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예술로 산책] #4. 다양한 얼굴이 숨쉬는 거리, 연남동(1)

작은 연필 가게, 흑심에서 연남동의 차분하고 경쾌한 얼굴을 마주하다
글 입력 2021.09.11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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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예술로 산책》은 매달 격주로 기고되는 예술 에세이입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쳐서 좋았던 일상 속 예술 조각 또는 흔적을 보고 느끼며 열렬히 사유한 것들을 지극히 사적인 시선으로 이야기합니다.

 

*감상 포인트: 계획된 산책로는 없습니다. 정해진 목적지도 없습니다. 뜬금없이 걷기 시작할 수도,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잠시 발걸음을 멈추기도, 도중에 지쳐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prologue

 

며칠 전, 블로그 이웃님의 인스타를 우연히 보게 됐다. 연남동의 한 작은 가게였는데 취향 저격이었다. 슬며시 '보관' 버튼을 누르고선 다짐했다. 여긴 꼭 가야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며칠간 비가 계속 내렸다. 거기다 변덕스러운 날씨를 탓할 게 아닌 몸까지 말썽이었다.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 몸 때문에 며칠을 누워서 생활하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움직이긴 글렀다 싶었다. 그 와중에 바스락거리는 이불 위에 누워서도 마음에 쏙 들었던 분위기 좋은 그곳이 내내 아른거렸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날씨도 몸도 좋아지기만을 벼르고 있다가 그날 아침 창문의 창살 사이로 비친 햇빛에 이때다 싶었다. 오늘이 기회구나. 그렇게 고대하던 연남동 나들이를 시작했다.

 

이번 산책길에서는 특별히 처음에 갈 목적지를 정해 두었다. 며칠 전부터 마음에 들었던 그곳.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나의 산책길은 어떻게 펼쳐질지 모른다. 이번에는 좋은 날씨가 마음에 들었던지, 연남동의 모습이 더 궁금했던 것인지, 유독 부지런하고 자유롭게 걸었다. 걷다 보니 산책길이 조금 길어졌다. 연남동의 시작점인 홍대입구역부터 끝 지점인 가좌역 근처까지 아주 오래 걸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1,2편을 나누어 연남동의 다양한 얼굴을 소개하려 한다.

 

그럼 다시 뚜벅. 오랜만에 경쾌한 발걸음을 옮겼다.

 

*
 

Episode #4. 연남동에는 다양한 얼굴이 숨 쉰다

 
 

연남동.jpg

 

 

연남동은 홍대입구역 3번 출구부터 시작된다. 눈앞에 펼쳐진 가로수길, 철길, 양쪽으로 즐비한 다양한 가게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 평소 같으면 길을 따라 걸었을 테지만 오늘은 분명한 목적지가 있으니 살짝 방향을 틀어 걸었다.

 

목적지를 찍고선 카카오 맵이 알려주는 길을 따라 동진시장 쪽으로 향했다. 예전에도 엄마와, 친구와, 나 홀로 걸었던 거리였지만 오늘은 새삼 다른 느낌이었다. 평소에는 복작했던 골목 거리가 오늘은 적적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여유롭게 골목 사이를 비집고 걸어 다닐 수 있었다. 좁디좁은 골목길의 끝과 끝을 발자국으로 찍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건 뭘까 저건 뭘까 하면서 기웃거려도 보고 사람 하나 없는 건물 자체, 거리 자체의 사진도 많이 찍었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건물벽에 그려진 벽화가 보였고, 알게 모르게 신경 쓴 가게들의 섬세한 인테리어와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눈에 띄었다. 아, 좋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유로움에 아주 짧은 탄식과 함께 기분 좋은 콧바람을 킁 내뱉었다.

 

계속 걸었다. 그러다 드문드문 지나다니는 사람들에 주목했다. 신기하게 모두가 같은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분명 길을 걷고 있지만 눈은 휴대폰 화면을 쫓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 하늘 위에서 바라본 연남동 거리의 모습은 휴대폰의 검은 직사각형과 사람 머리의 검은 동그라미가 둥둥 떠다니는 모습일까, 그런 뜬금없는 상상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한편으로는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모를, 미로 같은 연남동 골목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정해둔 맛집을 찾아가기 위해서라면 연남동 골목 거리에서 휴대폰 화면 속 지도는 거의 동반자나 다름이 없다. 나처럼 목적 없이 걷는 산책자면 모를까.


상점 구경, 사람 구경을 하다 도착한 동진 시장. 지나가는 길에 한번 들를까 했지만 아쉽게도 오늘의 동진시장은 어둑어둑했다. 일전에 웁쓰양 전시를 열릴 때만 하더라도 그 옆에 플리마켓도 화려하게 열고 나름 활기를 띠는 거리였는데 오늘은 굳게 문을 닫아 주변 거리마저 썰렁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동진시장을 지나쳐 큰 길가로 나왔다. 그리고 그대로 눈앞에 보이는 횡단보도 하나를 건넜다. 뚜벅. 직진해서 조금 더 걸으니 작지만 눈에 띄는 녹색 팻말이 보였다. 그리고 중앙에는 연필 모양의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었다. 그와 함께 쓰인 문구, BLACK HEART PENCIL SH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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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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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조각 01 작은 연필 정원, 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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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문이 굉장히 특이했다. 상점 같은 분위기가 아닌 일반 집문의 모습이라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됨을 초인종 벨 대신 그 위에 쓰인 친절한 문구가 대신 말해주었다. '흑심은 열려 있어요 안으로 들어오세요.' 그 말에 안심하고 손잡이를 힘껏 당겨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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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컥. 놀랍게도 눈앞에 펼쳐진 것은 쭉 뻗은 긴 복도였다. 그리고 그 끝에 서 있는 대왕 연필이 흑심 공간의 시작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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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서자마자 연필 특유의 나무 향과 거뭇하고 풋풋한 연필심 냄새가 진득하게 풍겼다. 공간은 아기자기했지만 초록색을 메인 색으로 하고 갈색 나무톤의 가구를 배치하여 특유의 안정감을 선사했다. 한눈에 들어온 가게 전경을 담아보니 굉장히 다채로웠다. 그만큼 연필을 감싸고 있는 색과 디자인이 다양했다. 시각적으로 눈에 띄었던 부분은 이곳저곳 꽂혀있거나 뉘어있는 원형의 연필과, 그 연필을 보관했지만 지금은 차곡차곡 쌓여있는 사각형의 종이 상자였다. 그리고 꽤나 잘 정돈된 문구들은 오히려 경쾌한 느낌이 들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전 세계적인 빈티지 연필뿐만 아니라, 지우개와 연필깎이 등과 같은 다른 문구류도 동시에 진열하여 판매하고 있었다. 빈티지가 가지는 무드 덕분인지 공간 자체가 마치 오랜 시간 아주 잘 가꾼 문구 정원 같아 멋스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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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진열된 연필들을 직접 손으로 쥐어서 쓰고 그려보면서 마음껏 필기감을 느껴볼 수 있다. 신기하게도 연필의 검은색 심이 종이 위에 마찰되어 쓸리는 느낌이 모두 다르게 느껴졌다. 희끗한, 삐걱거리는, 부드럽지만 경쾌한, 뚝뚝 끊기는, 넓적한, 둥글둥글한 등 저마다 다른 수식어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라 흥미로웠다. 무언가를 쓰는 재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다양한 연필들을 써 보며 알았다. 세상에 연필의 종류가 이렇게나 많단 말이야. 어떻게 느낌도 소리도 모양도 다 다를 수 있는 걸까 궁금했다.

 

연필에 대한 설명이 담긴 작은 종이에 따르면, 연필심은 흑연과 점토를 혼합해서 만드는데, 흑연과 점토의 비율에 따라 연필심의 강도와 진하기가 달라지며 흑연의 비율이 높을수록 연필심도 굵어진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사용 목적에 따라 혼합 비율을 달리해서 제작할 경우, 연필의 종류는 다양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늘 아래 같은 연필은 없다는 말이 여기에 쓰일 줄이야. 새삼 제각각 고유의 매력을 가진 연필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것저것 써 보다 마음에 드는 연필을 발견했다. Lyra Groove Jumbo Penc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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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산이고 경도는 B이다. 설명에 따르면, 예술성 있는 디자인으로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여러 해 수상한 연필이다. 옆면에 파여져 있는 홈이 특징적이다. 처음에는 뻥뻥 규칙적으로 뚫린 홈에서 연필의 누르스름한 본체가 그대로 드러나는 게 희한하다 느껴졌다.

 

하지만 사용 시 뛰어난 그립감을 자랑한다는 점에서 실용적이다. 실제로 손가락으로 연필을 쥘 때 자연스럽게 파여진 홈이 적당한 지렛대 역할을 해 주듯 안정감 있게 느껴졌다. 어느 정도 그립감이 느껴지는 굵기와 적당한 사각거림, 그리고 독특한 디자인까지 볼수록 써볼수록 매력적인 연필이라 소장하기로 했다.

 

계산 시에 가게 매니저분이 설명해 주시기를, 해당 연필 자체가 두께감이 있고 연필심 또한 세모 모양으로 굵직하기 때문에 쓰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나 필압(펜에 주는 압력)이 약한 사람들이 주로 사용한다고 한다. 비록 사용 목적과는 다른 이유로 구매하였지만 요즘 나는 이 연필을 책을 읽을 때 밑줄을 긋는 용도로 잘 쓰고 있다.

 

한편, 연필로만 가득할 것 같은 이 공간에도 책이 꽂혀있었다. 제목은 <여전히 연필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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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나처럼 연필로 쓰기에 진심인 다양한 젊은 창작자들의 이야기가, 그리고 연필에 관한 그들의 예찬이 담겨있었다. 짧게 훑어 읽은 책에서 가장 공감 갔던 구절 하나를 덧붙여본다.

 

진짜 비밀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반드시 연필로 쓴다. 그것이 연필의 매력임을 알려주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듯하고 뾰족하게 깎인 연필심이 종이와 맞닿는 순간 나도 모르게 한자 한자 정성껏 눌러 쓰게 되는 것. 동시에 연필의 사각거리는 소리에 조용히 사색에 빠져드는 것. 그래서 진짜 하고 싶은 속 이야기는 연필 끝에서 펼쳐지는 것까지. 연필로 인해 쓰는 경험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순간, 연필의 진짜 매력이 거뭇한 연필심 끝에 듬뿍 묻어 나온다.


그 매력까지 푹 느끼고 나서야 흑심을 떠났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 흑심에서의 여정 끝에 마주한 연남동의 얼굴은 차분하지만 동시에 경쾌했다.

 

 

마지막.jpg

 

 

(이어서 계속)

 
 
 

아트인사이트 신송희 컬쳐리스트.jpg

 

 

[신송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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