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천재 감독들이 그려낸 나쓰메 소세키의 꿈들 [영화]

100주년을 맞아 2007년 세상에 나오게 된 영화 몽십야(夢十夜)
글 입력 2021.08.10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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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밤의 꿈」이라는 옴니버스 소설에서 일본의 국민 작가인 나쓰메 소세키는 열 가지의 기묘한 꿈을 펼쳐 보인다. 각각의 꿈들은 연결성이나 일정한 흐름을 갖고 있진 않다. 독립된 이야기들로 꾸려진 꿈들은 상징적이고 몽환적인 이미지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 「열흘 밤의 꿈」이라는 소설 작품은 나온 지 100년 후인 2007년에 일본에서 영화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내로라하는 10명의 감독들이 모여 영화 「열흘 밤의 꿈」을 제작했다. 이들은 동일한 예산을 갖고 비슷한 시기에 영화를 촬영하였다. 개성 넘치는 감독들이 자신의 스타일에 맞춰 이야기에 새로운 옷을 덧입힌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원작 소설의 무거웠던 분위기는 한층 가벼워졌다. 덕분에 우리는 「열흘 밤의 꿈」을 영상으로 부담 없이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원작 소설은 개별적으로 분석되기도 하고 전체적인 흐름에서 해석되기도 한다.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불안’, ‘생사’, ‘헛수고’라는 키워드와 같이 다뤄지곤 하는데, 이번 글에선 영화화된 「열흘 밤의 꿈」을 소설 원작인 「열흘 밤의 꿈」과 비교하면서 다뤄보고자 한다.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인상 깊게 감상했던 세 개의 꿈인 둘째 밤, 여섯째 밤, 일곱째 밤을 소개한다.



 

無를 알아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데...



제2야(둘째 밤)는 ‘사무라이’와 ‘스님’ 사이의 갈등, 그리고 ‘사무라이’의 내적 갈등을 긴장감 있게 그려낸 흑백 무성영화 스타일의 단편이다. 영화 속 미장센은 소설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담백하게 연출되었다. 널따란 절의 고요하면서도 기이한 분위기를 영상으로 잘 구현해냈다. 또한, 불필요한 카메라 워크는 배제하고 필요한 부분만 강조함으로써 전달력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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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무라이가 한 명 등장한다. 한 스님은 그를 보고 사무라이임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있다며 ‘쓰레기’라고 맹렬히 비판한다.


 

“자네는 사무라이일세, 사무라이라면 깨닫지 못할 리가 없을 거야. 그렇게 언제까지고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보니 자네는 사무라이가 아닌 듯하네. 쓰레기 같은 인간일세. 하하하, 화가 난 모양이로군.”

 


스님으로부터 수치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무라이는, 스님의 목을 베기 위해 깨달음을 얻으려 한다. 그렇지만 그는 제한된 시간 내에 깨달음을 얻는 데 실패하고 할복자살을 기도한다.


영화의 사무라이는 집착과 욕심, 복수심을 버리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깨달음에 대한 집착, 중에 대한 복수심은 ‘有’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비롯된다. 소설 속에서 ‘無라는데도 역시 향의 냄새가 났다. 향 주제에’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有’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無’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작가는 사무라이를 짧은 순간 동안 극한의 상황에 처하게 함으로써 득도의 어려움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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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조주(778-897, 당나라 말기의 선승)에 대한 언급은 나쓰메 소세키가 불교 철학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주라는 스님은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라는 소설에서도 잠시 언급된다. <남천참묘의 공안>이라는 일화에서 남천 스님의 수제자인 조주는 자신의 더러운 신발을 머리 위에 올리는 행위를 한다. 조주는 인간이 아름답다고 인식하는 대상에 품는 욕망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갈등을 풍자하려는 의도에서 이러한 행위를 한 것이었다.


이렇듯 「금각사」에서는 ‘아름다움’의 허무함에 대해서 말하지만, 「열흘 밤의 꿈」 중 제2야(둘째 밤)에서는 ‘노력’의 허무함에 대해서 말한다. 사무라이가 극기를 통해 얻으려 했던 ‘無’에 대한 깨달음은 역설적으로 그것을 좇음으로 인해서 얻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중이 ‘그만하면 됐다’라고 말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속의 중은 중생들이 ‘無’에 대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해도, 깨닫기 어려워한단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무라이가 집착과 미련,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나쓰메 소세키는 현대인들이 주위의 물질성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에 경종을 울리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네가 그토록 갈구해왔던 건 사실 허상이고 부질없는 욕심에 불과한 것’이라고 설파하면서 말이다.

 

 

 

어이 젊은 예술가, 천하의 영웅답게 행동해~


 

제6야(여섯째 밤)는 원작 소설의 설정부터 다소 특이하다. 메이지 시대를 살아가는 <나>가 가마쿠라 시대의 유명한 조각가였던 운케(運 慶,1150–1223)의 인왕 조각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물론 꿈속이기에 가능한 설정이다. 운케는 일반인이 범접할 수 없을 만큼의 포스를 지닌 대가로 묘사된다. 주위에 있던 메이지 시대의 구경꾼들은 운케가 인왕을 조각하는 모습을 보며 크게 감탄한다.


여기까지는 소설과 영화의 내용이 유사하다.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예술가의 ‘재능’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런데 원작 소설에선 위대한 예술가가 당대의 사회와 문화를 ‘반영’하는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데 보다 초점을 맞춘다. 또한 소설의 말미에서 ‘메이지의 나무에는 인왕이 들어있지 않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재능’이라는 문제에만 주제를 국한시키지 않았단 사실을 알 수 있다.


메이지 시대의 구경꾼들이 운케를 칭송하는 모습은 현실에서 후세의 사람들이 과거의 위대한 예술가들을 예찬하는 모습과 겹쳐 보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감상하는 현재 우리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그리고 예술적 자아가 강한, 소위 예술가들은 감상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작품을 창작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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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은 과거의 위대한 예술가가 천착했던 세계로부터 영감을 얻는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러한 깨달음의 과정엔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며 진정성 있는 접근이 요구된다. 운케가 조각하는 것을 보던 한 젊은 구경꾼은 이런 말을 하는데 <나>는 이걸 듣고 재밌다고 생각한다.


 

“과연 운케로군. 우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천하에 영웅은 단지 인왕과 나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태도야. 훌륭하군.”

 


<나>의 시각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에선 주위의 구경꾼들이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운케를 칭송하는지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반면 운케는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다.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르러 오직 자신이 예술혼을 쏟고있는 작품에만 온 신경이 집중되어있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천하의 영웅’은커녕 ‘소인배’처럼 행동한다. 주변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운케를 보며 자신도 쉽게 인왕을 찾아내어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오판한다. 하지만 <나>는 인왕을 발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운케는 인왕을 조각해내겠다는 집념 하에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른 반면, <나>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예술혼을 한 작품 안에 온전히 담아내겠다는 진정성 보다는 인왕상을 운 좋게 발견하여 구경꾼들에게 칭송받고자 하는 목적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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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야(여섯째 밤)를 보며 프란츠 카프카의 「선고」란 소설이 떠올랐다. 「선고」의 주인공은 예술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로 상징되는 개념들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예술적 자아를 택하게 된다. 이 세상엔 본인의 사회적 지위,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고갱처럼 예술인의 삶을 좇아 살아간 천재들이 있다. 어쩌면 나쓰메 소세키도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이들 삶을 들여다보며 깊은 고민을 했고, 자신의 삶과 자아를 반추하게 되었고, 그 결과 위와 같은 꿈을 꾸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고독하면서도 화려한 인생이 나를 감싸네


 

제7야(일곱째 밤)는 「파이널 판타지」를 제작한 애니메이션 감독인 시로노부 사카구치가 담당했다. 다른 단편들과 달리 이 영화만이 유일하게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있다. 그래서 보는 이에 따라 넷플릭스 오리지널의 대표 콘텐츠들 중 하나인 「러브, 데스 + 로봇」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만큼 공상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연출을 통해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 단편을 보면서 떠오른 작품은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였다. 우리는 사회에서 타인들과 같이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의 개성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곤 한다. 개성이 강한 이는 사회화의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거나, 실재하는 현실의 무거움에 눌려 스스로 사회와의 격리를 자처하기도 한다. 실제로 이 단편의 화자는 쓸쓸함과 고독감을 느끼는 인물로 그려진다.


소설과 영화의 화자는 망망대해를 가로지르는 한 거선에 올라탄 사나이다. 그는 이 배의 종착지를 몰라서 한 선원에게 물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이라곤 수수께끼 같은 대답일 뿐이다. 


 

“서쪽으로 가는 해의 끝은 동쪽이로구나. 그게 사실일까? 동쪽에서 뜨는 해의 고향은 서쪽이로구나. 그것도 사실일까? 몸은 물결 위, 배 위에서의 잠. 흘러라, 흘러라.”

 


종착지를 알아내지 못한 사나이는 불안해한다. 배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도착하기는 하는 것인지.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바다를 보고 차라리 바다에 뛰어들까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사나이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한 여성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이 부분은 소설의 내용과 조금 다르다. 소설에선 한 살롱에서 그가 일방적으로 그녀를 목격한 것이라면, 영화에선 그처럼 방황하던 그녀와 살롱 밖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대를 형성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와 다르게 자신이 배 위에서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낸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고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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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위의 사나이는 그런 그녀를 본 것에 안도감을 느끼는 한편,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와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나아가, 이 세상에 대해 회의감과 시시함을 느껴 배에서 몸을 던져서 바다에 떨어지기로 결심을 한다. 그런데 제2야(둘째 밤)와 마찬가지로 감독은 나쓰메 소세키의 원작 소설의 결말을 완전히 바꿔서 자신만의 해석을 내놓는다.


원작 소설에선 사나이가 깊고 검은 바다로 떨어지며 차라리 배에 있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후회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렇지만 영화에서는 바다에 빠진 사나이가 자신이 타고 있던 배보다 훨씬 크고 화려한 물고기로 변신하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감독이 나쓰메 소세키를 비롯하여 고통받는 이 시대의 INFP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멋진 엔딩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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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나쓰메 소세키의 「열흘 밤의 꿈」은 다양한 비유와 상징을 지니고 있는 10편의 작품집이다. 옴니버스 형식의 작품이지만 각각의 단편들이 가지는 키워드들을 묶어서 해석하는 평론가들도 있다. 나는 제2야, 제6야, 제7야 이렇게 세 편의 단편들을 리뷰하면서 나쓰메 소세키가 깨달음, 자아, 그리고 인간 세상에 대해 깊게 사유한 철학적인 작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시에 나는 그동안 유치하다고 비웃기만 해왔던 일본 콘텐츠, 영화계의 잠재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종종 충분한 숙고를 거치지 않은 채 어떤 것에 대해 쉽게 일반화를 하는 우를 범하곤 한다. 그렇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우리의 생각과 다른 경우가 매우 많다. 이번 기회를 통해 나는 일본에도 매력적인 영화감독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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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욱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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