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시인의 눈을 갖고 싶을 때 - 시가 인생을 가르쳐준다 [도서]

그래, 아름다운 것은 짧은 법!
글 입력 2021.07.04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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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것들만 내게 주겠다는 너를 보면, 좋은 노래만 추렸단 모음집이 떠올라. 예쁜 모습만 보이는 것도 나쁘진 않아. 하지만 나는 베스트 앨범은 사지 않아."

 

가을방학, <베스트 앨범은 사지 않아>

 

 

CD와 바이닐을 모으는 취미가 있다. 바이닐 같은 경우는 중고라 할지라도 그 세월이 담긴 가치 때문에 값도 만만치 않은 경우가 많아서, 왜 그 음반을 소유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구매하려고 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해당 앨범에 담긴 전곡에 애정을 담고 있을 때만 구매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보통 음반을 선택할 때면 그 중 애호하는 곡이 몇 개가 있기 마련이고, 그 곡들을 얼마나 좋아하느냐에 따라 구매를 결정했다. 그 후, 종일 한 앨범만을 반복 재생하다가 우연히 다른 노래로 빠져들게 되는 순간을 즐겼다.

 

최고로 손꼽히는 곡들만 추려 만든 베스트 앨범은 어쩐지 끌리지가 않았다. 내가 듣지 않아도 다른 리스너들이 한 번쯤은 선택할 앨범이었기에 외로울 일 없어 보였고, 우연히 좋은 곡과 마주할 기회를 놓치는 것 같았다. 시도 그랬다. <한국인이 사랑한 명시 100>, <치유의 시 50선> 짧은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대충 이런 제목의 시들은 무언가 정이 가지 않았다.

 

 

입체표지.jpg

 

 

그러나 나태주 시인의 [시가 인생을 가르쳐 준다]라는 모음집은 그런 짧은 생각을 조금 바꿔주었다. 청년, 장년, 노년, 유년의 순으로 시들을 배열하여, 인생을 네 단락으로 나눠 섬세하게 선정한 한 시인의 인생 시들은 그의 아름다운 시선을 따라갈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국민 시와 직접 수집해 간직하던 희귀 명시들의 뒷면에는 시인에 대한 소개와 나태주 시인의 짤막한 해설이 덧붙여 있었고, 그것은 시를 보다 심도 있게 감상하도록 도왔다. 내가 인상적으로 읽었던 몇 개의 시들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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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 시인 나태주

 

1945년 충남 서천군에서 태어나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한 후 43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공주 장기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교직 생활을 마친 뒤, 시작에 전념하고 있다.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대숲 아래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으며, 등단 이후 50여 년간 끊임없는 창작 활동으로 수천 편에 이르는 시 작품을 발표해왔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로 「풀꽃」이 선정될 만큼 사랑받는 대표적인 국민 시인이다. 그동안 펴낸 책으로는 시집, 산문집, 동화집, 시화집 등 100여 권이 있으며 공주문화원장을 역임했고 현재 한국시인협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김달진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박용래문학상, 유심작품상, 한국시인협회상 등을 수상하였다. 현재는 공주에서 공주 풀꽃문학관을 설립·운영하고 있으며 풀꽃문학상, 해외풀꽃시인상, 공주문학상 등을 제정·시상하고 있다.

 

 

 

그래, 아름다운 것은 짧은 법!


 

 

여름밤은 아름답구나.

여름밤은 뜬눈으로 지새우자.

아들아, 내가 이야기를 하마.

무릎 사이에 얼굴을 꼭 끼고 가까이 오라.

하늘의 저 많은 별들이

우리들을 그냥 잠들도록 놓아주지 않는구나.

나뭇잎에 진 한낮의 태양이

회중전등을 켜고 우리들의 추억을

깜짝깜짝 깨워놓는구나.

아들아, 세상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많은

너는 밤새 물어라.

저 별들이 아름다운 대답이 되어줄 것이다.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 열 손가락에 달을 달아주마.

달이 시들면

손가락을 펴서 하늘가에 달을 뿌려라.

여름밤은 아름답구나.

짧은 여름밤이 다 가기 전에(그래, 아름다운 것은 짧은 법!)

뜬눈으로

눈이 빨개지도록 아름다움을 보자.

 

이준관, <여름밤>

 

 

‘여름밤은 아름답구나. 짧은 여름밤이 다 가기 전에(그래, 아름다운 것은 짧은 법!)’

 

비가 추적이는 여름밤, 창문을 열고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도중 이 문장을 발견했다. 여름을 아주 좋아하는 나에게 있어서 이 순간은 황홀함 그 자체였다. 이후 이어지는 ‘뜬눈으로, 눈이 빨개지도록 아름다움을 보자.’라는 문장에 재빨리 얇은 셔츠를 걸쳐 입고 우산 하나를 들고 나가서는, 집 앞 놀이터에 쭈그려 앉아 빗물에 축축하게 젖어가는 풀꽃들을 관찰했다. 벅찬 가슴으로 보고 또 봤다. 우산에 투둑 흩어지는 빗물과 처연하게 흔들리는 풀들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이 시를 읽으며 나는 괴테의 <사계 여름> 중 한 부분이 떠올렸다.

 

 

"왜 저는 쉽게 변하고 시듭니까? 오오 주피터여!"

라고 아름다움이 물었다.

"쉽게 변하고 시드는 것만을 아름답게 만들었느니라"

라고 신이 대답하셨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사계 여름> 중에서

 

 

아름다운 것들은 왜 기한이 짧고, 쉽게 변하고, 빨리 시들까. 그리고 왜 많은 이들은 여름을 그렇게 이야기할까. 왜 ‘여름이었다’라는 문장만 뒤에 붙으면 시절은 눈이 부시게 찬란해질까. 아마 여름의 속성에 이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3개월의 짧은 기한, 뜨겁고 열정적이고 담대했던 순간들, 강렬하게 햇볕을 내리쬐다가도 장맛비가 추적이고, 그러다 가을이 깊어지면 푸르르게 피어난 꽃들이 시들어버리는 계절.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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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시인은 이 시의 ‘그래, 아름다운 것은 짧은 법!’이라는 부분을 첫 번째 단락, 청년 시절의 제목으로 삼는다. 왕성한 의욕과 가능성이 빛이 나는 시절이라고 여겨서일 것이다. 여름밤은 역시 아름답다. 짧은 여름밤이 다 가기 전에, 우리는 열정적으로 밤을 지새우며, 이 순간을 충실하게 누려야 한다.

 

참, 이 <여름밤>이라는 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주는 이야기이다. 아버지는 짧지만 아름다운 여름밤을 맞이하는 자세, 즉,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눈이 벌게지도록 아름다움을 보는 방법을 아들에게 알려준다. 이 말은 곧, 뜬눈으로 여름밤을 지새울 열정과 투지가 남아 있는 한, 아버지의 시간도 청년 시절에 머무를 것이라는 사실이다. 청춘은 청년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나는 알 수 있었다.

 

 

 

섬으로 가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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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섬

 

 

딱 두 줄의 문장. 함축이고 일침이다.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인 이어령은 말한다. 피의 시대에서 땀의 시대를 지나, 이제는 눈물의 시대를 맞이했다고. 바야흐로 눈물의 시대다. 다름 아닌 위로와 공감을, 누군가 함께 흘려주는 눈물을 우리는 그토록 바라고 있다. 이 시는 펜데믹 이후로 소통의 부재에 대한 문제점들이 더 많이 제시되는 시기에, 공감과 연대의 가치에 대해 말하며 우리의 정신을 흔들어놓는 시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면, 사람들은 바다에 해당할 것이다. 섬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고 있는 육지이기에. 바다는 혼란스럽고, 종종 폭풍우가 몰아치기도 하고, 때로는 거친 파도가 몰아치기도 한다.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에서는 외로움마저 느껴진다.

 

그 재난의 피난처이자 외로움에서 잠시나마 구원받을 수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섬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소통과 유대, 공감과 연대, 감정적 교류, 사랑과 믿음 같은 요소들이 자리하는 곳 말이다. ‘그 섬에 가고 싶다.’ 검박한 이 한마디에 내가 고독을 느낀 이유는, 나 또한 진정한 소통을 사무치게 꿈꾸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태주 시인은 시는 시를 쓴 사람의 삶을 뛰어넘을 수 없고 인생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말한다. 애당초 시는 시인의 삶에서 출발하고, 그 사람의 하루하루 인생에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시는 스승이자, 고마운 동행이었다. [시가 인생을 가르쳐준다]에는 위의 시들을 제외하고도 심금을 울렸던 인상적인 시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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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을 읽기 얼마 전에, 유퀴즈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나태주 시인의 인터뷰를 보았다. 바쁜 나날들을 보내던 와중, 1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나태주 시인은 내게 여유와 편안함을 선물해주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말이 자연스레 입 밖으로 나오는 사람, 맑고 선량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 그는 시를 살아가다 영감이 찾아오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잡아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쓴다고 하는데,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그런 시가 순식간에 만들어지는지 궁금했다. 그를 보면서 나는 시인의 눈을 갖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사실 집에는 이미 나태주 시인의 시집이 다수 있다. 사랑하는 친구는 내게 교복을 입고 다니던 학창시절부터 시집을 자주 선물해주곤 했는데, 대부분 나태주 시인의 시집이었다. 모든 것에 달관한 태도로 일관하고 싶을 때, 세상에 짐짓 냉소적인 태도를 보일 때, 그 시집을 받아든 나는 다시 여름의 길목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시인의 시선을 따르며 나는 보던 것도 다시 봤으며, 뜨거워졌고, 오늘의 눈물을 아끼지 않았으며, 열렬히 사랑하고자 또다시 다짐했다.

 

아르바이트에서 퇴근할 때면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이라는 나태주 시인의 <행복>을 떠올리며 혼자서 부를 노래를 흥얼거렸고, 좋아하는 아이돌의 뮤직비디오를 보면서는 ‘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라는 그의 <내가 너를>이라는 시를 떠올리며 함박웃음 짓곤 했다. 내게 그런 의미인 시인이 선정한 인생 시를 읽은 것은 행운이다.

 

좋은 시는 어린이에게는 노래가 되고, 청년에게는 철학이 되고, 노인에게는 인생이 된다고 한다. 삶의 스승이자 동행이 될 수 있는 시를 만나고 싶은 이들에게, 선뜻 이 시집을 추천하고 싶다. 읽는 동안 맑고 고요한 호수에 빠져드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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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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