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흑과 백, 그 모호한 경계에 대하여 [도서/문학]

'케이트 쇼팽'과 <데지레의 아기>
글 입력 2021.07.13 14:31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이 글은 <데지레의 아기>의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31.jpg

 


날씨가 상쾌하였기 때문에, '마담 발몽데'는 '데지레'와 아기가 살고 있는 저택으로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4주 동안이나 아기를 보지 못한 마담 발몽데는 아기를 안고 있는 데지레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발몽데 부부가 사랑해 마지않는 데지레는 그들이 길에서 데려온 아이였다. 혈육이 없었던 발몽데 부부는 데지레를 자비로운 신이 보내신 선물이라고 믿었고, 데지레는 그들의 애정 어린 보살핌 아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 이러한 데지레에게 한눈에 반한 '아르망'은 그녀의 모호한 출생은 개의치 않고 결혼을 진행했다.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는 부부는 결혼 후 첫 아이까지 얻어 앞으로 꽃날만 가득할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아르망은 데지레를 피하기 시작했고, 흑인 노예들도 그녀를 미묘하게 다르게 대하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른 채 슬퍼하던 데지레는, 자신의 아기를 돌보던 쿼드룬 노예 아이(흑인의 피가 1/4 섞인 혼혈인)를 보고 마침내 그 이유를 깨닫는다. 자신의 아기의 피부색이 쿼드룬 노예 아이의 피부색과 같았던 것이다.

 

데지레는 곧바로 아르망을 찾아가 자신은 백인이라며 애절하게 호소한다. 하지만 아르망은 그녀의 모호한 출생을 들먹이며 이미 그녀가 순수 백인이 아님을 단정지었고, 데지레에게 아이와 떠날 것을 명령한다. 남편의 냉대에 지친 데지레는 그의 명령에 순순히 따른다.

 

 

 

페미니즘 소설의 선구자, '케이트 쇼팽'


 

케이트 쇼팽.jpg

 

 

<데지레의 아기>를 쓴 케이트 쇼팽은 여자 어른들이 많은 가정 환경에서 성장했다. 집안의 여자 어른들은 그녀가 독립적인 여성으로 자라도록 교육시켰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오스카 쇼팽과 결혼한 케이트 쇼팽은 뉴올리언스에 정착했으나, 남편의 면화중개사업이 실패하면서 생계가 어려워졌다.

 

뉴올리언스에서 더 이상 생계를 꾸려나가기가 힘들다고 판단한 그녀는 루이지애나로 이주하여 가족과 함께 여러 개의 작은 농장과 잡화점을 관리하는 일을 시작한다. 이곳에서 습득한 크레올 문화는 훗날 쇼팽의 작품에서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1882년에 남편이 사망하자, 케이트 쇼팽은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어머니가 계신 고향으로 돌아간다. 쇼팽은 세인트루이스 세계박람회를 관람하던 도중 뇌출혈로 쓰러져 54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케이트 쇼팽은 20세기 페미니즘 소설의 선구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다양한 생활 양식을 경험해 19세기 후반 미국 사회를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통찰력과 이해력을 지녔었다. 주로 여자들의 손에서 양육된 가정 환경과 남편의 사업 실패 후에 이주한 곳에서 경험한 크레올 문화가 그녀가 소설을 집필할 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를 바탕으로 쇼팽은 작품 속에서 여성을 욕구와 갈망을 지닌 개인이자 주체로 묘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대를 앞서나간 그녀의 작품들은 수많은 비판을 마주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여성상에 어긋나는 풍조를 조장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수 십년이 지난 현재에 그녀의 문학성은 페미니즘 소설의 중요한 초석을 닦은 것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페미니즘 시각에서 바라본 <데지레의 아기>


 

케이트 쇼팽은 <데지레의 아기>를 통해 당시 뿌리깊었던 성차별 문제를 꼬집고 있다. 이 소설이 발표되었던 시대에 여자의 인생이란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해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었다. 여자란 자고로 집안에서 결혼, 출산, 그리고 육아에 힘쓰는 것이 도덕이자 의무였다. <데지레의 아기>에도 이러한 가부장적인 풍조가 잘 드러난다.


 

"그는 사악한 영에 갑작스럽게 사로잡힌 듯 노예들을 다루었다.”

 

 

데지레의 남편, 아르망은 많은 흑인 노예들을 부리는 대농장주이다. 흑인 노예들에게 가혹하기로 유명했던 아르망은 아이가 생긴 기쁨에 잠시나마 그들을 무자비하게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아르망은 데지레와 아이를 피하기 시작했고, 노예들을 다시 엄격하게 대한다. 이러한 아르망의 권위와 절대적인 힘은 그가 노예 농장주이자 백인 남성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1. “그 의미는,” 그는 가볍게 말했다. “아기가 백인이 아니라는 거요. 그 의미는 당신이 백인이 아니라는 거요.”


2. “갈까요, 아르망?” 그녀는 고통스러운 긴장 상태에서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그렇소, 가시오.” “내가 가기를 원하세요?” “그렇소. 당신이 가기를 원하오.”


 

데지레가 혼혈 피부의 아기를 낳은 것을 확인한 아르망은 아내에게 흑인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것임을 주저없이 단정짓는다. 데지레는 자신의 피부색은 하얗다고 절망적으로 외치지만, 남편은 데지레를 차갑게 외면한다. 자신이 백인이 아님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아르망의 모습에서 남성 권위주의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아르망은 집안의 명예를 더럽힌 데지레에게 떠나라고 명령한다. 늘 아르망에게 순종적이었던 데지레는 남편이 자신과 아이를 내칠 때에도 군말 없이 따르는데, 소설 속에서 데지레의 삶이 오로지 남편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데지레는 곧 당시 미국 여성들의 표상이었다. 아르망이 데지레의 아름답고 순종적인 모습을 사랑했던 것처럼, 여성은 남성의 시선에서 그저 순종적이고 사랑스럽기 만한 타자로 고정되었다. 즉, 남성이 정의하는 '여성'이 아닌 여성은 존재 자체를 부정당할 수 밖에 없었다.

 

절망한 데지레는 깊게 흐르는 강둑을 따라 무성하게 자라난 갈대와 버드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기와 함께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인종차별적 시각에서 바라본 <데지레의 아기>


 

인종차별 문제는 <데지레의 아기>에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주제이다. 작품 속 노예, 검둥이와 같은 단어들은 <데지레의 아기>가 백인이 흑인을 노예로 부렸던 시기의 남부 대농장을 시·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케이트 쇼팽이 남편의 사업 실패 후 노예제도 풍습이 남아있던 루이지애나에서 살았던 경험을 담아내고 있다.


 

부드럽게 빗질 된 뒷마당의 한 가운데 커다란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 장작더미는 이미 값비싼 아기 용품들을 한 무더기 먹어 치운 상태였다. ···· 레이스들, 자수품들, 보넷 모자와 장갑들도 있었다. 혼수 용품들은 아무 드문 귀한 것들이었다.

 

 

데지레가 떠난 후, 아르망은 데지레와 아이의 물건을 모두 태워버린다. 여기서 아르망이 그만큼 흑인을 경멸하고 혐오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성행했던 시대에는 흑인의 피가 섞인 것을 저주로 여겼다. 노예제도와 대농장들이 잔존해있던 루이지애나에 흑인과 백인의 혼혈인 '뮬라토'들이 많았는데 말이다. 흑인 노예들의 노동으로 부를 축적한 아르망은 흑인의 피가 흐르는 존재들의 흔적을 모두 지워버리고 싶었다.

 

 

“하느님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셔서 우리의 사랑스러운 아르망이 결코 그토록 좋아하는 어머니가 노예의 낙인으로 저주받은 인종에 속해 있음을 모르게 하신 것에 대해.”


 

아르망의 어머니가 아르망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던 구절이다. 편지는 아르망이 데지레의 물건들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편지 속 이 구절은 아기 혼혈에 대한 진실과 충격적인 반전을 암시한다. 아르망의 어머니는 흑인이었으며, 결국 흑인 혼혈이었던 것은 아르망이 그토록 의심했던 데지레가 아니라 자신이었던 것이다.

 

케이트 쇼팽은 주인공들의 정체성이 극적으로 반전되는 부분을 통해, 흑백이라는 색깔로 인종 간 우열을 나누는 것이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 주려 했다. 저주를 받았다고 비난했던 인종의 피가 흐르는 것은 흑인을 누구보다도 증오했던 아르망이라는 아이러니는, 망설임 없이 데지레가 흑인 혼혈임을 단정한 그의 남성적 권위를 와해시키는 것 같기도 하다.

 

 


'Black Lives Matter'과 'Stop Asian Hate'


 

결말에서 충격적인 반전을 읽고,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을 알게 된 아르망은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했다. 소설은 독자들에게 아르망의 생각을 알리지 않고 끝나지만, 결론은 한 가지였다. 흑백의 경계를 분명하게 가르며 백인 남성의 우월성과 권력을 공고히 하려 했던 남부가 사실은 모호함으로 가득한 위선적인 사회였다는 것이다. 케이트 쇼팽은 당시 미국인들이 이러한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려 했다는 인종주의의 어두운 면을 작품을 통해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케이트 쇼팽이 <데지레의 아기>를 출판한 지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피부색으로 인간을 차별하는 일은 여전히 만연하다. 하지만 변화는 점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의 인권 의식이 전반적으로 향상되면서 인종차별에 대항하는 사회적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Black Lives Matter'과 'Stop Asian Hate'이 바로 피부색으로 차별을 받는 인종이 외쳤던 슬로건이다.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라는 뜻의 'Black Lives Matter' 운동은 2020년 5월 26일, 미네소타주에서 '조지 플로이드'라는 흑인 남성이 체포되던 중 경찰의 무릎에 목이 눌려 질식사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재개되었다. 사건을 촬영한 영상이 SNS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면서 일명 'BLM' 운동에 불을 지폈으며, 국내외 대스타들도 모든 인종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Stop Aisan Hate'는 말 그대로, 아시아인을 향한 인종차별을 하지 말라는 캠페인이다. 이 시위는 2021년 3월, 미국 애틀란타에서 총기 난사 사건으로 사망한 8명의 희생자 중 6명이 아시아 여성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시작되었다. 중국 우한 시에서 발병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아시아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의 증가를 낳았다. 개인적으로도 코로나 시기에 유럽을 여행하는 아시아인 관광객들에게 'Corona virus'라고 조롱하는 유럽인들의 모습을 유튜브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인종차별은 국가와 시대와 인종을 관통하는 문제다. 저주로 여겼던 흑인의 피가 흐르는 사람은 흑인을 그토록 증오했던 아르망이었다는 아이러니는, 우리에게도 발생할 수 있다. 하등한 피부색이라고 비난했던 손가락질이 되레 자신에게 향할 수 있으며, 피부색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갖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봐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주체와 객체가 뒤바뀔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누구나 차별을 받는 타자가 될 수 있는 동시에, 차별을 행하는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최지혜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43750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1.09.27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부일로205번길 54 824호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1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