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 여인의 응시를 주목하라 - 갈매기 [영화]

글 입력 2021.07.30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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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번쯤 맞이하는 삶의 전환점은,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고난으로 점철된 시간이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명언("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한다")을 상기해보면, 죽음에 준할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을 직면한 개인의 삶은 이전과 똑같을 순 없음을 방증한다. 과거의 일상으로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개인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삶은 전혀 다른 형태로 발전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갈매기>는 뜻하지 않은 끔찍한 사고를 계기로 전혀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한 한 여인의 선택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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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복'(정애화)은 삼십 년 넘게 시장에서 악착같이 일하며 세 딸 모두 4년제 대학에 보낼 만큼 그 누구보다 가족에 헌신한 어머니다. 곧 있을 첫째 딸 '인애'(고서희)의 결혼식을 위해 양가 부모님과의 상견례를 마친 그녀는 큰일을 치르고 난 이후의 안도감을 가진 채 시장 동료들과 즐거운 술자리를 가진다.

 

하지만, 술자리에서 벌어진 뜻하지 않은 사고는 지금껏 쌓아온 '오복'의 일상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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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갈매기>는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해 힘겨운 날갯짓을 시작하는 한 여인의 생존기다.

 

'오복'을 짓밟는 주된 갈등 양상은 무관심 혹은 무책임)이라는 형태 없는 폭력에 기인한다. 차마 입 밖에 꺼내기 수치스러운 사고로 큰 충격을 받은 '오복'은 용기를 내어 가해자에게 사과를 요구하지만, 돌아오는 건 "기억 안 난다"라는 몰상식한 발뺌 행위뿐이다.

 

분노를 주체 못한 '오복'은 야심한 밤 가해자가 운영하는 가게 유리를 박살내지만, 뻔뻔하게도 가해자는 시장 측과의 보상금 협상에 비협조적인 상대측의 농간으로 둔갑시키며 시장 노조원들의 환심만 얻게 되는 야속한 상황만 발생한다.


이 와중에 '오복'의 가슴에 한 번 더 비수를 꼽는 건 지나간 일에 신경 쓰지 말라는 시장 사람들의 싸늘한 외면이다. 30년이 넘는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몰인정한 주변 지인들의 행태는 한창 논의 중인 시장 측과의 보상금 협상 과정에서 '오복'이 걸림돌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집단 논리에서 비롯된다.

 

더불어, '오복'에게 상처를 준 가해자가 협상 테이블을 주도하는 사람이란 점에서 시장 사람들은 다수를 위한 소수의 침묵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수준에 이른다. 그렇게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주변인들로부터 차가운 시선에 극심한 배반감을 느낀 '오복'은 이제껏 시도하지 못했던 자신의 삶을 쟁취하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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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복'에게 있어 가장 괴로운 시간은 가족과 함께 있을 때다. 차마, 고백하기 어려운 사고라는 점과 더불어, 집안의 경사를 앞두고 있는 와중에 혼란을 끼치고 싶지 않은 그녀는 가족들 모르게 고통을 감내한다.

 

사고의 여파로 '오복'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혈한다. 수시로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으로 괴로운 와중에 이불에 번진 핏자국을 보고서 황급히 화장실로 달려가는 장면은 남모르게 고통을 삭히는 어느 피해자의 모습을 대변한다. 이 와중에 사건의 전말을 모른 채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셋째 딸 '지애'(김가빈)의 대사("엄마 생리하나 봐")는 '오복'의 참혹한 심정을 배가시키는 대목이다.


'오복'의 끔찍한 사고는 세 딸의 어머니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쟁취하게끔 이끄는 삶의 전환점으로 작용한다. 생전 처음 맞이하는 사건으로 인해 어찌할 바 모르는 '오복'은 아무런 방편도 마련할 길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오복'이 자신도 못 알아볼 만큼 늙은 어머니에게 이 지경이 되도록 공부 하나 제대로 해보지 못한 과거를 한탄하는 장면에서는, 그간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는 '오복'의 삶을 드러낸다. 야속하게도, 정신이 온전치 않은 노모는 '오복'의 불만 해소에 전혀 도움도 안 되는 동문서답만 남긴 채 통화를 끊는다("꼬막이 먹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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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엄마는 갈매기다. 자유로운 두 날개를 가졌지만 육지 곁을 맴돌기만 하고, 멀리 날아갈 기세로 부지런히 날갯짓을 해대지만 결국 다시 그가 있던 자리로 돌아간다"

 

- 영화 <갈매기> '김미조' 감독

 

 

'오복'의 극 중 처지와 감정선은 오늘날 누군가의 어머니이자, 혹은 누군가의 딸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이 말소 당한 삶을 겪은 사람들을 대변한다. 세 딸을 대학에 보낼 정도로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오복'에게 정작 그녀를 위한 시간은 장사가 끝난 뒤 느지막이 시장 바닥에서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순간뿐이다. 그런 사정도 모르는 첫째 딸의 "술 좀 그만 마셔"라는 충고는 어머니 '오복'에게는 또 다른 채찍질로 다가올 뿐이며, 이 모든 사태를 관망하는 관객들에게는 안타까움만 안겨준다.


영화 <갈매기>는 소재를 대하는 감독의 올바른 접근 방식과 발군의 대사들, 그리고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끝가지 밀어붙이는 뚝심이 고루 빛을 발휘한다. 성폭행이라는 소재에서 오는 자극적인 부분들을 적절한 생략과 여백의 장면들을 통해서 암시하는 영화 연출은 인물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킴과 동시에, 인물의 고통을 섣불리 극적 요소로 치부하지 않으려는 제작자의 진심까지 엿보인다.

 

일상성이 묻어나는 영화 속 대사들은 대체로 평범해 보이지만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아이러니가 가득하다. 더불어, 듣기만 해도 섬뜩해지는 일련의 날선 대사들은 '오복'의 답답한 심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것은 물론, 이제껏 지분이 없었던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한 성난 투쟁의식까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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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가족이라는 이름의 육지로부터 차마 벗어나질 못했던 한 여인은 원치 않은 비극을 기점으로 오직 나 자신을 위한 생존 투쟁에 돌입한다. 그동안 자신이 헌신해온 모든 삶의 가치를 제쳐두고서 스스로의 이름을 가장 먼저 위치시키려는 한 여인의 단호한 의지는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단 하나의 응시로 표출된다.

 

안면몰수로 일관해온 가해자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오복'의 집요한 시선. 삼십 년 넘게 시장 바닥을 구르며 갖은 고생을 해온 세 딸의 어머니가 아닌, '오복'이라는 이름의 한 개인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강렬한 선포다.

 

나쁜 놈이 더 이상 잠 못 드는 그날까지, 우리는 이 여인의 응시를 주목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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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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