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름 새벽에 어울리는 시 [문학]

글 입력 2021.08.18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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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기에 좋은 계절이다. 시 읽기에 적합하지 않은 계절이 있냐고 묻는다면 기실 답은 ‘없음’이겠지만, 독서의 계절이라는 타이틀을 차지하고 있는 가을보다 나는 오히려 여름이 독서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한 해 중 가장 강렬한 금빛 태양광선이 종이 위로 떨어지며 빚어내는 그림자가 활자들과 얽히는 모습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그 모습을 멍하니 감상하기 위해서라도 책을 펼치라고 종용하고 싶다.

  

특별히 시를 추천하는 이유는, 더운 공기 속 헐떡이기 쉬운 독자를 배려하듯 호흡마다 문장들이 비교적 잘게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짧은 길이 안에 함축된 세계는 은하수처럼 끝없이 흐르고 있다.

 

좁은 벽장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사람처럼, 조그만 우물이 고목의 뿌리보다 큰 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안 순간처럼 놀라울 뿐이다. 문을 열어젖히듯 엷은 미색의 종이를 넘기면 펼쳐지는 남의 여름. 누군가의 여름은 마지막 행을 읽는 순간 나의 여름이 된다.

 

 

아름답다

                                  진은영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

죽은 여자 자라나는 머리카락 속에서 반짝이는 핀 같고

눈먼 사람의 눈빛을 잡아끄는 그림 같고

앵두향기에 취해 안개 속을 떠들며 지나가는

모슬린 잠옷의 아이들 같고

우기의 사바나에 사는 소금기린 긴 목의 짠맛 같고


조금씩 녹아들며 붉은 천 넓게 적시다가

말라붙은 하얀 알갱이로

아가미의 모래 위에 뿌려진다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

매립지를 떠도는 녹색 안개

그 위로 솟아나는 해초냄새의 텅 빈 굴뚝같이


 

여름 새벽에 어울리는 시 하나를 소개한다. 진은영의 두번째 시집인 『우리는 매일매일』에 수록된 '아름답다'라는 시다.

 

진은영이 사용한 직유들은 낯선 껍데기를 입고 찾아와 감각을 익숙하게 뒤흔든다. 기묘한 단어 선택과 한 번도 떠올려본 적 없는 생소한 조합의 묘사들은 고착된 표현을 전복시킨다. 죽은 여자가 착용한 머리핀이나 모슬린 잠옷 차림으로 안개 속을 걸어가는 아이들, 혹은 소금기린, 혹은 녹색 안개를 본 적 있는가? 다른 별에서 온 것만 같은 진은영 특유의 이러한 표현은 묘사하기 어려운 무형의 것을 섬세하게 묘사한다는 점에서 경이롭다.

 

신비롭고 기이한 아름다움. 한 번 목격하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이채롭고 아찔한 충격. 죽음 어귀에서도 여전히 반짝임을 발하고 잃어버린 감각을 회복시킬 수 있는 생명력. 화자가 들려주는 ‘너’의 아름다움은 그런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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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에 여름을 대입하여 시를 다시 읽는다. 반짝임과 과일의 단내, 까끌까끌한 모슬린의 감촉과 우기의 축축함, 사바나가 주는 열대지방의 후덥지근한 열기, 짭짤한 맛, 붉고 흰 색채, 아가미 위로 쏟아진 모래와 해초의 비릿한 바닷냄새, 녹색으로 피어올라 안개를 만드는 눅진하고 물 많은 공기. 익숙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형용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심장에 더운 자국을 남긴다.

 

이 계절의 치밀하고 강렬한 아름다움은 도무지 완벽하게 묘사할 수가 없다. 여름의 특징들은 익숙하지만, 언어로 구현하기에는 어렵다. 설명하고 싶어도 속에서 말이 튀어나오질 않아 입만 뻐끔거리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거대한 대상을 말로 풀어내려고 할 때 특히 그렇다. 선뜻 시작하기조차 망설여지고, 평범한 단어들을 선택하기엔 게으르게 안주하는 것 같아 불만족스럽다.

  

그럴 때, 진은영은 그런 우리에게 세계를 낯설게 보라고 종용한다. 자신만의 언어로 다시 칠하고 덧그린 세계가 종이 위에 놀랍도록 견고하게 건설된 것을 본다. 인위적이지 않은 배열 사이사이로 한 폭의 연작처럼 시인이 의도한 장면이 그려지는 것을 목도한다. 그 매력적인 새로움은 공감으로, 때로는 영감으로 다가와 우리의 영혼을 충만하게 한다. 아름답다는 말을 대신할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한 탓에 그저 또 아름답다고 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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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말을 고르지 못하여 아쉬운 순간에 이 시를 읽는다. 모든 것이 흐릿하게 잠든 시퍼런 새벽녘에 세계를 깨워줄 태양을 기다리는 것처럼, 아침을 맞아 사물의 선이 이윽고 뚜렷해지는 것처럼. 모호했던 여름의 아름다움이 선명하게 마음 안에 각인되는 것을 느껴보자. 우리를 둘러싼 늦여름의 마지막 반짝임이 색다르게 다가올 테다.

 

누군가는 시 속에서 여름이 아닌 또 다른 ‘너’를 찾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름만큼 아름다운 그대만의 ‘너’를 떠올리며 읽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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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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