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재난과도 같은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정체성의 몰락
글 입력 2021.07.08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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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봤다. 왓챠(Watcha)에서 웨스턴 무비를 찾아보다가 관련 영화로 뜨길래 익숙한 제목에 이끌려 보게 됐다. 제목이 익숙한 영화니까 하는 호기심 반, 웨스턴 무비라니까 팝콘 무비겠거니 하는 기대감 반으로 말이다.


여러분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어떤 영화일지 짐작이 가는가? 나는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충돌을 그린 휴먼 드라마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왜 웨스턴 무비의 관련 영화로 뜨는지, 장르는 왜 범죄 스릴러인지 물음표가 가득한 상태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내게 남은 건 언젠가 내가 이 세계에서 스러져가는 무기력한 한 명의 노인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내가 믿어왔던 모든 상식과 규칙, 학습해온 규범 같은 것들이 어느 순간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말이다. 그것은 변화일수도 또는 실질적인 재난 일수도 있다. 그러한 '재난'들이 어느새 나의 일상 혹은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대한민국 전반에 스며들어 하나 둘 내게 익숙한 것들을 쓰러트리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이 나라에서 퇴장해야 하는 것일까.

 

 

 

미국, 그리고 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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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텍사스의 사막을 배경으로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한 안톤 슈거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를 체포한 보안관이 무참히 살해된다. 제목이 주는 적막하고 쓸쓸한 느낌은 영화 시작 5분 만에 깨진다. 배경음악도 없이 유혈이 낭자하는 서스펜스로 가득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보다 '놈놈놈' 혹은 '싸이코패스를 보았다' 같은 제목이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 장면이 계속된다. 그래도 영화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플롯 곳곳에서 말한다.


영화는 베테랑 보안관 '에드 톰 벨'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에드 톰 벨'은 1980년대 미국의 살인사건은 이유도 없이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일어난다며 한탄 섞인 말을 한다. 그를 증명하듯 '안톤 슈거'는 불필요한 물건을 정리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하나 둘 살해한다. '에드 톰 벨'이 목격하는 것은 '안톤 슈거'가 휩쓸고 간 살해현장 속 자잘한 증거일 뿐, '안톤 슈거'의 살해동기를 명백히 밝히지 못한다.


'에드 톰 벨'은 미국의 황금기를 함께 보낸 인물이다.  WW2 이후만 해도 미국은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정의로운 국가였다. 당시 미국엔 더 나은 미래, 살기 좋은 21세기를 만들자는 대의가 충만했다. 미국인들은 대의 아래 미래에 대한 낙관론적인 운명론을 믿었다. 암흑과도 같은 2번의 세계대전을 지나 인류에게 곧 평온한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 믿었지만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이 수호하던 정의는 모호해지고 사회는 히피들과 반전운동으로 혼란스러웠다.


'르웰린 모스'는 자부심에 상처 받은 미국인을 대표한다. 미국의 카우보이 복장을 고수하는 '르웰린 모스'는 베트남전을 참전했던 퇴역군인이다. 안톤 슈거의 습격에 온 몸이 너덜너덜해져도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해주는 건 웨스턴 셔츠와 청바지, 카우보이모자다. '르웰린 모스'는 어떠한 위협도 능히 이겨내리라는 자신감과 함께 자신만의 방법으로 안톤슈거에 대응하지만 예상치 못한 멕시코 갱들의 습격을 받고 죽는다.

 

'안톤 슈거'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를 특정 지을 수 없는 인물이다. 북유럽 어딘가에 있을듯한 이름, 동유럽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슈거'라는 성은 그가 특정할 수 없는 위협이라는 점을 더 부각한다. '안톤 슈거'의 방아쇠에는 살해목적이나 동정,  도덕적 논의가 끼어들 틈이 없다. 그의 총알은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자연재해처럼, 어느새 미국인들의 가슴을 뚫을 뿐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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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 톰 벨'은 더 나은 세상이 될 것이라는 운명론적 희망에 기대어 보안관 일을 해왔지만 달라진 세계는 이전의 방법으로 범죄를 예방하기 힘들어졌다. 세상은 노인인 그의 지혜로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급격히 변했다.

 

'르웰린 모스'는 미국이 정의를 수행하기 위해 치른 베트남전의 참전용사다. 하지만 패전 이후 사회로 돌아왔을 때 그가 지키고자 했던 미국의 정의는 무너져가고 있었다. 황량한 텍사스 사막에서 그가 지킬 수 있던 것은 미국인이라는 자부심뿐이었다. 그렇기에 카우보이 복장을 고수하며 살아가지만 위협이라 생각한 '안톤 슈거'가 아닌 멕시코 갱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에드 톰 벨'과 '르웰린 모스'를 덮친 변화 혹은 위협은 그들이 삶의 준거방식으로 세웠던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다. '안톤 슈거'가 국적 불문의 인물이듯, 그들이 맞이한 모든 상황들은 재난과도 같다. 어디서부터 왔는지, 언제부터 그들에게 스며들었는지 불분명하다.

 

1980년대 미국의 상황은 그러했다. 미국이 지켜온 가치가 하나 둘 무너지고 있었다. 1969년 샤론 테이트가 찰슨 맨슨 일당에 의해 살해당하고 난 이후 미국 사회 속에서 싹튼 불운한 기운이 아메리카 대륙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것은 2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미국이 외부의 적들로부터 수호한 '정의'와는 다른 내부의 적들이었다. 그리고 베트남전의 패배 이후 미국 사회가 지킨 정의와 지혜는 더 이상 유호하지 않았다.

 

'안톤 슈거'는 미국인들이 겪은 혼돈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더 나은 세계에 살 거라는 낭만적인 운명론의 파괴자이자 미국 사회 내에서 피어나는 혼란을 그 자체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런 '안톤 슈거'도 영화 종말부에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로 큰 중상을 입는다. 모든 것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는 영화의 메시지를 의미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노인'은 시간의 경과에 의해 나타나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은 거부할 수 없는 순행, 즉 운명이다. 시간은 노인과 청년을 구분짓고 세대를 구분짓는다. 하지만 '에드 톰 벨'과 '르웰린 모스'가 겪은 일들은 운명과는 무관하다. 혼란(Chaos)는 운명을 배제한다. 거대한 혼란 앞에서 인간은 무력해질 뿐이다. 혼란에 집어삼켜진 이들 모두 나이와 상관없이 노인이 될 수 있다. 그건 운명이 개입할 수 없는 부분이다.

 

 

 

누구나 노인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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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은 당시 미국인들이 꿈꾸던 정의로운 미국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꿔 말하자면 지금 지구에 발을 딛고 사는 모든 인간들이 꿈꾸는 낭만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불의의 사고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수 있다.

 

COVID-19의 영향이 생각 이상으로 오래 지속되고 있다. 과거 신종플루, 메르스 등을 겪으며 이번에도 의연하게 넘기겠거니 했지만 팬데믹 상황이 벌써 2년 차에 접어들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고수해온 모든 것들이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다행이게도 인류는 생각 이상으로 잘 적응하고 있다. 다만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을 안은 채 말이다.

 

이렇듯 불운은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 내가 사랑하는 문화와 예술들이 구식의 것으로 취급받고 시간에 침식되어 가는 것은 인정할 수 있으나 어느 순간 내가 세상이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노인'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울적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MZ세대라는 단어에 큰 회의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이전 세대에 비해서 디지털 기기나 새로운 환경에 익숙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어느 정도 내가 예측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일어난 일들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세상이 규정짓는 MZ세대의 모든 습성들이 나와는 맞지 않았다. 만일 내 예상을 벗어난 변화들이 나를 덮친다면 내가 온전히 나의 목소리를 내며 두 다리로 서 있을 곳은 어디일 것이다.

 

새로운 변화(NEW WAVE)는 누군가에겐 기회 일수도 누군가에겐 재난일 수도 있다. 적어도 나에겐 COVID-19이 만든 상황은 피할 수 없는 비상사태였다. 앞으로 이러한 일이 또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보장도 없다. 나를 더욱 무섭게 하는 것은 COVID-19이란 재난보다 그 이후 몰려올 폭풍들이다. 적어도 MZ세대는 나를 포용할 수 없는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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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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