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의 속삭임] #3 알브레히트 뒤러

글 입력 2021.06.28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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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필진_큐레이션의 속삭임[썸네일]_#3 알브레히트 뒤러.png

Albrecht Durer


 

알브레히트 뒤러

(1471~1528)

 

15세기 당시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독일에 르네상스의 화려한 이상을 피워낸 예술가. 화가이자 판화가, 미술 이론가 등 여러 미술 분야에서 활약했으며 독립적인 정면 자화상 및 풍경화에 있어 '최초'의 타이틀을 지니기도 했다.

 

렘브란트, 피카소와 함께 3대 판화가로 불리었는데, 연작 목판화집인 1498년 작, <묵시록>으로 범유럽의 명성을 얻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미술계에 큰 영향을 주었고 1507년 작, <아담과 이브> 동판화 나체 습작으로 독일 화가 최초로 누드를 그려내기도 했다.

 

 

*


셀피(selfie)의 시대. 사람들은 SNS나 온라인 플랫폼에서의 업로드를 통해 스스로의 모습을 기록하고 또 기억하려 한다. 어느 분야에서든지 자기 자신을 브랜드화하고 선전하며 수많은 상황에서의 ‘나’를 만들어내는 게 더욱이 중요해진 시대가 오늘날 도래하게 된 것이다.

 

그런 셀피의 현재화에 있어 본문 글에서 다루게 될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표주자인 독일 뉘른베르크 출신의 예술가 [알브레히트 뒤러]는 21세기에서 6세기나 앞선 셀피의 선구자였다. 누구보다도 강한 자의식을 지닌 채 그림 밖 관객들에 어떻게든 시선을 맞추려 했던 뒤러의 의식 세계, 그런 그의 예술적 성취는 어떠했으며 살아온 나날과 어떻게 연관되어 나타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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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두 살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493, 56x44cm,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약 6세기 후인 2021년에 그를 마주해 인터뷰하였다면 과연 어떠한 질문을 건네보았을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본 연재 글은 알브레히트 뒤러와의 만남을 상상하여 쓴 가상의 문답과 서술로써, 필자 나름의 큐레이션을 자처한 세기의 인터뷰라 정의해볼 수 있을 것이다.

 

 


 

 

Scene 1_ 인터뷰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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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인터뷰는 이색적인 장소, 거울의 방에서 이루어졌다. 쳐다보기만 하면 본래의 자의식이 한순간에 발현할 것만 같은 여러 통로가 나를 비추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한편으론 과한가 싶기도 했으나, 인터뷰이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최선의 장소를 택한 것 같아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그가 걸어온다. 예술가의 향기가 느껴진다는 게 이런 걸까, 멀리서부터 한눈에 보이던 뒤러의 풍채를 보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점점 가까워져 마침내 반가운 인사를 나누니, 강인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따스한 온기가 눈동자에 담겨 반짝이는 듯했고 곧은 시선과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 일정하게 물결치는 머릿결의 형태에서 화가로서의 자부심과 열정이 강조되어 전해졌다.

 

*

 

위대했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이상을 독일에 처음 들여와 북유럽 르네상스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 사람. 예술가를 한낱 기술자가 아닌 한 명의 지성인으로 봐주길 바랐던 최초의, 최고의 화가를 눈앞에서 마주한 영광스런 순간이었다.

  

 


 

 

Scene 2_ 최선과 최고, 그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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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러는 금세공사인 아버지를 따라 교육을 받다 15세가 된 1486년부터 본격적인 화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스승인 미하엘 볼게무트로부터 종교화와 제단화, 목판화 등 미술의 여러 범주를 교육받은 4년의 시간이 도약을 위한 기점으로 자리한 것이었다. 그렇게, 아버지에게서 영향받은 금세공의 섬세한 묘사의 표현 방법과 그 이후 받게 된 전문 교육의 탁월한 결합은 미술사의 판도에 있어 뒤러를 명실상부한 엔터테이너로 우뚝 서게 했다.


수많은 예술적 능력 중, 그는 특히 전문교육을 받기 전 13살 무렵부터 독립적인 자화상을 그려온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는 특히 최연소 화가의 자화상이자 서양 미술사상 최초의 독립 자화상이었기에 보다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러한 이유로 인터뷰의 첫 순서에 넣어야만 했던 질문이었다.



Q. 당신에게 자화상은 어떠한 의미인가요?


자화상에 관련한 질문이 나오자 뒤러는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 숨기는 채 하며 미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불과 몇 초안에 표정을 진중히 고쳐 지은 걸 보면 개인적으로 반드시 답하고 넘어가고자 했던 물음이기도 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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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500, 67x49cm, 독일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그는 평판 유리가 등장하기 전, 왜곡점이 분명한 볼록 거울을 이용해 자신을 들여다보고 그려낸 것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지닌 채 그림을 그려왔다고 했다. 형체뿐만 아니라 본인의 성격, 의지, 태도와 기분 등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이미지를 생산해내야 했기 때문에 대표적인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Self-Portrait in a Fur Coat, 1500)’ 아래 적힌 “알브레히트 뒤러, 노리쿰 사람, 28세에 원래의 혈색 그대로 나의 초상화를 그렸다.”의 문구에서 알 수 있듯, 최선을 다해 예술 활동을 전개해나갔다고 답했다.


그리고선 덧붙여 말했다. 당시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정면의 독립 자화상을 그려낸 건, 본인을 포함한 화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함이었다고. 이전 시기인 중세의 성화에서 나타났던 포즈와 신비스러움을 인간에게 옮겨옴은 무에서 유, 즉 삼라만상의 피조물을 창조하는 신의 창조력과 예술가의 손길을 통한 2차원에서의 실현이 동일한 선상에 놓여있는 것으로 본 뒤러만의 독창성이었다.


더불어 자신을 대변해주는 영혼의 동반자와 같은 존재라 자화상을 칭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던 것이다. 회화와 비견될 정도로 판화 분야에서도 선명한 업적을 이뤄온 그였지만, 그곳까지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이 어쩌면 회화, 그중에서도 자화상이었기에 답변을 하는 뒤러의 눈은 빛에 반사된 것처럼 그 순간 가장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

 

Q. 동물과 사람, 풍경 등 자연계 전체에 큰 관심을 가져온 이유가 있나요?


한편, 뒤러는 사람에서 동물과 풍경까지 자연을 아우르는 모든 범주에 관심을 가졌고 인간을 둘러싼 모든 현상을 탐구하고 관찰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한 관심은 최초의 독립적 풍경 수채화인 1495년 작 <아르코 풍경>과 대표적인 1502년 작, <산토끼> 등에서 보인다. 자연계라는 전체적인 큰 틀에 부분적으로 파고드려 한 뒤러의 주안점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 결과 두 번째 질문이 뒤러에게 건네졌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진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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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끼> 수채, 1502, 25x23cm, 오스트리아 비엔나 알베르티나 박물관

 

 

그리고선 앞서 언급했듯 예술가의 창조적 능력을 가치 있게 바라본 그는 자연이 품고 있는 합리적인 질서와 미적으로 드러나는 무궁무진한 형상, 오색빛깔의 찬란함을 표현해내는 역할을 도맡는 게 아티스트의 일 순위 존재 이유라 생각한다 했다. 무질서한 듯 보이나 그 안에 순차적인 단계를 내재한 자연의 모든 면이 뒤러에게는 매력적인 아름다움의 표상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본 질문에 대해 한마디로 깨끗이 정리된 듯한 답변을 건네받아 더는 덧붙일 수 없었으나,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가야만 비로소 알 수 있는 신비함에 대한 동경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표면으로만 파악되지 않는 불편한 진실이 있기 마련이기에 그렇다.

 

뿐만 아니라 혈색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만큼 사실적이고 이상적인 개체를 그려내고자 했던 그였기에, 자연스러우면서도 여러겹의 단층으로 이루어진 복잡다단한 현실의 존재들을 시사하려 했던 뒤러의 의식 세계를 감지해볼 수 있었다.


*

 

Q.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길 바라는지 궁금해요.


어느덧 마지막 질문이었다. 뒤러는 앞선 문답에 진지한 태도로 임했던 탓인지 금세 기운이 빠진 듯해 보였으나 자세를 다시금 고쳐 앉았다. 그와 동시에 자신을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길 바란다고 했다. 위대한 사람보다는 미술계를 바라봐왔던 일부의 시선과 개념을 변화시키려 쉴 새 없이 움직여온 사람으로서 기억되길 바란다고, 그럼 충분할 것 같다고 말이다.


그 순간 만큼은 그의 얼굴에는 자화상에선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생기 가득한 미소가 묻어나 있었다. 최선과 최고, 그 사이에서 항상 걸어왔던 뒤러의 자화상이 내 눈 앞에 펼쳐지는 특별한 광경을 목격한 것만 같았다. 인터뷰를 통해 모든 걸 덜어낸 듯 그의 미소는 인위적인 기색이 없이 자연스러웠다. 마치 그토록 좋아하는 자연계 속에 풍덩 빠진 채 유영하는 사람인 것마냥.

 

 


 

 

Scene 3_ 북유럽의 레오나르도, 뉘른베르크 출신의 알브레히트 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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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이 가득했던 인터뷰 장소를 빠져나오며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 자체로 가득 차 있는 세상에 있다 온 기분이 들었다. 비록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은 분과 초를 함께했지만, 매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내는 수고로움과 그 결과로써 얻게 되는 수확의 달콤한 가치를 은연중 전해 받기도 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이 자연과학에 탐구 정신이 있던 뉘른베르크 출신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그의 이름을 따온 별명으로 불리었다. 손으로 무언가를 그려내기도 했지만, 호기심을 바탕으로 질적인 연구를 해나갔던 학자이기도 했다. 그렇게 시도에 시도를 거듭한 끝에, 그는 북유럽의 레오나르도가 아닌, 뉘른베르크 출신의 알브레히트 뒤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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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러의 서명

 

 

세상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굴해내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성실한 예술가이자 학자, 15세기의 다재다능한 엔터테이너로서 살아간 그를, 마침내 숨겨온 표정을 꺼내 웃어 보였던 뒤러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다.


*

 

"훌륭한 화가라면 내적으로 아주 독창적이어야 하며

영원히 살아남으려면 항상 뭔가 새로운 요소를 만들어내야 한다."

 

-알브레히트 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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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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