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악기들의 독백과 대화 -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글 입력 2021.09.13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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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최종)_람메르무어의루치아.jpg


 

지난 9월 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관람했던 <2021 세종솔로이스츠의 힉앳눙크!>. 마치 퍼레이드처럼 순차적으로 다른 공연들이 펼쳐지고, 각 공연의 메인 프로그램이 일종의 타이틀 역할을 한다.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공연도 다시 4개의 굵직한 세부 프로그램으로 구성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공연장 좌석의 단차는 적절했고 시야 또한 쾌적했다. 이전에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다른 공연을 관람했을 때는 단차가 너무 적게 나있어 다른 관람객에 의해 시야가 차단되어 공연 관람에 다소 불편을 느꼈는데, 콘서트 홀은 체감 상 더 편안한 느낌이었다. 사진은 공연 티켓과 1층 D블록 13열의 시야. 실제로 체감되는 시야는 사진보다 더 가까웠다.

 

음악에 특별한 조예가 있다거나, 청음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도 아니며 클래식 공연 관람을 자주하는 사람은 못된다. 그럼에도 클래식 공연에 대한 대중으로서의 동경과 흥미가 있었다. 마이크와 사운드 장치로 가득한 기존의 익숙한 콘서트 공연과는 달리, 연주자들이 연주하는 악기와 소프라노에게서 나오는 목소리 만으로 공연장을 채우는 것이 당연한 클래식 공연인데도 무척 낯설고 놀랍게 느껴졌다. 공연을 모두 보고난 뒤 '다시 한번 듣고싶다'는 생각이 찾아옴을 느꼈다. 클래식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실제의 애호로 이어지는 의미있는 순간이었다.

 

 

Program


 
A. Vivaldi
Concerto for two violins in D minor

G. Bottesini
Grand Duo Concertante

O. Golijov
Last Round

- Intermission -

G. Donizetti
Selections from [Lucia di Lammermoor]
(arr. by David Chan)
 
 
 

1 비발디 -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라단조, RV. 514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라단조'는 비발디 협주곡의 훌륭한 모범이다. 1악장의 시작부터 두 바이올린 독주는 마치 선언하듯 시작하며 이후에는 자유롭게 풀어진 선율들로 대화를 주고 받는다. 협주곡이 아닌 실내악에 가까운 음향으로 시작하는 2악장에서 두 독주 바이올린은 슬픔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하강하는 선율로 감정을 표현한다.

 

독주 악기가 주고 받는 선율은 대립하는 것이 아닌, 아름다운 이중창에 가깝다. 그리고 과감하게 시작하는 춤곡풍의 3악장으로 이어진다. 이제 모든 슬픔은 지나가고 즐거움만이 남을 것이다. 하지만 라단조라는 조성의 쌉쌀함이 흥겨운 축제 끝자락에 묘한 여운을 남긴다.

 

글 윤무진│음악 칼럼니스트

 

 

공연의 첫 시작은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공연 전 프로그램 노트를 읽어보며 '마치 선언하듯 시작하며 이후에는 자유롭게 풀어진 선율들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아름다운 이중창'이라는 칼럼니스트의 표현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두 대의 바이올린이 번갈아가고 함께 연주하길 반복하는데, 그 주고받음을 들으며 탁월한 표현이었다는 공감이 들었다.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이기에 언뜻봐도 관록이 느껴지는 두 연주자들의 양 옆으로 날개처럼 펼쳐져 자리잡은 여러명의 연주자들이 함께 했다. 중심이 되는 두 연주자의 바이올린 색깔의 톤도 음색의 톤도 묘하게 달라 같은 악기임에도 닮고도 다른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마냥 밝은 음악은 아니었지만, 슬픔이 지나가고 즐거움이 남는다-는 표현이 걸맞게 경쾌하게 그어지는 연주자들의 동작마다 무척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공연이 끝나고 두 연주자가 서로를 끌어안고 함께 인사하는 모습을 보며 이 날의 공연을 위해 얼마나 많은 합을 맞춰봤을까 여운이 남았다.

 

 


2 보테시니 - 그랑듀오 콘체르탄테



 

바이올린과 더블 베이스를 위한 그랑 듀오 콘체르탄테는 보테시니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처음에는 두 대의 더블베이스를 위한 작품으로 작곡했으나 훗날 하나의 베이스 파트를 바이올린 파트로 편곡하였다. 그 이유는 당대 최고의 비르투오소였던 보테시니가 베이스의 한계를 뛰어넘는 놀라운 기교를 필요로하는 곡을 작곡하였지만 보테시니와 동등한 연주 역량을 발휘하여 독주 파트를 연주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보테시니는 이 작품을 당대의 유명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비외탕, 비니아우스키 등과 함께 연주했는데, 당시의 비평가는 "이 거대한 현악기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은 보테시니의 연주를 들어야만 발견 될 수 있다.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 경쾌하고 민첩한 표현과 우아함은 파가니니의 작품을 연상케 한다.

 

이 곡은 바이올린과 베이스 독주자들에게 최고의 기교를 요하는 작품으로 이탈리아 오페라풍 노래와 유머로 청중들을 사로잡는다"고 평했다.

 

 

바이올린 연주자 한 명과 더블베이스 연주자 한 명을 중심으로 또 다른 구성의 협주가 시작되었다. 조금 부끄럽지만 학창시절 이후로는 클래식 악기의 이름을 새겨볼 기회가 거의 없었기에 노트에 적힌 '더블베이스'라는 말을 보고 '이게 무슨 악기지?' 생각했다. 유난히 큼직한 악기와 낮은 음을 듣고 콘트라베이스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첼로가 작아보일만큼 거대한 악기의 풍채가 흥미로웠다.

 

클래식으로 접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경로로 콘트라베이스 연주를 듣는 것에 관심이 가득 차있던 차라 반가운 악기였다. 현을 연주하는 손이 무척 바빠 '파가니니의 작품을 연상케 한다'던 표현이 이런 것이었구나 싶었다.

 

편곡 전의 느낌처럼 두 대의 더블베이스가 연주했더라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지만, 높은 바이올린 음과 낮은 콘트라베이스 음이 합쳐진 것이 좋았다. 음악에 대해 조예가 깊어 좀더 풍부한 표현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보고 느낀 바에 비해 납작한 표현을 하게 되는 것이 내내 아쉽다. 그만큼 흥미롭게 본 무대였다.

 

 

 

3 골리호브 - 마지막 라운드


 

 

골리호브의 "마지막 라운드" 원작은 두 개의 현악 사중주단과 더블베이스를 위한 작품이며, 2000년에는 세이지 오자와가 이끄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의해 현악 오케스트라 버전 초연이 이루어졌다. 골리호브는 이 작품을 아르헨티나의 위대한 탱고 작곡가 아스토르 피아졸라에게 헌정하였다. 그는 10세에 플라타에서 피아졸라의 연주에 깊은 감명을 받고 반도네온 연주에 응축된 탱고 본연의 속성에 매료되었다.

 

…1악장은 격렬한 악기의 움직임을 담았고 2악장은 끝없는 들숨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마지막 라운드"는 승화된 탱고라고 하겠다. 두 현악 사중주는 바이올린과 비올라 파트가 마치 전통적인 탱고 밴드처럼 연주하면서도 더블베이스의 리드로 서로 대립적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탱고 안무에서 서로의 다리가 엇갈리듯 악기의 활은 공중을 가로지르는데 이는 아찔하면서도 일정한 춤사위의 간격을 유지해 열정을 순수한 형식미로 표현하는 탱고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다.

 

글 제인 비알 제피(Jane Vial Jaffe) │ 번역 박지은

 

 

가장 마음에 들었던 무대였다. 협주 때마다 자꾸만 눈이 가던 인상적인 콘트라베이스 연주자가 중심축의 역할을 했는데, 이 공연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나 강하게 들었다. 이렇게 좋은 곡이, 이들이 연주해주지 않으면 다신 어디서도 들을 수 없다니! 더블베이스 소리도 무척 좋았지만, '탱고에 대한 찬사','공중을 가로지르는 활'라는 말에 걸맞게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를 중심으로 양쪽에 버티고 선 바이올린 연주자들의 활이 펜싱칼처럼 보였다.

 

어떤 공연에서는 그들의 활이 악기에 가깝게 눕혀지는 모습이 주되었는데, 이 '마지막 라운드'에서는 클라이맥스 그 자체처럼 활 끝이 계속해서 천장을 향해 치솟았다. 바이올린 연주자가 한 두명이 아니었기에 모두의 활 끝이 천장을 향할 때마다 어쩐지 무척 펜싱선수나 영국 근위병의 모습 같다는 연상이 들었던.

 

정말 다시 듣고 싶었다. 혹시라도 공개적인 경로나 무대 영상이 남아있는지 궁금해서 집에 돌아와 한참 검색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이 곡을 들으면서 '나 클래식 좋아하는구나!'라고 깨달았다. 공연장을 나오는 그 순간부터 휘발되어 듣고 또 듣고 싶은데 기억에서 흩어졌다는 것이 너무 아쉽다. 무척 둔탁하고도 텁텁한 콘트라베이스 특유의 낮은 소리가 내게는 묵직한 매력으로 느껴져 이 악기의 독주로만 구성된 공연 같은 건 없는걸까? 궁금해졌다. 이런 악기 소리를 좋아하고, 이런 농염하고 짙은 무드로 진행되는 곡들을 선호한다는 걸 알게 되어 클래식 공연장에서 상상도 못했던 취향 발견을 했다. 글을 적는 이 순간에도 또 보고, 또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꼭 다시 들을 수 있길!

 

 

 

4 도니체티 -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arranged by. 데이비드 챈)


 

 

1835년 9월 26일 산 카를로 극장에서 초연된 작품은 도니체티의 대표작이라는 지위를 차지하며 이후에도 오페라 극장 무대에 꾸준히 오르는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이번에 세종솔로이스츠가 준비한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는 소프라노 캐슬린 킴과의 협연을 위한, 루치아의 단독 무대로 이루어지는 오페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가 핵심인 오페라의 기본 구조를 흩트릴 수는 없다.

 

바이올리니스트 데이비드 챈은 특별히 이번 공연을 위해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세종솔로이스츠와 캐슬린 킴을 위한 편곡을 도맡았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악장으로 20년 넘게 활약한 경험, 그리고 새롭게 시작한 지휘자로서의 경험을 모두 녹여낸 챈의 편곡은 보다 간소화된 음악적 상황에서도 충분한 이해가 가능하게 인도한다.

 

…루치아가 감내해야 할, 수많은 고난도 페시지가 광란 그 자체이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도니체티가 활동하던 시절 바이올린 연주로 악마적인 명성을 얻던 니콜로 파가니니를 떠올려보면 좋겠다. 그의 연주를 듣고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이들을 본 도니체티는 루치아에게 초절기교라는 고통을 가한다. 그리고 그 고통은 끝내 초고음역대의 E♭음으로 표현되어 광기의 절정을 찍는다. 작곡가가 남긴 음표를 성악가가 훌륭하게 처리했을 때, 청중은 비로소 루치아가 완전히 미쳤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글 윤무진│음악 칼럼니스트

 

 

'초고음역대의 E♭'가 얼마나 높은 음인지 잘 몰라, '초절기교'라는 표현을 보고 대체 어떻기에? 싶었다.

 

이번 공연의 메인 무대였던 람메르무어 루치아의 세종솔로이스츠를 위한 편곡은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가 함께하는 악장 - 소프라노가 잠시 빠지고 오케스트라의 합주로만 이루어진 악장 - 다시 모두가 함께하는 클라이맥스로 이루어져있는데, 이 설명은 그 중에서도 마지막 클라이맥스 부분을 위해 적힌 것이었구나 싶었다. 소프라노의 초고음에 기립박수를 치는 관객들도 보였고, 캐서린 킴 소프라노의 무대를 실제로 보며 처음으로 오페라에서 압도감을 느꼈다. 오페라 공연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어쩐지 조금 뮤지컬을 볼 때의 감상을 받았었다. 소프라노의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는 무대였고, 나 스스로 음악에 조예가 깊지 않아 무척 위축된 상태로 감상을 하는 편임에도 소프라노가 이끄는 곡의 분위기를 따라가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공연을 모두 보고, 클래식이 주는 감동과 전율은 여타의 공연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미술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무용이나 체육, 음악 등 나와 다른 예술을 하는 이들에 대한 진지한 공감과 동경이 늘 마음 속에 있는데, 이번 힉앳눙크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모든 프로그램에서 2시간 가량의 무대를 위해 최소 20년 가까이 노력해왔을 연주자들과 소프라노의 프로페셔널이 느껴졌다.

 

단순한 감동이라기보다 감정적 '고양'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순수 예술이란 이런 부분에서 가치를 갖는다는 확신이 생겼다. 프로그램 노트가 적힌 팜플렛 중 '한 악기를 오랫동안 연주한 연주자는 그 악기와 닮아간다는 말이 있다.'는 문장이 있었는데, 이번 세종솔로이스츠의 공연을 보며 대중의 입장으로서는 충분한 고양을 체감했고, 또 다른 결의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이들처럼 평생을 다걸고 한 명의 예술가로 서있는 자리를 나 또한 갖고 싶다는 열망도 들었다.

 

무엇보다도 이 공연 이후로 클래식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생겨, '고리타분한 클래식'이라 생각하고 멀리했던 고전음악들에서 또 다른 '취향저격' 음악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삶에 예술로서 파동을 만드는 것, 사실 그거 하나면 '좋은 공연'으로서의 역할은 이미 넘치도록 충분했던 것이 아닐까.

 

 

[지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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