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몸이 문제인가, 몸을 둘러싼 통제가 문제인가

길리어드는 우리의 ‘오래된 미래’다
글 입력 2021.07.31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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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1985년 작품이며 디스토피아 SF 장르로, 세계관에 대해서 특히 여성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지옥이라는 수식어가 따른다. 원작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 <핸드 메이즈 테일(The Handmaid’s Tale)>은 현재 시즌 4까지 제작된 상태이고, 본 글은 시즌 1의 내용에 한정했다. 세계관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과 관련한 담론에 대해 작성할 예정이므로,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는 없을 예정이다.

 

 


1. 시녀는 “다리 달린 자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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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 배경은 ‘길리어드’라는 곳으로 시간적으로는 현재 미국의 미래 세대이다. 환경 파괴와 방사능 오염 등으로 불임 문제가 심각해져서, 극단적인 기독교 단체가 정권을 잡고 전근대적 삶으로 회귀하여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사회가 그 배경이다.


길리어드에서는 ‘사령관’이라 불리는 소수의 남성들이 권력을 잡는다. 여성들은 물론 권력을 가질 수 없다. 길리어드에서 여성은 글을 읽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다. 경제활동도, 재산 소유도 불가능하다. 오로지 남성들에게 귀속되어 있을 뿐이다.


여성들은 세 개의 신분인 부인, 하녀, 시녀로 나뉜다. 부인은 소수의 권력자 남성들의 배우자이고, 하녀는 집안일을 돕는 시종들이고, 시녀는 드라마의 주인공의 문제적 신분이다. 세 계급의 여성들 모두 소수의 권력자 남성에게 귀속되며, 계급이 낮은 남성은 경제활동은 가능하나 여성을 배급받지 못한다.


‘시녀 이야기’라는 원제처럼 ‘시녀’는 길리어드의 핵심 신분이다. 길리어드가 수립된 배경이 불임률이 높아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국가적 위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녀’로 분류된 여성들은 소수의 권력자 남성인 ‘사령관’의 가정에 배치되어 사령관의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다.


시녀들은 오로지 ‘수태’를 위한 삶을 살기 때문에 가축이나 다름없다. 가축처럼 품번이 새겨지며, 같은 유니폼을 입는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가임기에 강간이나 다름없는 ‘의식’을 치른다. 드라마에서 가장 역겨운 장면이다. 듣기만 해도 끔찍한 길리어드 시녀들의 삶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살았던 여성들이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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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들은 반항해보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건 전기 충격기의 고통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반항을 하면 눈을 뽑고, 글을 읽는 것을 들키면 손목을 자른다. 왜 그런 고문을 하면서도 시녀들을 살려두는 것이냐 물으신다면 임신과 출산을 위해 자궁은 온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다.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시녀의 방에는 뾰족한 물건을 절대 놔두지 않으며 감시가 항상 따른다. 시녀는 길리어드의 아이를 수태해야 하는 ‘위업’을 이루어야 하는 존재이므로.


시녀들은 과거 미국 사회에서 쓰던 이름을 쓰지 못한다. 각자 배치된 집의 주인인 사령관의 이름을 따서 ‘Of ○○○’이라고 불린다. 가령 프레드 워터폴드 사령관의 시녀이면 ‘오브프레드’인 식이다. 주인공 ‘준’은 ‘오브프레드’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초반부 준의 대사 중 시녀의 실체를 잘 나타내주는 대사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첩이 아니다. 그저 다리 달린 자궁일 뿐이다.”


 


2. 그곳은 우리의 ‘오래된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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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들의 이름이 사령관의 이름을 따서 ‘Of ○○○’라고 지어지는 것처럼, 부인들은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라간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가부장제 사회의 가계를 이어가는 와중에는 반드시 여성이 필요하다. 남성은 스스로 대를 잇지 못한다.


반대의 케이스를 보자. 가부장제 사회를 뒤집어 놓은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에서도 출산을 하는 존재는 마찬가지로 여성이다. 그러나 가모장제 사회에서 출산하는 여성은 ‘신’에 가까운 존재다.


길리어드에서 사령관의 집에 갇혀 강간을 당하고 출산을 요구받는 시녀들과 다르게, 이갈리아의 여성들은 임신과 피임을 본인이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갈리아에서는 자랑스러운 일이다. 여자로 태어나서 죽고 싶어도 죽음마저 통제당하는 길리어드의 여성들과 다르게 말이다.


출산은 똑같이 여성이 하는데, 이 두 세계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두 세계 모두 재생산권은 모두 여성에게 있다. 하지만 길리어드가 여성의 재생산권을 폭력을 통해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 이갈리아와 핵심적인 차이점이다. 여성의 몸을 둘러싼 착취의 역사는 길리어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2016년에 있었던 ‘가임기 여성 지도’를 기억한다. 저출생과 가임 여성을 연결 짓는 사고는 사회 제반적 성찰이 결여된 무책임한 태도이자 여성에게로의 책임 전가다. 어디 가임기 지도뿐인가? 혈통을 이어야 한다며 여성을 들여 아이를 낳던 ‘씨받이’의 전근대적 괴담도 존재한다. ‘낙태죄’가 더이상 ‘죄’가 아니게 된 것도 겨우 올해 1월이다. 길리어드는 우리 사회의 ‘오래된 미래’다.


 

 

3. 대리모 산업, 찬반을 논할 수 있는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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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에서 ‘시녀’가 주인공이고, 여성의 재생산권을 둘러싸고 이야기를 전개하기에 대리모 산업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대리 출산’은 보통 시험관에서 체외수정한 수정란을 제3의 여성의 자궁에 착상시켜 수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이때 임신하는 제3의 여성을 대리모라고 부른다.


한국에서는 대리모 산업이 익숙하지 않지만, 서양에서는 꽤나 잘 알려져있다.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이 대리모를 통해 아이를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대리모 시술에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보통 출산을 하면 커리어 중단의 위험이 있는 배우, 돈 많은 난임부부, 동성애자 부부들이 이 대리모 시술을 많이 의뢰한다.


대리모 산업에 대해서 찬성과 반대, 각자의 입장이 뜨겁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대리모 산업이 찬반의 대상인지 의문을 가지는 쪽이다. 대리모 산업은 몇 가지 담론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계급의 층위에서, 대리모 수술은 부유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먹고살 만한 풍족한 여성은 어느 누구도 상업적 대리모가 되기를 자처하지 않는다. 생계를 잇기 어려운 여성들이 돈을 벌고자 대리모가 된다. 인종의 층위에서는, 보통 서양 국가들의 수요에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답하는 쪽이다. 대리모 문제를 지적한 책의 제목 ‘Brown Bodies, White Babies’처럼 인종적인 측면도 얽혀있다.


대리모 산업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대리모 여성들이 대리모가 되는 것을 주체적으로 ‘선택’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계급적 층위와 인종적 층위의 사회 경제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여성들의 최후의 수단을 ‘선택’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괜찮은가?


중국의 유명 배우 커플이 대리 출산을 의뢰했는데, 7개월 만에 이혼하게 되자 대리모에게 낙태를 종용하고, 그것이 불가능하자 아이를 버리겠다고 한 사건도 유명하다. 또, 호주 부부의 의뢰를 받은 태국 대리모가 쌍둥이를 낳았는데, 둘 중 한 명이 다운증후군이 있어 호주 부부가 장애가 없는 아기만 데려가고 심지어 비용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은 사건도 있었다.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리모 여성보다 대리모를 의뢰한 부유한 사람들이 법적 분쟁에 필요한 자본이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요컨대 대리모 산업의 가장 분명한 점은 여성의 몸에 대한 명백한 착취라는 것이며, 인권 침해적이고, 법적 분쟁이 발생했을 때 대리모 여성은 더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

 

지금까지 <시녀 이야기>와 The Handmaid’s Tale의 길리어드와 ‘시녀’, 여성의 재생산권과 몸에 대한 통제, 그리고 대리모 산업의 문제까지 살펴보았다.


전근대적 삶으로 회귀한 미래 시점을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 작품은 다른 디스토피아 작품과 다르게 훨씬 더 마주하기 어려웠다. 현실과 맞닿은 지점이 너무나 명확했기 때문이다. ‘시녀’를 통해 살펴본 길리어드 사회는 여성의 몸에 대한 착취의 유구한 과거이자 현재이고 동시에 미래이다.


<시녀 이야기>와 The Handmaid’s Tale을 통해 다시금 과거에 여성의 재생산권이 어떻게 취급받아 왔는지 되짚어보고 여성의 신체에 대해 인식하게 된다. 재생산의 주체는 여성이며, 재생산은 여성의 신체에서 기인한 힘이다. 그렇다면 몸이 문제인가, 몸을 둘러싼 통제가 문제인가.


한국에서 ‘낙태죄’가 더 이상 죄가 아니게 된 게 겨우 올해 2021년이다. 백래시에 맞서 미래에도 여성은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지켜낼 수 있을까. 디스토피아 SF 적 상상력에 기대어 예측해 본 길리어드를 미래로 삼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어떤 힘이 필요한지 생각해 볼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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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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