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출발의 문턱에서, 다시 느슨해지기 [영화]

영화 <걷기왕>(2016)
글 입력 2021.09.06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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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놀고 먹는 게 좋아. 매일 놀고 먹다가 가끔 일 들어오면 그거 해 주고. 누가 나한테 1억 넣어 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일 년만 살고 싶다.

개강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는 것조차 금기로 통하는 늦여름에는 초조한 마음을 숨기고서 한가롭게 놀고 먹기나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놀고 먹는 게 좋다는 말에 완전히 동의하지 못하다 느슨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놀고 먹어도 될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커졌던 순간이었다.

쉬는 방법을 모르고 제대로 노는 방법은 더 모르게 되는 시대. 느슨해지기보다는 팽팽해지기를, 적당히 노력하기보다는 나를 갈아 넣는 것을 스스로에게 바라고 또 더 나은 것으로 바라보는 시대. 그런 시대를 관통해 오던 어떤 날에는 문득 내가 힘을 빼는 방법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을 시작할 때는 힘 빼는 게 제일 어려운데, 그게 제일 중요하대. 힘을 빼는 방법을 모르고 더 나은 결과물을 내기 위해 골몰하던 순간에 들었던 말이다. 힘 빼고 싶다, 힘 빼고 싶다. 힘 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또 하다 보면 힘이 더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긴장 상태가 지겨워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아아, 힘 빼고 싶다.

힘을 빼기 위한 여러 시도들의 결과부터 말하자면 나는 힘을 빼지 못했다. 정신을 놓고 산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 때 불쾌함을 느끼고 포기했다는 이유만으로 불안해지는 것을 두고 힘이 빠졌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불쾌와 불안의 순간에 떠올리면 그나마 마음이 나아지는 것들을 찾아 다녔다.
 
 

<걷기왕>,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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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번에도 영화 이야기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일과 건져내지 못한 메시지들을 찾기 위해 영화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평생 갈 버릇일 것이다. 이 시기에는 힘 들어가지 않은 모든 것을 접하고 싶었기 때문에 힘 들어가지 않은 ‘척’하는 영화, 그러니까 느슨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B급 영화들을 골라서 보았다.

그러던 중 만난 <걷기왕>에는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경보에 도전하는 만복이가 나온다. 대중 교통을 타지 못하는 만복이는 매일매일 도보로 등교하고 그 거리는 왕복 네 시간이나 된다. 매일 네 시간을 걸어 등하교 하는 만복이는 열정이라든지 야망이라든지 하는 단어들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며 무엇이든 적당히 하고 싶어한다.

선생님은 만복이의 재능을 ‘발굴’해 주고 코치는 더 노력하라는 말로 선수들을 벼랑 끝으로 몬다. 익히 알고 있는 스포츠 서사에 의하면 만복이는 자꾸만 나태해지는 자신을 극복하고 1등을 쟁취해 선생님들의 자랑이, 가족들의 자랑이, 출생지의 자랑이 되었겠지만 만복의 이야기는 그런 방식으로 흘러가지 않고 그래서 편안했다.

자신이 극복하지 못하는 것에 균열을 내어 ‘더 나은 자신’이 되는 일에는 모난 구석이 없지만 그런 내가 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주 다친다. 경기에 나간 만복은 마지막 순간에 더 걷지 않고 이 자리에서 ‘포기 선언’을 하지만 그 포기는 힘을 빼야만 하는 순간에 했던 선택이었기 때문에 만복은 다치지 않았다.

만복 같은 선택을 하지 못하고 닿는 데까지 자신을 몰아 붙였다가 나가 떨어지고 마는 상태를 자주 겪게 되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이 영화는, 만복의 이야기는 호소력을 갖는다. 만복의 포기는 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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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왕>에서 만복의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 역시도 영화의 가치관과 함께 간다. 자칫하면 무겁고 뻔해 보일 수 있는 메시지지만, 천천히 걸어서도 빨리 뛰어서도 안 되는 경보처럼 영화는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그러한 지점에서 더욱 훌륭한 영화가 된다.

영화에서 중간중간 관객들이 힘을 뺄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장치는 만복의 서사뿐만이 아니다. 영화는 B급 영화에 걸맞는 귀엽고 통통 튀는 개그 코드들을 숨겨 놓았고 이로 인해 감독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무게를 던다.

진지한 순간에 흘러 나오는 타이타닉 리코더 소리라든지, 캐릭터들의 엽기적인 설정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따라 가는 재미를 느끼다 보면 깨닫게 되는 것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에 있어서 ‘무게 잡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편으로 <걷기왕>은 ‘교훈적인’ 메시지를 전달해 준 영화이기도 했지만 굳이 그 메시지를 찾으려 하지 않아도 괜찮은 영화이기도 했다. 보는 과정에서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되었고 또 그런 상태에서 가장 잘 와닿는다는 것은 이 영화가 가진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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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긴장한 얼굴로 불쾌와 불안을 느끼는 나는 다시 놀고 먹는 게 좋다는 말과 적당히 노력하며 살고 싶어하는 만복이를 떠올린다. 할 수 있을 때까지 나를 거세게 몰아붙이다가 어느 순간 궤도를 이탈하고야 마는 것을 번아웃이라는 간단한 단어로 설명해 버리는 것은 그 자체로 힘 빠진 사람을 더 힘 빠지게 만들고 어떤 도움도 주지 않는다.

번아웃은 그만큼 노력해 왔다는 증거라는 말도 위로가 되어 주지 못하는 현실에서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느슨하게 살아가기 위한 전략이다. 내가 가진 시간들 속에서 전략들을 찾아 나간다면 적당한 속도로 왕복 네 시간의 통학을 했던 만복이처럼, 오래오래 나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박이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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