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하나의 인형에서 한 명의 인간으로 - 모던걸 백년사 [공연]

외로운 당신에게 건네는 인사
글 입력 2021.08.08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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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걸 백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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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걸 백년사>는 1920년의 모던걸 ‘경희’와 2020년의 페미니스트 ‘화영’이 자신들의 꿈과 사회의 요구, 비난, 시선 사이에서 갈등하며 고민하고 행동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20년 경성에 사는 경희는 이화학당에서 신식 교육을 받고 동경 유학을 다녀와 세간의 화제가 된 신여성이다. 그러나 잡지에 여성 해방을 주장하는 글을 기고하고 이혼을 한 여성이라는 이유로 ‘모던걸’로 불리며 조선 사회의 비난을 받는다. 경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여성 해방의 일환으로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을 번역하기로 마음먹는다.


2020년 서울에 사는 화영은 성적에 맞춰 간 대학을 다니며, 주변의 성화로 적성에도 맞지 않는 교직 이수를 하는 중인 ‘착한 딸’이다. 하지만 화영은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고루한 주변의 시선이 어딘가 불편하고 꺼림직하다. 졸업을 앞두고 동아리의 마지막 연극 <인형의 집>을 준비하면서 점차 용기를 내기 시작한다.


100년이라는 시간의 차이가 있지만, 세간의 비난을 한 몸에 받는 신여성 경희와 진로와 현실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대학생 화영은 다른 시대에서 비슷한 고민을 하며 따로, 또 함께 존재한다. 그들은 ‘요즘 여자들’을 탓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주체적인 삶을 쟁취하기 위해 세상의 편견에 맞선다.

 

 

 

저 하이카라 여성을 누가 데려가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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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여성창작집단 하이카라 페이스북

 

 

‘하이카라’는 모던걸과 마찬가지로 개화기 신식 교육을 받는 이들을 가리키는 은어이다. 공교육을 배운 여학생, 신여성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저 하이카라 여성을 누가 데려가누’라는 제목의 글에서 알 수 있듯 단어 자체에 배우고 생각하는 여자들에 대한 경멸과 무시, 혐오가 깃들어있다. 이 부정적인 단어를 역설적으로 사용한 하이카라 여성 예술인 창작 집단은 여성주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사회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진다.


100년 전 신여성 경희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화영, 바뀐 건 무엇일까?

 

 

모던걸 백년사 복사2.jpg

 

 

No.1 모던걸 백년사

 

이기적인 요즘 여자들 사치스러운 요즘 여자들

남녀갈등만 조장하는 너흰, 요즘 여자들


모던걸 된장녀 양공주 김치녀 꼴페미

예민해 너희가 말하는 그런 여자

 

 

처음부터 강하게 몰아치는 뮤지컬 넘버는 <모던걸 백년사>의 기획 의도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단어의 부정적인 어감을 누그러뜨리거나 순화하지 않고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을 직설적으로 언급하며 이야기의 불씨를 무대 위에 던졌다.


너무나도 생생하게 묘사되는 적대적인 사람들의 말에 밝은 조명이 비추는 무대임에도 어둡다는 느낌을 받았다. 현수막과 피켓처럼 보이는 무대 세트에서 세상의 절반이 이 세상을 살아내고 만들어내는 과정들이 떠올랐지만, 그들이 걸어온 길들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닦아내어 기어이 자신들의 뜻대로 지우고 왜곡된 해석을 붙이는 사람들의 모습에 암담해졌다. 똑같이 생각하고 욕망하며 살아가기 위해 행동하는 세상의 절반에게 가혹하리만치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고 좌절시키는 사람들의 어긋난 행보에 조금씩 무너지는 느낌도 들었다.


“당신이 듣지 않고 기록하지 않았지만, 이 세상을 살아낸 세상의 절반”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나서며 때로는 부딪히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당찬 목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해 무대의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졌지만 당당하게 서 있는 자세에 이전보다 밝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대에 서 있는 사람들 한 명이 하나의 불꽃처럼 보이며 깊은 잔상을 남겼다.


이 이야기에서 더 이상 누구도 피해 갈 수만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함께 생각하고 나아가자는 뜻을 담고 있었다. 이들의 적극적인 모습에 한 걸음 떨어져서 보는 관람객이 아닌 같은 우리로서 무대 위 ‘우리’를 바라보고 응원했다.

 

 

 

나 자신에 대한 의무


 

나, 그리고 우리에 대한 다짐을 하기가 무섭게 다가오는 현실에 긴장했다. 화영의 옆에서 집적거리며 호감을 빙자한 참견과 간섭을 해대는 동아리 선배 ‘치훈’과 경희의 사생활을 파헤쳐 자기 입맛대로 바꿔 기사화하는 칼럼니스트 ‘칠성’은 보기만 해도 거북했다. 그들이 더 거슬렸던 이유는 스스로 진보적이며 인권 의식이 깨어있다고 믿으면서, 그 이면에는 여성들을 낮잡아보며 가르치려는 말투와 태도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무례하고 거만한 행동에 불편함을 표하면 바로 뒤따라오는 “나 페미니스트야. 너 왜 이렇게 예민해?”라는 말에 분명 연기임에도 속에서 무언가 욱하고 올라왔다.


“무엇보다도 난 당신과 똑같은 하나의 인간. 무엇보다도 난 최소한 인간 되려고 노력해”


경희와 화영은 자신들을 훈계하려는 이들을 향해 나 자신의 의무에 관해 이야기하며 똑같은 한 명의 인간이 되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둘을 가시적으로 이어주는 매개체인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대사를 옮겨온 만큼 묵직하게 다가오는 감동이 있었다. 다른 시대에서 하나의 뜻을 가지고 서로 마주 보고 부르는 노래로 마디마다 느껴지는 강인한 신념에 뭉클해지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이 가져올 파란에 대비했다.

 

 

No. 10 나는 고발한다


버러지만도 못한 입과 손으로

감히 우리를 모독하려 들고 있는

사회의 더러운 양심을 나는 고발한다

 

 

이제 그들은 불합리하고 모욕적인 세상에 대항하는 불씨를 피웠다. 분노와 울분이 가득 찬 목소리로 감히 우리의 입을 막고 우리를 모독하려 드는 사회의 더러운 양심을 고발했다. 그러나 가사에도 나왔듯 경희와 화영, 그리고 우리가 고발할 수 있는 폭은 좁았다. 고작 사진으로, 고작 수천 개의 말로 전할 수밖에 없었다.


극이 전개되면서 경희의 이야기가 드러나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작가이며 근대적인 여성 운동을 펼쳤던 나혜석이 떠올랐다. 당시로써 파격적이며 저돌적이기까지 한 나혜석의 여성 해방 운동은 여성 인권이 진일보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만하다. 그렇기에 그녀가 썼던 소설 『경희』에서 모티프를 얻어 탄생한 경희는 그 자체로 큰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나혜석의 말로가 비참했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 사회의 가부장제가 가지는 모순을 비판한 “이혼고백장”(1934)을 발표한 후, 가족과 친지들에게까지 외면당하고 비난받으며 급격하게 쇠락해갔다. 당시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수단인 ‘고작 수천 개의 말로’ 사회를 고발했다고 말이다.


품은 울분과 분노가 클수록 또 이를 드러내고 표현할수록 돌아오는 반응에 상처 입을까 봐 실망할까 봐. 그들이 가져온 파란이 그저 파동으로 남아서, 그래서 좌절하고 낙담하고 끝내 무너져내릴까 봐 걱정되었다. 아니, 사실은 두려웠던 것 같다.

 

 

 

내가 이상한가


 

자신을 내던져 사회를 고발한 이후 돌아온 것은 무시와 경멸이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은 것인지 의문이 들게 할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반응에 혼란스러운 것도 잠시 곧바로 2차 가해가 이어진다. 피해자라고 말하는 너희들이 잘못한 것이라고, 다른 사람들은 잘살고 있는데 너희만 그런다고 질책하고 손가락질한다.


“내가 이상한가? 예민한가?”


“왜 이렇게 불만이 많아?” “네가 예민하게 구는 거 아니야?” 수도 없이 쏟아지는 말들에 힘차게 피웠던 불씨가 사그라든다. 이는 지금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말이다. 그럴 때면 정말 자신이 예민하고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물 흐르듯 평화로운 세상 속 불만에 가득 찬 불순물처럼 여겨진다. 개인의 부정적인 성격이 탓이 아닌 이 불합리한 사회 때문인데, 누군가 침묵을 깨고 소리를 내려고 하면 소리를 죽이고 파란을 잠재운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난 인형이었네 세상의 인형

... 난 사람이로세 하나의 사람


 

현실의 높은 벽에 좌절하게 되었지만, 경희와 화영은 멈추지 않았고 또 멈출 수 없었다. 다른 이들이 짓누르려 온갖 말로 힐난했으나 경희와 화영이 낸 목소리에 화답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또 다른 경희와 화영이었고 나였으며 동시에 우리였다. 우리는 우리에게 힘을 주었고 불씨를 되살렸으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었다.


“자유의 대기로 새로운 세상 향해”


우리는 하나의 인형이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서 살아갈 것이라고 선언하듯 노래하는 경희의 마지막 뮤지컬 넘버가 인상 깊었다. 작곡가분의 말씀처럼 경희가 신여성으로 겪어왔던 모든 시간을 가사 한 소절 한 소절에 담아 그녀의 삶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비록 경희의 시대는 타오르는 그녀를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경희 스스로 사회를 벗어났지만, 변화할 세상을 위해『인형의 집』 번역을 마쳤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경희는 도망치지 않았고 화영은 그 뒤를 이어 변화를 위해 우리들과 연대해나갔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불꽃처럼!

 

 

 

나는 나만의 이야기이자 우리의 이야기


 

공연계에 건강한 흐름을 불어넣는 뮤지컬이었다. 시의적절한 주제와 충분히 생각해 볼 만한 시사점을 던져 주었기 때문이다. 대학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뮤지컬에서는 현대 사회와는 어울리지 않는, 다소 뒤떨어진 내용을 보여줄 때가 많았다. 지나치게 성적인 장면을 강조하거나 폭력적이거나 혹은 21세기에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 있었다.


물론 요즘에는 변화하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추세로 불쾌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장면을 삭제하거나 일부 내용을 수정하기도 한다. 시대에 발맞춰나가기 위해 노력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아직도 남아있는 몇몇 부분에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뮤지컬이 현대적인 감성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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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는 너무 많은 일을 한꺼번에 겪었고, 겪고 있고, 앞으로도 겪을 거라는 걸 알고 있기에 이번 페미니즘 뮤지컬이 더욱 와닿았다. 페미니즘 자체에 부정적인 프레임을 씌워 아직도 드러내길 꺼리고 회피하게 만드는 사회에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느끼기도 하지만, 고작 사진으로, 몇 마디 글로 표현해낼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누구나 목소리를 내고 말할 수 있다는 데 희망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다.


꽃이 아닌 불꽃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욕망하고 살아가는 “지금의 페미니스트가 과거의 페미니스트에게, 그리고 외로운 당신에게 건네는 인사”는 혼자가 아닌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모던걸 백년사]는 서로의 존재를 알려주는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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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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