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라푼젤 - Who Knows Best? [영화]

글 입력 2021.07.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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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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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푼젤>에서 이상하게 기억에 남는 디즈니 히피펌의 선두주자, 라푼젤의 가짜 엄마, 마녀 고델. 18년 동안 아이를 납치 및 감금하고 꽤나 지능적인 가스 라이팅을 선보이며 깊은 숲 속 탑에서 한 발 자국도 내려오지도 못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엄마도 아니면서 라푼젤에게 '엄마는 널 정말 정말 사랑한단다'를 연신 외친 연기력에 속지 말자. 라푼젤, 어떻게 널 사랑하겠어? 네 머리를, 아니 네 머리만 사랑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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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델 입장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안티에이징은 물론 무병장수가 가능하다면 그 머리를 탐내지 않을 리 만무하다. 젊은 시절을 유지하면서 다친 곳을 멀쩡하게 낫게 해 주다니.

 

변명을 하자면, 처음부터 납치하려던 건 아니다. 왕비의 병을 고치기 위해 자신만 몰래 쓰고 있던 마법의 황금 꽃을 빼앗기고, 다행히 라푼젤의 머리카락에 마법의 효능이 남아있길래 왕궁에 찾아갔을 뿐.

 

캄캄한 밤에 몰래 머리카락을 잘라서 가져가려 했더니 마법이 사라져서 어쩔 수 없이 데려왔다. 납치하고 감금은 했다지만, 밥을 굶기거나 폭력을 휘두르진 않았다. 라푼젤 모습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단벌이지만 말끔하다. 물론 온갖 집안일을 다 시키긴 했지만 집안 꼴이 더러운 것보단 낫지 않나.

 

밖으로 나가는 것 빼고는 라푼젤의 요구도 많이 들어주었다.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며칠 멀리 나가서 필요한 물감도 사다 주고, 좋아하는 헤이즐넛 수프도 만들어주고. 라푼젤이 바깥세상을 궁금해할 때마다 세상은 악의 온상이고, 엄마와 함께 있는 것만 유일하게 안전하다는 생각을 세뇌시키느라 피곤할 지경인 걸 감안하면 할 도리는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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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사연 있는 과잉보호로 태어나서 한 번도 탑 밖을 나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영화는 라푼젤이 탑을 나가 등불을 보러 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정체성을 찾게 되는 로드무비가 되었다.

 

오히려 라푼젤이 한 번도 어머니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탑 밖을 나갔다 오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다. 하지 말란다고 정말 안 하다니, 매년 등불을 보면서 눈앞에서 등불을 보고 싶은 마음을 그동안 어떻게 참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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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탑을 나온 희열과 동시에 어머니의 말씀을 거역했다는 고뇌 사이에서 롤러코스터급 감정 기복을 선보이는 라푼젤에게 다행스럽게도 평생 기른 머리와 챙겨 온 프라이팬이 위기를 헤쳐나가는데 큰 도움이 됐다.

 

며칠 사이에 라푼젤은 달라졌다. 수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처음 축제를 즐겼다. 꿈에 그리던 등불도 봤고, 남자 친구도 생기고 심지어 엄마에게 '싫어요!'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자기주장이 확고해졌다. 역시 시작이 어렵지 그 뒤부터는 별로 어렵지 않다.

 

아무래도 고델은 후회하고 있었을 것이다. 차라리 정답게 손 잡고 라푼젤과 등불을 보러 갔다 오는 게 나을 뻔했다. 나에게만 쓰기도 아까운 마법을, 도둑 플린 라이더(본명 유진 피츠허버트)에게 사용하면서 둘이 사달이 나는 꼴을 봐야 한다니. 라푼젤의 머리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쟤가 뭘 하고 다니든 알 바도 아니었을 터.

 

라푼젤이 가출한 동안 고델은 여러모로 삽시간에 늙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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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델의 전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라푼젤은 일탈을 한 게 아니었기에 원상태로 돌아올 때까지 인내심을 가진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처음 세상에 발을 디딘 기억을, 사랑에 빠진 이들을 어떻게 돌이킬 수 있을까.

 

유진의 공범이었던 스태빙턴 형제들을 이용해 '세상은 춥고 더럽고 위험한 곳'이라는 생각을 다시 주입하려다 실패하자, 악역을 자처하며 라푼젤을 구하러 온 유진을 칼로 찌른다. 명색이 마녀인데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 수준급의 가스 라이팅과 자아도취, 변변찮은 칼잡이인 게 아쉽다.

 

급소를 피했는지 바로 죽지 않고 기력이 남아있던 유진이 라푼젤의 머리를 잘라주었고, 그 머리를 아까워하며 주섬주섬 담다가 발이 걸려서 사라진 마법처럼 고델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고델의 반복 학습 덕분인지 유진만 살리면 예전처럼 갇혀서 살겠다는 라푼젤의 확답까지 받아냈는데 안타깝게도 타이밍이 어긋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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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님은 연약하진 않은 것 같아요

 

 

라푼젤의 진정한 성장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유진이 아니라 라푼젤이 직접 자신의 머리를 잘라냈다면 더 큰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라푼젤 역시 자신을 구속하는 마법의 긴 머리를 차마 놓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알고 보니 라푼젤의 머리뿐만 아니라 눈물마저도 마법의 효과가 있었다. 마법이 아니었다면 며칠 사이에 그렇게 없어질 사람이었던 건지, 전체관람가라서 추락해서 죽은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던 건지는 미지수. 아무래도 후자 같지만, 만약 전자라면 며칠만 탑을 빠져나와 고델의 눈을 피했다면 라푼젤은 고델과 생각보다 일찍, 쉽게 작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성년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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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델은 자만했다. 라푼젤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그녀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생긴다는 생각에 코웃음을 쳤다. 자신만이 강인하고, 당당하고, 아름답고, 젊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라푼젤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의견을 내놓으면, 대화를 종결시켜버리거나 엄마가 가장 잘 안다며 'Mother Knows Best'를 시그니처 노래로 불렀다. 넌 연약한 꽃이라며 라푼젤의 자존감을 박살내고, 세상에 부정적인 가치관을 심어주고, 자신을 끌어올리기 바빴다.


세상에 모든 어머니가 잘 안다는 노래가 아니라, 결국 표면상 라푼젤의 엄마인 '내가' 제일 잘 안다는 자만한 노래 'Mother Knows Best'. 잘 안다는 건 적어도 어리석은 생각과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닌가.

 

애초에 영화 시작부터 마법의 꽃을 제대로 숨기지 못한 것도 고델이다. 왕궁에서 왕비의 병을 낫게 하려고 마법의 꽃을 달여 먹인 후 그대로 마법이 사라졌다면 그녀는 어차피 사라질 존재였다. 그녀의 마지막이 이성을 잃고 머리카락을 애지중지 주워 담다가 탑 밖으로 추락한 장면인 것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머리를 자르면 마법이 사라진다는 걸 이미 라푼젤을 납치하는 당일부터 알고 있지 않았나.

 

쓸모없는 머리카락을 아까워하며 모을 필요가 없었다. 18년 동안 라푼젤을 데리고 있으면서 마법이 머리에만 있다고 착각한 것 역시 어리석다. 눈물에도 마법이 담긴 줄 알았더라면, 라푼젤은 누구보다 빠르게 눈물을 흘리는 눈물연기의 달인이 되었을 텐데. 긴 머리 기르고 관리하느라 고생하지 않아도 되고 얼마나 효율적이었을까. 탑에서 떨어지는 그녀에게 묻지 못해서 아쉽다.

 

당신은 모든 걸 가장 잘 아는 고델이 아니었나? 과연 정말 그런가?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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