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베를린 다다는 왜 부엌칼을 들게 되었나 (1) [미술/전시]

다다와 한나 회흐, <바이마르 공화국의 맥주배를 다다 부엌칼로 자르자>(1919-20)
글 입력 2021.09.27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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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회흐(Hannah Höch), (1889-1978)

 

 

“바이마르 공화국의 맥주배를 다다 부엌칼로 자르자.” 해당 슬로건은 독일 다다(Dada) 예술가 한나 회흐(Hannah Höch)의 작품 제목이다. 제목은 무언가 뚜렷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더 나아가 보는 이들이 자신의 메시지에 개입하기를 유도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맥주배는 무엇이며, 다다 부엌칼이라는 것은 또 무엇일까. 문장 안에는 다다 예술 운동의 정신과 한나 회흐의 가치관이 집약적으로 들어가 있다. 이번 글에서는 다다와 베를린 다다, 그리고 ‘한나 회흐’의 작품에 대해 두 편으로 나누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다다와 베를린 다다


 

- 다다(dada)

취리히에서 시작된 다다는 기본적으로 ‘반미술(anti-art)’을 주창했다. 1차 세계 대전의 발발 이후, 이성과 논리를 중시하는 문화는 더 이상 지지를 얻지 못했고 예술가들은 권위적이고 전통적인 미술의 형태에 저항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전쟁은 이들에게 허무주의에 빠질만 한 실마리를 마련해 주었고,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과 자본주의 등은 전쟁 발발에 대한 원인으로 자리잡았다. 기존에 인정받았던 미학적인 가치들을 전복하는 것 이상으로 파괴하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었으며, 당시 다다이즘은 출발지인 취리히뿐 아니라 베를린, 하노버, 파리 등으로 확산되고 다양한 방식으로 실현되는 양상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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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얀코(Marcel Janco), 마스크, 1919

 

 

취리히 다다의 마르셀 얀코가 제작한 마스크다. 얼핏 보면 어린 아이가 만들어낸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이 마스크는 의도적으로 기존의 ‘예술 작품’이라 할 만한 것들에 등장하지 않는 재료들을 채택하고 있다. 골판지와 노끈으로 만들어진 마스크가 정교하지 않은, 서툰 손길로 만든 듯 보이는 것 역시도 이들이 의도하고 있는 바다.

 

 

- 베를린 다다(Berlin dada)

베를린을 중심으로 전개된 독일 다다는 취리히에서 출발한 다다와는 사뭇 다른 결을 지닌다. 당시 독일은 민주주의의를 기반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을 내세웠지만 민주주의를 기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사회는 보수주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베를린 다다는 ‘반미술(anti-art)’에 초점을 두고 있었던 취리히와 다르게 정치적으로 처해 있었던 문제들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향으로 운동이 전개된다. 물론 기존의 미술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정치적인 메시지를 내세우고 행동하기를 독려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던 것이 베를린 다다의 특징이다.

 

 

 

베를린 다다와 한나 회흐


 

한나 회흐는 독일에서 활동한 다다 예술가다. 다다의 정신은 이성과 논리를 반대하고 전통적인 문화를 전복하려는 ‘진보적인’ 성격을 지녔지만, 그러한 다다 예술가들이라 할지라도 기존의 예술 운동과 사회 운동이 그래 왔던 것처럼 남성중심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베를린 다다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었던 하우스만은 여성을 동물에 비유해 말을 하지 못하고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존재로 위치시킨 뒤, 당시 독일에서 전개되었던 여성 운동에 노골적인 비판을 가한다. 동료 작가였던 그로츠 역시도 지성적인 여성을 거부하며 여성혐오적 태도를 보인 바 있다.

 

 

“30년 전, 독일에서 여성이 현대 작가로서 자신을 나타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대부분의 남성 동료들은 오랫동안 우리들을 매력적이고, 천성적인 아마추어로 취급하면서 우리들의 실제적인 전문가적 위상을 인정하지 않았다.”

 

- 한나 회흐 인터뷰 중

 

 

베를린 다다주의자들 중 유일한 여성이었던 회흐는 여성을 부수적인 존재로 여기고 남성 자신들보다 능력이 없는 존재로 여기는 것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또 목격했던 인물이었다.


같은 예술가로서 활동했지만 남성은 보다 완전한 존재로, 여성은 남성 예술가의 파트너이자 뮤즈와 같은 존재로서 자리하게 되는 것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한나 회흐 인터뷰가 또 한번 증명한다. 당시 회흐는 다다에 큰 기여를 했던 예술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다다이즘에 위치시키지 못했고, 스스로도 위축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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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개최된 제 1회 다다 국제 페어의 모습이다. 회흐, 하우스만, 그로츠 등의 작가들이 국제 페어에 참여해 자신의 작품을 내걸고 있다. 그러나 회흐가 처음부터 페어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그로츠와 하트필드가 회흐를 독립적인 작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회흐는 하우스만의 도움으로 페어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지만 다다 작가로서 인정받기 이전에 회흐가 독립적인 작가라는 사실조차 인정받지 못했던 이 사건은 당시 여성 예술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떠했는지를 증명한다. 또 동료 작가인 리히터가 회흐를 ‘착한 소녀’로 묘사했다던 일화 역시 마찬가지로 당시 여성 작가들의 위치를 말해 준다.


다다주의자들 내에서 작가들의 작품을 놓고 다다 정신과 부합하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논하는 것은 예술 운동을 전개했던 작가들에게 필수적인 관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회흐는 여성 작가라는 이유로 작품을 놓고 논하는 장에 들어서는 것부터 난관을 겪었다.


회흐가 온몸으로 경험한 위계라는 것은 회흐가 자신을 다다이즘에 위치시키기 어렵게 만들었고, 그녀의 작품 활동에 있어서도 여성주의적 목소리를 높이도록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제와 '선구적인' 시선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고 평가되는 회흐의 여성주의적 메시지는 어쩌면 이 시대에 낼 수밖에 없는 당연한 목소리였을지도 모른다.



* 다음 글에 이어서 포토몽타주 기법과 한나 회흐 작품 소개가 업로드 됩니다.

 

 

참고 문헌

김숙영, 「바이마르 시대 한나 회흐의 미술 - 분절과 괴리」

김정희, 「한나 회흐의 포토몽타주 작품에 관한 여성주의적 성찰」

 

 

[박이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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