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예술로 산책] #1. 회색빛 철공소 사이 오색찬란한 예술 빛들의 향연, 문래창작촌

이미 당신은 이상한 문래창작촌의 예술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글 입력 2021.07.22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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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예술로 산책》시리즈는 매달 격주로 기고되는 예술 에세이입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해서 좋았던 일상 속 예술 조각 또는 흔적을 보고, 느끼고, 열렬히 사색한 것들을 지극히 사적인 시선으로 이야기합니다.

 

*산책자의 사연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Opinion]어쩌다, 예술로 산책을 시작합니다[문화 전반]

 

**감상 포인트: 계획된 산책로는 없습니다. 정해진 목적지도 없습니다. 그저 뚜벅뚜벅 걷다가 어쩌다, 우연히 발견한 예술 조각을 눈으로 담아 이야기합니다. 산책자가 주목한 예술의 흔적 사진에 부분 채색되어 있습니다.

 

 
*

 

장마가 시작됐다.

 

요즘 따라 별안간 몰아치는 비바람 때문에 뒤숭숭한 날이 잇따랐다. 오늘도 역시나 기분이 썩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이렇게는 안되겠어.' 마음속에 작게나마 살아있던 긍정적인 기운이 툭툭 나를 건드렸다. '그래, 뭐라도 해보자'.

 

지금 이 우중충한 기분을 단번에 끌어올릴 수 있는 적성에 맞는 행동이 필요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역시나 산책이었다. 어떤 동기가 없어도 그저 발걸음이 닿는 대로 걷기만 하면 되는 꽤 간단한 행동. 걷는 동안 많은 것들을 눈으로, 귀로, 코로 담을 수 있는 자극 넘치는 행동. 기나긴 집콕으로 무너진 건강과 활력을 되찾아 줄 기분 좋은 행동. 역시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해낼 수 있는 건 산책이었다.

 

단번에 채비를 마쳤다. 물, 에코백, 작은 책, 볼펜 한 자루까지. 나름 완벽하다고 생각하면서 현관문을 나서려는데 정수리 뒤편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오후에 비 온대. 우산 챙겨가." 순간 집 밖을 나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우산까지 챙기고서. '후 나가기 참 힘드네.'

 

철컥. 문이 열렸다. 바로 이어 삐리릭. 문이 닫혔다. 그렇게 어느 한 산책자의 예술로의 첫 번째 여정이 시작됐다.

 

*

 

Episode #1. 문래창작촌을 거닐다

 

 

쿠궁쿠궁.

 

"다음 역은 문래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출입문이 열립니다."

 

출입문이 열림과 동시에 꾸역꾸역 계단을 부지런히 올라섰다. 마지막 한 칸을 올라선 끝에 드디어 새로운 땅에 발을 디디였다. 이곳도 우리 집 동네와 다를 바 없이 우중충한 기운이 겉돌았다. 금방이라도 뚝 굵은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하늘이다. 온몸을 감싸는 습기가 무거운 탓인지 괜히 몸은 무언가에 짓눌리듯 찌뿌둥했고, 마스크로 뚫고 들어오는 공기의 맛은 쌉싸름하게 느껴졌다. 여름이다.

 

뚜벅뚜벅.

 

문래역 7번 출구로 나와 쭉 걸었다. 그러다 마주한 갈림길 하나. 서 있는 나를 기점으로 왼쪽은 골목길, 오른쪽은 큰 길가였다. 고즈넉하고 조용한 골목길을 선호하기에 주저 없이 왼쪽을 택했다. 들어선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확 몰려왔다.

 

마주한 풍경은 다소 낯설고 기괴하게 느껴졌다. 스릴러 영화에나 나올 법한 으슥한 건물들이 옹기종기 잇달아 이어졌다. 어떠한 색도 찾아볼 수 없다. 그 안을 들여다보니 가게의 높이만큼 거대하고 긴 철로 된 막대들이 한곳에 뉘여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특유의 금속 냄새가 훅 스며들었다. 사방에는 찌지잉 하고 찌릿하고 쨍한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마치 매미 우는소리와 비슷하게 들려, 아직 오지도 않은 매미를 그곳에서 마주한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눈, 코, 귀까지 온몸의 감각을 무자비하게 자극하는 공간이었다.

 

그렇다. 이곳은 철공소 공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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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곳에 놀랍게도 예술인들의 공간과 다양한 예술 작품들이 잘도 숨겨져 있다. 골목길 곳곳에는 주제도 일관성도 없어 보이는 그래피티, 벽화들이 보이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예술의 흔적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렇게 회색빛 철강 골목에서는 신선함을 넘어서 당황스러울 만큼 돌발스러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상해도 어쩔 수 없다. 이미 당신은 이상한 문래창작촌의 예술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예술 조각 01 펄럭이는 오색빛 무언가



골목길을 따라 걷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이상한 것'은 마침 부는 바람을 따라 잔잔히 펄럭이고 있었다. 주변을 가득 메운 회색빛 사이에서 유일하게 색을 띠는 무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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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뭐지?' 오색빛으로 펄럭이는 무언가가 있다고 추정되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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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놀랍게도, 강렬한 색의 그래피티 철문 바로 옆에 쨍한 보라색 현수막이 하나 보였다. 상단에는 '백화요란- 김연태 개인전' 그리고 하단에는 '대안예술공간이포'라고 적혀있었다. 놀랍게도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갤러리였다.

 

중앙 사진이 갤러리 입구다. 별로 들어가고 싶은 입구는 아니다. 골조만 남은 듯한 건물에 벽은 세월의 흐름만큼 다 뜯어져 금방이라도 으스러질듯하다. 오른쪽 사진을 통해 입구 옆 상황도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다. 검붉게 녹이 슨 철공소 대문들이 가지런하게 포개어 누워있는데 그 광경을 보는 순간 긍정 회로는 멈췄다.

 

'누가 여길 와.' 속으로는 한탄하면서도 지금껏 걸어온 걸음이 아쉬워 꿋꿋이 계단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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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태 개인전

 

 

김연태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개인전은 건물의 모든 층에서 이루어졌는데, 아쉽게도 작가님도 사람도 한 명 없이 빈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힘 없이 떨어져 있는 그림이 눈에 띄었다. 누군가의 돌봄 없이 저렇게 외롭게 걸려있는 천들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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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태 개인전 작품

 

 

그는 다양한 천의 재질 색 패턴들이 좋아서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 한다. 이미 먼 길을 돌아온 천들 위에 그는 그림을 그리고 판화를 찍기도 하고 천들을 두 개 세 개로 겹치거나 묶어서 입체적인 설치작업으로 만들어 나아간다. 천의 늘어지고 펄럭이는 자유로운 형태는 덤으로 얻어진 결과라고 말한다.

 

(중략)

 

그가 그리는 천의 이야기는 의도된 내용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얼음 위에서 저절로 미끄러져나가는 피겨스케이팅이나 자신도 모르게 천 안에 그려져 나가는 자동기술법과도 같은 작업이다. 작가의 기억과 상상과 경험과 지각과 느낌 그 모든 것들이 천위에 새겨진다.

 

- 전시 팸플릿 내용 (황주리, 화가/'천에게 말을 걸다') 본문 中

 

 

하나하나 겹겹이 엮여진 다른 질감과 다른 색의 천들, 멋대로 얽히고설킨 다양한 색을 가진 실들의 꼬임, 자유분방함이 느껴지는 물감의 흔적까지. 천에 수놓인 모든 것들은 김연태 작가의 예술 세계를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때로는 행복해 보이고, 때로는 외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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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층씩 올라설 때마다 전시가 연결되는 구간에 심심치 않게 설치해둔 작품들도 눈에 띈다. 다만, 이전에 화장실로 쓰였던 것처럼 추정되는 이 공간에 굳이 작품을 두었어야 할까 싶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잘 꾸며진 공간이 아니더라도 이미 존재하는 공간을 적극 활용하여 작품을 보일 수도 있다는 도전적인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역시나 이질적인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다.

 

마저 옥상으로 올라서는 벽 쪽에는 이전에 진행했던 갤러리의 흔적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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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사진의 벽에는 어떤 특정한 문양을 잉크로 찍어낸 듯한데 어떤 의도가 담겨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곳곳에 갈라진 벽, 녹아내리듯 빛바랜 잉크의 색, 그리고 드문드문 지워진 흔적들로부터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음을 추측할 뿐이었다.

 

오른쪽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전시와는 무관한 어떤 예술가의 흔적이었다. 벽의 갈라진 페인트를 의도적으로 뜯어내어 어떤 외투 형태의 모양을 만들어냈는데, 그 형체가 꽤나 뚜렷하다. 나라면, 갈라져 버린 페인트 조각이 거슬려서 다 뜯어버리거나 다시 새로 페인트칠을 했을 텐데, 같은 벽을 본 어느 한 예술가는 그것마저 작품으로 만들어 낼 생각을 하다니 그의 기발한 발상에 머리 뒤통수를 한대 맞은 기분이었다.

 

드디어 옥상이다. 펄럭거리던 오색빛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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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천'이었다. 저마다 다양한 자태를 뽐내는 오색빛깔의 천들이 하나씩 철대에 걸려 있었다.

 

옥상은 김연태 개인전의 최정점을 장식하는 하이라이트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보통 이러한 외부 전시는 대표적으로는 환경의 변화 및 날씨의 변동 때문에 제약적인 부분이 더 많지만, 그럼에도 외부 전시를 고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오히려 예측불가한 자연의 힘 덕분에 자연스럽게 연출되는 부분이 있고, 그것으로 전하는 메시지가 극대화되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아스라이 비치는 햇빛, 스르륵 불어온 바람, 또는 외부를 둘러싼 공간 자체가 주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 나름 외부 전시의 멋이 존재한다. 이곳도 그랬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오색빛깔의 천들이 바람 따라 천천히 나부꼈다. 실내에서 환풍기 바람으로 인해 일률적으로 흔들리는 천과는 완전히 다른 움직임이었다. 격렬한 바람이 불 때에는 앞뒤로 다른 색의 천들이 꼬였다 풀리기를 반복했고, 가벼운 바람이 불 때에는 무거운 천은 부동자세를 유지했지만 가벼운 천들은 그마저도 살랑였다.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서도 저마다 펄럭이는 천들의 자태가 모두 다 달랐다. 조용히 나부끼는 천들이 주는 묘한 안정감에 나도 모르게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찌이잉. 아까 들었던 그 소리다. 철들이 열심히 갈리고 부딪치는 소리. 분명 옥상 아래쪽이다. 그제서야 시야를 더 넓게 돌릴 수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옥상 위 하늘 풍경, 그 아래 회색빛 건물들. 다행히 주위에 있는 건물들은 그리 높지 않았기에 한눈에 옥상 아래의 풍경이 내려다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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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까지 철공장이 둘러싸인 길가에 서서 위쪽에 펄럭이는 오색빛의 무언가를 보는 것도 이질적이라 느꼈지만, 지금 그 오색빛의 천들을 보고서 다시 눈앞에 회색빛 풍경을 내려다보는 건 더 이상했다. 한 공간 안에서 시선을 위아래로 바꿔 보는 것만으로도 색채의 온도 차이를 느낄 수 있다니 이유 모를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찌이잉. 겨우 접어든 마음속 고요를 깨뜨리는 소리였다. 자, 이제 다른 곳도 둘러보자.

 

뚜벅뚜벅.

 

 

 

예술 조각 02 공중에 매달린 사연 있는 행성 하나



골목길 끝에 다시 큰 길가로 빠져나오다 멈칫하고서 눈길과 발길을 붙잡은 것이 있었으니. 희미하게 보였지만 분명 무언가가 매달려 있었다. 힐끗 보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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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무채색에 묻혀 그냥 지나칠 법도 한데 그럴 수 없었다. 짙은 은색 빛의 선들이 얽히고설켜 확실한 꺾임이 있고 뚜렷한 형태가 예사스럽지 않았다. 마치 우주에 있을 법한 행성과도 비슷한 형체였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공중에 저런 물체가 달릴 것이라고 누가 예상하며 걸었겠는가.

 

다만, 하나 의문인 것은 이것을 설치 미술이라고 보아야 할까, 아니면 그저 보기 좋게 엮어놓은 물체라고 보아야 할까였다. 주변에는 해당 물체에 대한 어떤 설명도 없었고, 된통 이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이곳에 오래 산 문래 주민이 있었다면 모를까. 나름대로 인터뷰를 해 볼 수도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지나다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저 바로 물체 아래 희미하게 남겨져 있는 벽화의 흔적으로나마 그때 당시 생생히 살아있던 이전의 풍경을 추측할 뿐이다. 분명 이곳에 어떤 역동적인 작품을 그리고 설치했으리라. 그런 조그마한 상상력만 안고 아쉬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떠나면서도 하필 공중에 매달리게 된 사연이 궁금해서, 둥둥 떠 있지만 굳건히 이어져있는 행성의 잔상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예술 조각 03 알록달록 살아 숨 쉬는 골목



마저 큰 길가로 나오고선 대뜸 눈앞에 보인 횡단보도를 건넜다. 또 다른 골목길이다. 문래에는 이렇게 건물과 건물 사이마다 좁게 터놓은 골목길이 참 많다. 그만큼 숨겨진 갤러리, 카페, 음식점, 소품샵도 많다. 내가 발을 디딘 이곳은 갤러리와 카페를 동시에 운영 중인 '갤러리 문래'가 있는 골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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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김지은 아티스트, 공간의 기억/ 2021

 

 

들어서자마자 알록달록한 벽화가 눈에 띄었다. 그 위에는 흰색 물감으로 김지은 아티스트, '공간의 기억', 2021이라 쓰여있었다. 이렇게 무심히 쓰여있는 아티스트의 이름을 보면 괜히 더 궁금해진다. 어쩌다 이런 그림을, 여기 상점 옆에 그릴 생각을 하게 됐냐고.

 

자칫하면 정신없게도 보일 수 있는 다양한 색들의 향연은 오히려 화려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벽화의 존재만으로도 골목길의 입구가 환히 트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려보았다. 철문 하나와 자전거가 샛노랗게 색칠되어 있다. 배경화면 사진으로 손색없을 정도의 잘 연출된 배경 같았다. 알고 보니, 이미 이곳은 문래창작촌의 포토 스폿으로도 꽤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이후에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혼자서 골목길을 돌아다녔다. 외부 내부 가릴 것 없이 생각보다 숨은 갤러리들도 많았고 곳곳에서는 다양한 벽화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지쳤다. 이제 집에 갈래.

 

 


예술 조각 04 처량하고 씁쓸한 기린이 우뚝


  

문래역 7번 출구로 되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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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麒麟) 버려진 공구/ 68x96x190/ 2013년

 

 

정체를 알 수 없는 다양한 공구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몸통은 파란색에, 전체적으로 공구 자체의 짙은 회색빛이 크게 차지하지만 유일하게 다리는 검붉은색이 약간씩 돌기도 한다. 합체된 모습은 분명 어떤 동물의 형체 같아 보였다. 그러나 작품 아래 적힌 명판을 보기 전까지 그 정체를 정확히 가려낼 수 없었다.

 

 

재주와 능력이 뛰어난 아이를 가리켜 기린아(麒麟兒)라고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기린은 '훌륭함'을 의미한다. 기린은 상상 속 전래 동물로서 사슴의 몸에 소의 꼬리, 말의 발굽에 갈기를 지니고 있다. 작가는 망가진 기계 부품, 폐철, 철 가공 도구들을 활용하여 뛰어난 기술을 지닌 장인들을 표현했다.

 

- 명판에 적힌 내용 中

 

 

상상 속 전래 동물, '기린'을 나타낸 정크 아트다. 정크 아트란, 일상생활에서 나온 부산물인 폐품을 소재로 제작한 미술 작품을 말하는데, 명판에 적혀있듯 영등포 경인로 일대 도시 재생 주민공모사업으로 제작 및 설치되었다고 한다.

 

'주민들이 소중히 여기는 작품이에요'라고 표시될 정도라니, 나름 뜻깊은 작품에 흠칫했다. 겉보기에는 절대 미적으로 아름답다는 생각도, 어떠한 상징이나 의미가 가득 담겨있을 거라고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중요한 작품이라면 자랑스럽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법도 한데, 떡하니 보도 가장자리 쪽에 외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지나다니는 누구도 그 존재를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애매한 위치였다. 심지어 나조차 처음에는 모르고 지나쳤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어코 발견해냈을 정도였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닌가.

 

오랜 문래 주민, 문래 토박이 동생에게도 물었다. 돌아오는 답은 질문이었다. '그런 게 있어?'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는 동생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헛헛해졌다. 문래역과 집 사이를 몇 번이나 지나쳤던 문래 주민들은 과연 이 작품에 대해 얼마나 알까, 존재는 알고 있을까, 괜한 걱정 어린 호기심에 마냥 기분이 씁쓸해졌다. 동시에 기린이의 얼굴에도 씁쓸함이 가득해 보였다. 어쩌면 그런 눈치로 기린이를 바라보는 내 얼굴이 투영된 것일 수도.

 

뚜벅뚜벅.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든 생각. '그러고 보니 비가 안왔네. 우산도 들고 왔는데...' 항상 그러더라. 우산을 챙긴 날에는 꼭 비가 안 오고, 챙기지 않은 날에는 하필 온단 말이지.

 

*

 

더보기) 산책자의 시크릿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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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노톤을 띄던 문래창작촌의 거리는 한 명 한 명의 예술가들의 손길로 화려하게 채색되고 있었다. 곳곳에 스며든 오색빛깔의 색들의 향연은 문래창작촌의 '자유분방함', '다양성', '공존'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부분 중 하나다. 그건 또다시 문래창작촌의 정체성을 형성하기도 한다.

 

2. 문래창작촌은, 정해진 구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느슨하게 묶어진 공간이다. 입구와 출구가 불분명하다. 그러니 골목길을 마주했다면 마음 가는 대로 이곳저곳 쑤시며 돌아다니길 추천한다.

 

3. 천천히 걸어 다니며 숨은 예술 조각 또는 흔적 찾기를 해 보라. 마치 보물 찾기를 하듯 말이다. 골목마다 어떻게 꾸며냈는지 다채로운 예술의 흔적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할 것이다. 다만, 어두워지면 외부에 있는 오색빛의 벽화나 작품들을 제대로 향유하기 어렵기 때문에 꼭 해가 비치는 낮에 방문하길 바란다. 이상하고 기묘하지만 그런대로 이색적인 풍경을 경험할 수 있다.

 

 

*

당신은 오늘 어떤 예술 조각을 마주했나요?

 

*산책자의 덧붙이는 말: 우연히 마주치는 일상 속 예술 조각의 자극에 대해 자주 얘기하고자 합니다. 

'이런 것도 예술이라고?' 마음의 소리를 외치는 이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찬찬히 즐겨주세요.

 

 

 

아트인사이트 신송희 컬쳐리스트.jpg

 

 

[신송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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