것이 쉬워 보이느냐의 여부를 보면 된다. 마치 전 피겨 선수 김연아의 경기가 물 흐르듯 매끄럽고 자연스러우며 쉬워보였던 것처럼, 그리고 쇼트트랙 선수 최민정의 아웃코스 추월이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느껴졌던 것처럼 정말 잘하는 사람이 하는 것은 그 분야의 문외한들에게 쉽고 편해 보이곤 한다. 정치철학자 이진민의 "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 역시, 예술 작품을 통해 철학적 개념들을 아주 쉽게 풀어내 주어서 쉽고 재밌고 즐겁게 텍스트와 삽화들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저자의 수많은 고뇌와 철저한 사유를 바탕으로 그 고찰의 결과들을 유기적으로 엮어내는 뛰어난 능력이 뒷받침되었다는 의미다.


덕분에 더할 나위 없이 즐겁게 책을 즐길 수 있었다. 책의 뒷면을 보면 추천서가 쓰여 있다. '미술도 처음, 철학도 처음이라면' 이라는 문구 밑에 '그림 앞에서 할 수 있는 세상의 모든 생각'이라는 문구가 함꼐 있다. 초심자가 할 수 있는 사고의 영역은 아니지만, 초심자들도 이런 형태로 사고를 훈련해가다 보면 인식의 지평이 확실히 넓어질 수 있게꾸나 하는 가늠은 충분히 하게 해주는 책이었다. 무엇보다 저자처럼 사고를 확장시켜 나가는 일련의 흐름이 너무 재밌다. 저자 이진민의 깊이 있는 사고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재밌기도 했지만, 거기에 내 생각을 덧붙이다보니 더더욱 즐거웠다.


미술을 살짝 곁들여 철학을 한껏 만끽해보는 즐거운 순간이 필요하다면, "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을 꼭 한 번 살펴보길 추천한다. 당신이 원하는 즐거운 지적 유희의 장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

알고 보면 가깝고, 가까울수록 즐거운 그림 속 철학 이야기


지은이: 이진민

출판사: 한겨레출판


분야: 인문, 철학, 교양철학, 예술, 미술, 교양미술

페이지: 292쪽


정가: 18,000원

ISBN: 979-11-6040-645-0 (03100)

 


 

 

[석미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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