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다음이라는 환상 [사람]

글 입력 2021.09.01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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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 가까울 정도로 오래된 친구가 반가운 연락을 했다. 취업을 해서 월급을 받았다며 밥을 사겠다는 것이었다. 고마운 마음을 전하겠다며. 오랜만에, 좋은 소식으로 만나서 기분이 좋게 나왔다. 하지만 그런 친구에게 모질게도 오늘이 마지막이고 다음부턴 만나지 말자고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걸 더 이상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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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나오라고 연락이 온 시점은 이미 약속 시간이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언제쯤 도착할 것 같냐는 질문에 15분 늦을 것 같다던 말이 무색하게, 30분이 되어가도 보이지 않았다. 30분엔 도착할 수 있겠냐는 말에 이제 5분 후면 도착한다고 하더니, 결국은 40분을 기다리고 말았다. 차라리 그만큼 늦은 게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기다리면서 불쑥 올라왔던 화도 그 정도 시간이면 이상하게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날씨가 좋았다. 시원하던 바람을 뒤로하고 따뜻하게 햇볕이 나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을 건너고 옆을 스쳐갔다. 시간이 너무 더디게 흐른 것도 아니었지만, 곁에서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모여 시간을 보내러 가고 있었다. 나보다 조금 늦게 기다리던 사람들은 제시간에 오라더니 자기가 제일 늦는다며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셋이면 차라리 나을 수도 있다. 그렇게 둘이라도 먼저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까. 물론, 둘이든 셋이든 누군가를 기다리게 하는 게 당연한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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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을 하기에 답을 해줬다. 차가 없어서 그렇다기에 이건 교통수단의 문제는 아니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과 약속에서는 그 사람들이 더 늦으며 오히려 본인이 기다리는 쪽이라 하길래, 다른 사람들과 나는 별개다. 오늘 약속을 다른 사람들과 한 게 아니니까. 그냥 미안하다는 말이면 짧게도 충분했을 일이, 변명을 하니 소득도 없이 길어졌다. 그 변명에 더 실망하기도 했다. 결국, 그 모든 말의 전제에는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이 숨어있는 게 느껴졌다.


면접처럼 2시간을 일찍 나와서 준비해서 기다리겠다는 말도 의미는 없었다. 면접은 늦은 적이 없었다면서. 약속은 면접보다는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약속은 돈을 쓰고, 면접은 합격하면 돈을 받게 될 테니까. 약속은 개인적이고, 면접은 공적인 일이니까. 30분~1시간 정도만 여유 있게 준비해서 나와도 이렇게 늦지는 않을 일이었다. 오늘따라 기분 좋게 잠을 잤고 여유를 부리다 늦은 거였다. 가족들이 약속 있는데 안 나가냐고 물어볼 정도로, 제시간에 나온 게 아니었다. 지하철역까지 차로 데려다주겠다는 말도 쉽사리 거절하고 버스를 기다리다가, 버스 배차 시간을 놓치고, 그 상태로 정확히 도착할 시간도 말하지 않고 천천히 오라는 연락을 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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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만나지 않고 집에 돌아가지 않은 건, 오늘이 마지막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마지막엔 얼굴을 보고 얘기하는 게 좋을 테니까. 너한테 내 시간을 투자하는 게 아깝다고, 미안하다고 말만 하는 것도 지겹다고. 여태까지는 그래도 시간 낭비까지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그렇게 느껴진다고. 오랜만에 연락해서 만나자고 해서도 이럴 줄은 몰랐다고. 너와 보내는 시간보다 우리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늙은 우리 강아지와 시간을 보내는 게 더 나은 것도 같다고. 네가 말했듯이 강아지들은 우리를 한결같이 기다리고, 강아지는 우리의 하루보다 매일 하루가 길고 함께할 수 있는 시간도 짧으니까.


상처를 주는 말인 걸 알고 있어서 솔직하게 말하면서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기분 좋게 축하해 주고 싶었다. 마음고생했던 걸 모르지 않았다. 책이라도 하나 가져와서 읽고 있을걸, 어차피 잘 늦는 거 모르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이 들자, 갑자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날이 갈수록 실망하는 경우만 늘어났다. 필요할 때만 연락해서 도움을 청하고, 소중한 친구라면서 한 번씩 내가 하는 하고 있는 것들을 보잘것없이 얘기할 때마다 아무 생각 없이 말한다고 할 때도 고스란히 웃어넘겼다. 적극적으로 뭔가를 먼저 하지 않으면서, 그걸 내가 주도적으로 하는 걸 좋아해서 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답변할 때쯤엔 확신이 들었다. 나를 배려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사실 먼저 움직이지 않은 것에 대한 또 다른 변명일 뿐이었다. 어찌 됐든, 무슨 일이든, 잘못은 없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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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 건 처음은 아니었다. 늦는 날이 늘어날수록 나도 모르게 '이렇게 되면 다음이 없을 수도 있다'라는 말을 해왔다는 걸 깨달았다. 늦는 게 미안하다면서, 다음엔, 다음엔 하면서 다음으로 미뤘지만, 그다음에서조차 일찍 오는 날은 없었다. 다음이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을 농담처럼 듣던 친구는, 오늘에서야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꼈다. 30분에는 도착할 수 있냐는 연락을 받고 망했다고 생각했다면서.


따뜻한 말을 건네고 나의 장점을 잘 알아주는 모습이 고맙고 위로가 되던 때도 있었다. 핑퐁 같은 대화가 오간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가는 동안 친구를 기다렸던 시간은 행동 없는 말이 얼마나 공허한지 알게 해주었고, 대화도 어느새 이상하게 툭툭 끊어지고 있었다. 고작, 약속에 늦었다는 게 그 사람을 보고, 느끼고, 떠올리고, 믿는데 적어도 내게는 중요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조금씩 늦는 건 그럴 수도 있지만, 매번 생각보다 오래 기다리다 보면 버려진 기분이었다. 기다림은 익숙해지지 않았고, 변하지 않는 걸 볼 때면 내가 보잘것없는 사람이란 게 여실히 느껴졌다. 나를 보잘것없게 느끼게 하는 사람에게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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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은 이상하리만치 단출했다. 아주 무거운 분위기도 아니었고, 오늘이 마지막이 아닌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다음에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는 말에, 다음이라는 계획은 없다고 했다. 내가 예민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거리를 두지 않고는 이제 견딜 수가 없으니 이해해달라고 했다. 10년이 되기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마지막을 고하는 건 공들여 지은 집을 우르르 무너뜨린 잔해를 본 것처럼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역시나 그리 아름답지는 않았다.

 

별일 없는 것처럼 친구는 밥을 샀고, 나는 디저트를 샀다. 혼란스러웠지만 점심은 맛있었고, 디저트는 달고 촉촉했다. 불같이 화를 내지도 않았지만 미안하기도 했다. 내 시간과 나를 소중히 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기다리는 시간은 아까운 당신도 이기적이고, 그런 당신에게 내 시간이 아깝다면서 아플 말을 골라 끝을 말하는 나도 이기적이다. 나는 상처받고 싶지 않으면서 당신에겐 아낌없이 상처가 줄 의도가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길 수가 없어졌다는 이유로.


당신의 이기심이 나의 이기심이 조금 다를지 몰라도, 결국은 스스로가 가장 중요하다는 점에서만큼은 변함이 없다. 아무도 손해를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도 모르고 다음엔 만나서 이걸 먹어보자는 얘기를 할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다음이라는 말로 미뤄둔 모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다음이라는 말이 이렇게 당연하지 않다는 게. 무슨 사이라는 것도 원한다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는 게. 다음이라는 말에 환상을 불어넣은 건 모든 게 지금처럼 유지되고 지금은 아니지만 언제든지 원하는 시간과 기회가 있으리라는 마음이다. 우리에게 다음이 없더라도 어디선가 다음은 쌓여가고 세상의 시간은 흘러간다. 시간은 우리에게 다음이라는 약속을 한 적이 없기에.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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