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우리와 함께한 집에 대해서
매일같이 지나던 길목에 위치한 낡은 빌라가 있었다. 익숙한 어머니의 이름을 빌려와 지은 듯한 미용실과 80년대 학생들이 머물렀을 것 같은 작은 하숙집 등 옹기종기 모여 붙은 그 빌라는 도시의 세련된 미는 없었지만,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는 장소였다. 그런데 오랜만에 다시 들른 그곳에 빌라는 없었다. 대신 흙으로 가득한 땅에 포크레인만 남아, 얇은 철이 그 주위를 두르고 있을 뿐이었다. 옆 신축 건물은 그대로였고 그 빌라만 허물어져 위가 텅 비었다.

ⓒ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
‘사정이 있었겠지’라며 생각을 해도 왜인지 모르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최근 서울시립 서소문본관에서 진행하고 있는 《기후미술관: 우리 집의 생애》 전을 보고 내가 느꼈던 그 싱숭생숭한 마음의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기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이 전시는 거대한 전 지구적 문제를 삶의 일부분의 문제로 느끼게 만든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하는 공공예술 프로젝트 <기후시민 3.5>가 개발한 콘텐츠를 토대로 전시가 기획되었으며, 약 30여 점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인류세 시기,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시의 제목처럼, 기후 문제를 ‘집’의 차원에서 설명한다. 첫 번째 집은 지구의 생태계라고 한다. 물 부족 국가이니 물을 아껴 써야 하는 것, 일회용품을 줄이는 것, 육류 소비를 자제하는 것 등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한 번쯤은 접해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전시는 이렇게 일반적인 말만 하면서 환경을 보호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현실의 문제들을 전시장 안으로 끌고 왔다. 서소문 본관 정문 앞에서 바로 보이는 <고사목 1>을 보면 떡 입이 벌어질지 모른다.

ⓒ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
고사목은 말 그대로 죽은 나무이다. 그런데 이 거대하고도 뽑힐 것 같지 않은 나무는 스트레스로 인해 죽었다. 백두대간 정암사 전나무 숲에서 자란 이 나무는 아고산대에서부터 시작한 침엽수 고사 현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세밀하게 겹겹이 쌓인 나무의 결은 그렇게 뜯기고 부서져 나갔다. 또 전시장에서는 어린 산양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연구ㆍ교육의 목적으로 박제된 이 산양은 빛나는 눈망울을 가지고 있던 동물이었다.
2010년 당시 한국 산양이 집단으로 서식하던 울진군 산악지대에서 무려 산양이 20마리나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산양은 “환경부에서 지정한 멸종위기 야생동물 1급이며 문화재청이 지정한 천연기념물 제217호”라고 하지만 현재 국내에서는 약 500~800마리가 남아있을 뿐이다. 절실히 보호해야 할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산양의 죽음이 끊이지 않았고 보호기관조차 부재한 현실이다.
<북극곰> 역시 실존적 존재로 만나볼 수 있다.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에 소장되어있는 박제된 북극곰은 북국의 빙하 가속 송도에 따라 디딜 땅, 살 집이 없어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전시장에서 빙하가 녹아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아름다운 소리일 수 있겠지만, 사실상 북극곰에게는 죽음이 앞당겨지는 폭탄 시계로, 인류에게 역시 극한의 더위 속에서 타들어 가는 땅의 죽음으로만 다가오게 된다.
녹색연합에서 제공한 <시멘트 채굴장> 역시 백두대간 자병산의 땅이 파괴되는 장면을 기록한 영상 작품이다. 드론을 통해 하늘을 내려다본 이 거대한 장면은 초록을 깎아버린 하얀 석회석으로 뒤덮여있다. 이는 시멘트 생산을 위한 것으로, “시멘트나 콘크리트는 채굴과 생산 유통, 공사, 폐기의 총체적 과정에서 가장 탄소 배출량이 많은 건설재”라고 한다. ‘이 정도는 필요해’라며 갉아 먹은 부분이 모여 거대한 자연환경의 훼손을 불러온 지금과도 닮았다.
이에 더 나아가 현실로 들어오게 하는 기후 위기가 있다. 바로 택배이다. 윤수연 작품의 <배송완료>이다. 앞서 <고사목 1>이 백두대간에서의 고사 현상으로 인한 거시적인 결과였다면 윤수연의 작품은 박스의 주원료가 ‘침엽수’임을 밝히면서 일상 속으로 위 문제를 환기한다. 온라인 주문을 통해 지금도 끝없이 생산되는 택배 상자들이 만들어지려면, 침엽수의 소비량이 얼마나 클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 지점이다.
지구온난화는 명백한 사실이며, 정상적인 녹지 비율 역시 기형적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이러한 시기를 일부 학자들은 ‘인류세’라고 부른다. ‘인류세’의 개념과 기준이 아직은 확실치 않지만, 인간이 지구에 인위적으로 영향을 주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마지막 시대를 부르는 지질학적 용어가 되었다. 그리고 예술계를 비롯한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인류세와 관련한 담론을 생산하고 있다.
집의 탄생과 소멸

전시의 두 번째 집은 우리가 살아가는 주택이다. 세계 탄소 배출량의 약 40%가 건설 산업에서 발생한다고 하니, 집을 짓고 부수는 주택은 기후 위기를 불러오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김대천과 강난형의 <주택 유령:1958-1983-2002>는 3D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으로 집이 지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 강난형과 <집의 체계 연구진>이 함께 한 <짓는 집의 사물>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집을 짓고 허무는 과정에서 배출한 것들에 대한 도표라고 한다.
또 테크캡슐의 <모든 것일 수도 아무것도 아닐 수도: 짓는 집, 부수는 집>을 보면, 집의 구성물질이 떠다니고 아파트의 구조가 투명하게 보인다. 미시적인 입자부터 거대한 도시의 모습까지, 유령과 같이 있다가도 없는 집의 상태를 보여준다.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집이 탄생하고 소멸하는 과정을 담았다는 것이다. 아래 작품은 집의 생애주기에 대한 이야기가 잘 녹아있다.
이성민의 <우리가. 있는 곳에. 나무가>라는 작품은 개포 주공아파트에서 살았었던 주민들의 추억을 담았다. 재건축이 진행되는 그곳에서 사람의 시간, 나무의 시간, 집의 시간으로 영상을 나누고 이를 세 개의 화면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 공간에 담긴 인간의 추억은 문명의 속도에 비례해 빨리 사라지지 않았고 나무들 역시 그곳에 살아있었던 시간이 잘려 나간다고 금방 사라지지 않았다. 그곳은 허물어가지만, 추억의 깊이는 훨씬 견고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세 말을 살아가는 지금, 우리도 기후와 환경 보호에 고려해야 할 사안들도 위와 같은 마음가짐을 갖고 다가서는 것이 어떨까? 개포 주공 아파트에서 살았던 그들의 이야기처럼, 현재 우리를 둘러싼 정원의 추억, 자주 드나들던 골목에서의 추억을 상기하면서 점차 지키고 싶은 범위를 지금 내 자리에서부터 확대해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미술관은 우리가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장에 투명하게 쌓인 페트병들과 캔 무더기들과 박제된 동물들을 보면서,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집을 망가뜨려 가는지 몸소 느끼게 된다. 또 이번 전시는 도록도 만들지 않고, 월페이퍼 역시 이면지를 활용하거나 망점 프린트를 이용해 종이와 잉크의 소모량을 최대한 줄였다는 점에서, 전시의 주제와도 일맥상통했다.

미술관을 나오며, 자주 드나들던 그 골목길의 빌라를 떠올렸다. 현실적으로 개발되어야 하는 곳임을 알면서도, ‘돈’이 안된다는 이유로, 때로는 과하다 싶을 만큼 새로 지어지는 건물들이 씁쓸했다. 많은 인간의 행위들이 자연의 수명을 갉아먹는 일이었으니, 인류세의 끝이 앞당겨지는 건 지극히 당연한 예상일지 모른다. 오랫동안 함께한 집에 대해서 더 이상의 나중은 없음을 상기하며, 부족하더라도 환경 보호를 실천하려는 이들이 모여 더 나은 내일이 되길 바란다.
* 전시장의 월텍스트를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