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허무하지 않은 삶 [영화]

영화 '팜 스프링스'
글 입력 2021.09.03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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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팜 스프링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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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타임 루프에 갇히게 된다면 어떨까? ‘해피데스데이’, ‘엣지 오브 투모로우’, ‘소스 코드’, 그리고 ‘사랑의 블랙홀’까지, 타임 루프를 나름대로 해석해 낸 영화는 많다. 설정 자체가 가진 매력 탓에 이미 흔해져 버린 이야기기도 하다.

 

영화 ‘팜 스프링스’ 역시 기존의 타임 루프 영화들이 가지고 있었던 설정을 거의 그대로 차용했지만, 플롯 곳곳을 참신하게 비틀었다.

 

‘나일스’는 여자친구인 ‘미스티’를 따라 ‘탈라’의 결혼식에 왔다가 우연히 타임 루프에 갇힌다. 탈라의 언니인 ‘사라’는 나일스를 뒤따라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가 타임 루프에 갇히게 되고, 둘은 함께 11월 9일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나일스는 이미 오래전에 타임 루프에 갇혀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은 완전히 버린 상태였다. 그러나 사라가 나일스와 함께 경험을 공유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삶은 전환점을 맞는다. 이상한 타투를 하고, 술집에서 난동을 부리며, 비행기를 훔쳐 타기도 한다. 나일스가 해보지 않은 일은 없었지만, 이제는 같이 할 누군가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행복은 사라가 타임 루프의 공허함을 자각하면서 깨지고 만다. 사라와 나일스가 처음으로 잠자리를 가진 다음 아침, 사라가 그동안 탈라의 예비 신랑인 ‘에이브’의 침대에서 깨어났음이 드러난다. 사라는 11월 8일 밤 에이브와 잠자리를 했고, 그대로 타임 루프에 갇히면서 날마다 동생의 약혼자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죄책감을 느껴야 했던 것이다. 사라와 나일스의 모든 행동은 현실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했지만, 에이브와의 불륜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사라가 아무리 지우고싶어해도 타임 루프처럼 되돌리거나 ‘리셋’할 수 없었다.

 

그때, ‘로이’가 나타난다. 그는 나일스와 함께 술을 마셨다가 타임 루프에 들어온 인물로, 자신이 여기에 갇힌 원인이 나일스에게 있다고 여겨 가끔(1~2주에 한 번 정도) 그를 죽이러 찾아온다. 둘 다 죽음은 타임 루프를 리셋할 뿐, 서로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로이는 복수심에 매번 그를 죽인다.

 

나일스는 그동안 자신을 죽이려 드는 로이를 굳이 막지 않았다. 로이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생각해서이기도 하지만, 조금 귀찮을 뿐이지 어차피 죽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라는 로이를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은 결국 다투고, 그 과정에서 나일스의 거짓말이 들통난다. 사라가 타임 루프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여러 번 사라와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만 것이다.

 

사라는 자신이 타임 루프에 들어오기 전에는 나일스와의 관계를 전혀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자신의 행동이 타임 루프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깨닫는다. 둘이 아무리 매일을 재밌게 보내도, 루프가 깨지면 남는 것은 없었다. 사라는 나일스의 곁을 떠나 매일 나일스가 자신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간다. 시간이 꽤 흐른 어느 날 아침, 사라는 그동안 직접 공부하고 가설을 세워 고안해낸 ‘타임 루프 탈출 계획’을 가지고 나일스를 찾아와 함께 탈출할 것을 제안한다.

 

이 장면들을 보며 두 캐릭터의 차이를 극명하게 느꼈다. 나일스는 루프 이전에 자신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기억조차 못 할 정도로 오랜 시간 갇혀 있었지만 탈출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고, 결국 그곳에 순응했다. 로이를 대하는 태도도 비슷하다. 설득하거나 대항하지 않고 그저 놔두는 것이다. 나일스는 타임 루프의 허무함을 알았으나 이에 절망할 수 없었다. 대신 무관심과 염세적인 태도로 무장한다. 적어도 사라가 타임 루프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사라는 달랐다. 사라는 나일스처럼 '루프 안에 있든, 현실에 있든 삶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며 살 수 없었다. 사라 또한 공허함을 느끼지만, 나일스와 달리 이에 깊이 절망한다. 둘 다 '삶은 허무하다'고 외치지만 다르게 들리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나일스는 그동안 사라를 향한 사랑을 깨닫고 이를 고백하지만, 같이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타임 루프에 함께 머무르기를 원한다. 탈출에 실패해 그대로 죽어버리거나 다른 차원으로 가는 것보다 차라리 사랑하는 누군가와 영원히 같은 시간에 갇혀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라는 나일스를 더 설득하지 않고 그대로 혼자 탈출을 시도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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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시간을 영원히 반복해서 산다는 가정이 분명 우리 안의 무언가를 끌어내는 것 같기는 하다. 현대의 인간은 이미 비슷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고, ‘똑같은 매일을 탈피하는 것’은 굳이 타임 루프에 갇히지 않더라도 모두가 가져볼 법한 열망이다. 타임 루프는 ‘똑같은 매일을 탈피’하면서, 즉 ‘내일이 없는 듯한 삶’을 그대로 실현하면서, 책임감은 없앤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영화 속 인물들은 타임 루프를 기회 삼아 우리가 꿈꾸는 삶을 산다. 멍청한 짓을 하고, 마음껏 즐기고, 그 안에서 안식을 찾는다.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인 세상에서 날짜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행동을 하든 전부 리셋되므로 책임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무런 결말이 없는 삶에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가정은 꽤 매력적이다. 그러나 인간은 시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행복하고, 또 불행한 존재다. 우리가 정말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에겐 필연적으로 내일이 찾아온다.

 

영화는 무모하고 거침없는 두 주인공을 통해 사람들에게 대리 만족을 선사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나일스는 가장 오래전에 타임 루프에 들어와, 삶에 대한 회의와 허무로 가득 찬 인물이다. 너무 오래되어 탈출할 의욕도, 용기도 잃어버렸다. 반면 사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하고, 결국 그 방법을 찾아낸다. 두 사람이 타임 루프 속의 시간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마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를 보는 것 같다.

 

결말에서 결국 세 사람(나일스, 사라, 그리고 로이)은 사라의 방법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물론 우리가 모두 반복되는 삶을 벗어나기 위해 사라처럼 죽기 살기로 노력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라가 그토록 필사적이었던 이유는 다른 두 인물과 달리, 사라는 타임 루프의 허무함과 공허함을 직시했기 때문이다. 루프에 갇힌 한, 그가 어떤 짓을 해도 이전에 내린 결정을 책임질 수는 없었다. 매번 사과하고 고백을 하더라도, 루프가 다시 시작되면 여전히 그의 여동생은 아무것도 모른 채 약혼자와 결혼할 것이다.

 

나일스와 로이 모두, 사라가 루프에 들어오기 전에는 자신 앞에 주어진 삶을 직면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라를 통해 둘은 루프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자신의 결정을 책임지는 하루를 보내기 시작한다. 나일스는 죽음을 무릅쓰고 사라와 함께 탈출을 시도하고, 로이는 사라를 만난 뒤 관점을 바꿔 주어진 하루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 시작하면서 나일스를 죽이는 일을 그만둔다.

 

사라의 행동과 결정은 ‘무엇이 삶을 삶답게 만드는지’에 대해 나름의 해답을 제시한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짜릿함을 선사하는 이유는 멀리 놓인 책임감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국 이런 삶의 방식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쾌락은 한정적일 것이다. 우리는 어찌 됐든 흐르는 시간을 붙들고 살아가야만 한다. 결정에 대한 책임을 미룰 수는 있지만, 영원히 외면할 수는 없다. 이 외면은 삶의 굴레를 벗어나게 돕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과거에 가둘 것이다.

 

과거를 다시 살 수는 없어도, 책임을 지고 그 결과를 직면하는 것은 현재의 내가 할 수 있다. 물론 삶이 허무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고, 이는 현대를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회의이다. 하지만 그 허무함을 채우기 위해 찰나의 쾌락만을 찾는 것은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 키르케고르가 말했듯, 우리가 우리의 삶이 허무에 뒤덮이고 있음을 안타까워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더 있지만, 이미 글이 많이 길어졌으니 나머지는 영화를 통해 직접 느껴보는 것을 추천한다. 가벼운 영화를 두고 지나치게 무거운 생각을 한 것 같기는 해도, 어쨌든 내 의견은 그렇다.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를 찾는 사람, 색다른 SF 영화를 보고 싶은 사람, 그리고 철학적 사유가 필요한 사람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신선한 작품이다. 쨍하고 청량한 영화, ‘팜 스프링스’와 함께 여름의 끝자락을 함께해도 좋을 것 같다.


 

[이고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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