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지성과 관성 [문화 전반]

반(反)나이주의와 나이주의
글 입력 2021.06.22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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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에서 모교를 졸업한 필자는 우여곡절 끝에 겨우 상경에 성공했다. 물론 대학 합격 소식을 들은 직후 서울내기들이 득시글거리는 대학에 혈혈단신으로 똑 떨어지게 될 앞날을 약 0.05초 정도 걱정했지만, 19년간 이미 부산이라면 넌더리가 나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매우 행복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부산은 필자와 같은 인재 ― 인간재앙 ― 를 담기에는 그릇이 너무 작았다. 지난 3년간의 처절한 서열다툼에서 잘 살아남은 자신에게 바치는 축배를 들며, 1학년 1학기를 맞은 새내기 앞에 빛나는 밥약의 가호만이 있으리라는 굳은 믿음이 생겼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잠시 필자의 모교를 회상하자면, 단언컨대 그곳은 경상도 최고의 서열문화를 가진 곳이었다. 선배를 함부로 언니라고 불렀다가는 조리돌림 당하기 일쑤인데다, 선배들의 수능 디데이를 챙기지 않으면 여기저기서 뒷담이 오갔다. (다시 생각해도 너무나 즐거운 학교임이 틀림없다.) 그럼 선배들만 좋은 것이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았다. 동아리 선후배 간의 (반강제적인) 유대로 인해 재학생 선배들 뿐 아니라 졸업생 선배들도 종종 찾아와 맛있는 것을 사주기 때문이다. “후배 지갑을 열게 만드는 게 선배냐?” 라는 말이 공공연한 진리일 정도로, 필자의 모교에서 선배로 살아간다는 것은 명예와 함께 일정량의 책임을 요하는 일이었다. 필자 역시 한 사람의 선배로 2년을 살면서 ― 물론 나는 아무런 조공을 요구하지 않는 이상한 선배였기 때문에 말이 선배지 훌륭한 지갑 및 족보 셔틀이었다 ― 그런 책임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졸업 이후, 필자는 전공이 없는 광역생 신분으로 입학 직전에 OO반에 배정되었다. 그리고 심각한 혼란에 빠졌다. 이 공동체에는 나이에 의한 위계를 철폐하기 위해 선후배 사이의 모든 위계를 삭제하는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19학번과 14학번이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에서 이미 큰 충격을 받았는데 선배들과의 첫 밥약에서도 더치페이로 계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멋모르고 나간 첫 밥 약속(이하 밥약’)에서 계산을 할 때, 왜 본인 몫의 카드를 꽂지 않느냐는 선배들의 시선을 필자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수많은 사람을 사귀고 수많은 밥약을 다니던 3월 내내, 필자는 '내가 혹시 전산오류전형으로 뉴욕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내내 그려오던 모든 한국 대학 문화가 실시간으로 와장창 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필자는 도무지 적응이 불가능한, 하루하루가 너무나 짜릿하고 새로운 대학 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선후배 간의 더치페이는 정말 공평한가?


 

  선후배 간의 첫 밥약을 더치페이로 계산하는 문화에 대해 한줄평을 해보자면, 이상적인 인권보장의 끝이다. 이보다 더 서로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이가 곧 권력이라고 보는 나이주의사상에 반()하여 만들어낸 문화임을 잘 알고 있고 충분히 있음직한 문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로 밥약을 하는 상황에서 선배와 후배의 지위는 동등한가?밥 약속의 첫 단계부터 나이, 즉 경험에서 비롯된 힘이 작용한다. 필자의 학교가 외진 곳에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새내기들은 학교 근처에는 19년 평생 얼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코딱지만 한 대학 근처 상권에는 관심도 없었을 것이고 근처의 식당 같은 것, 알 리가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메뉴를 정할 때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은 선배의 기호이다. 후배들은 아는 식당이 없으므로 자연히 선배 먹고 싶은 걸로 먹어요라는 진부한 대사를 치게 되기 마련이다. 이때 후배들은 선배에 의해 선정된 식당의 가격대에 대한 선택권이 없다. 선배들이 처음 보는 후배에게 너 얼마까지 낼 수 있니?” 라고 물어보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이때 선배들은 철저히 본인의 기호가 반영된 식당에 아무것도 모르는 후배들을 데리고 가는 것이므로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애초에 밥약의 목적이 무엇인가? 선후배 간의 거리감을 없애고 친해질 계기를 만드는 것이다. 오가는 것이 있어야 친밀해지는 법이다. 그런데 더치페이 식의 만남에서는 고마움을 비롯한 아무 감정도 남지 않는다. 필자는 사람 간에 처음 호감이 생기려면 가벼운 부채감(負債感)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전혀 모르는 사람과 만나서 어색하게 대화를 나누고 각자 먹은 것을 계산한 뒤 집에 간다면, 그저 밥을 함께 먹었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닌 관계이지 않은가? 나한테 밥을 사주었다는 사실이 다음에 그 사람을 만날 자연스러운 핑계가 되기도 하고, 나한테 무언가를 해주었다는 고마움을 느껴야 나중에 무언가 나눌 수 있는 처지가 되었을 때 그 사람 생각이 잠시라도 날 것 아닌가

  이어지는 문단에서는 더 나아가서 이 문화의 시발점인 나이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필자 역시 계급주의나 나이주의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무조건 지양해야할 사상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이 필자의 사상은 꽉 막힌 사상이며요즘 같은 세상에서 옳지 않은 생각이라고 말한다면 그에 대해 딱히 반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그렇지만 필자가 아무 이유도 없이 파워 유교걸이라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능력주의에 기반한 나이주의에 찬성하는 것이다.

 

 

능력에 기반한 나이주의



  첫 번째, 사람이 살아온 시간과 경험, 그리고 능력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비례한다.

 

  학교생활이나 조직 생활에 있어서 경험의 차이는 곧 능력의 차이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여기서 능력이란, 간단히 말해 삶에 도움이 되는 정보 및 지식-삶의 지혜-을 의미한다새로 온 새내기들이 선배들과 자신이 대등하다는 인식을 가지면 본인들만 힘들어질 뿐이다. 어찌 되었든 정보가 더 많은 쪽은 1년이라도 학교에 더 오래 다닌 선배들이고, 그 정보가 필요하다면 아쉬운 쪽이 더 예의를 차려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대학 선배들은 후배를 도와야 할 법적인 책임이 없다. 새파랗게 어린 ― 여기서 어리다는 것은 나이에 국한된 개념이라기보다는 경험이 적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 후배가, 여기서 내가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얻은 지식을 달라고하는 처지인 주제에 마치 자신이 나와 대등한 사람인 양 말하고 행동한다면? 필자는 그를 기분 좋게 도와줄 자신이 없다. “고작 1년 더 산 게 얼마나 더 많은 지식이 있다고!” 라고 생각하는 대학생이 있다면 진지하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라. 몇 년 전, 고등학교 3학년 때의 당신은 수강신청을 하는 방법조차 몰랐다.

  물론 선배가 더 많은 정보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후배들의 기본적인 인권을 짓밟을 권리가 생기는 것은 절대 아니다.특히 초면에는 상대의 가치를 서로 알 수가 없기도 하고, 나이를 떠나 사람에 대한 예의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서로 존대하는 것이 287982987% 타당하다고 본다. 보자마자 말을 놓아버리는 사람은 비정상적인사람일 확률이 높다. 필자 역시 필자보다 더 오래 산 사람이 아니라 숨만 더오래 쉰 사람이라는 판단이 들면, 진심으로 존중하지는 않는다.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만약 필자가 선배임에도 불구, 후배들보다 더 많은 경험 혹은 능력을 쌓지 못해 후배들에게 진심으로 존중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의 책임이 맞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존중하는 것은 그들이 내가 살아보지 못한 시간을 살면서 얻었을 경험과 그것으로부터 생겼을 능력의 가치를 인정해서이지, 단순히 그들이 숨 쉰 시간을 기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실 그래서 필자는 부를 때든 불릴 때든, 언니·오빠같은 단어보다는 선배를 선호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더 '나의 의지'와 가깝기 때문이다. 언니·오빠는 오로지 숨을 쉰 나이로만 결정되는 호칭이지만, 선배는 학교에서 나보다 더 많은 경험을 쌓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호칭이다.그렇기에 물론 대학에 입학한 이래 너무 딱딱해 보인다는 여론에 따라 언니·오빠를 더 많이 쓰고 있긴 하지만, 대학 입학 이전 필자의 언니는 놀랍게도 전국에 사촌언니와 옆집 언니, 2명이었다.


  두 번째, 그 단어들에서 오는 책임감이 좋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나이가 어린 사람보다 많은 사람이 뭔가 나은 게 있기 때문에 존대 문화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존댓말, 혹은 언니·누나·선배 라는 호칭은 나를 존중하고 상급자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 소리를 듣고 싶다면, 상급자의 자격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경험이 더 많든지 능력이 더 있든지 해야 한다. 나를 언니·누나·선배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보지 못했던 몇 년의 시간동안 내가 무언가 더 배웠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인데, 존대받기를 원한다면 내가 내 시간을 허투루 쓰면 안 되는 것이다. 사실 필자는 그 생각을 동력으로 학창시절에 무척 열심히 살았다. 내 인생을 잘 가꾸고 싶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에는 '내 이름'에 대한 책임도 상당 부분 작용했다. 선배라는 이름이 붙었으면 선배처럼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필자의 행동 기준이었다. '선배'라는 이름이 붙었기 때문에 나는 '후배'들을 도와줄 마음이 생긴다. 일면식 없는 후배여도, 나는 나를 선배라고 인식하고 있는 후배중 하나라는 이유만으로 기쁘게 도울 수 있다.

 

 

지성은 선하고 관성은 악하다?


 

  물론 세상이 필자처럼 자칭 합리적이려고 노력하는' 꼰대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선배라는 호칭에서 오는어느 정도의 책임을 질 각오를 한 상태에서 존중을 바라는 입장이지만책임은 지기 싫은데 존중은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많이 있다그리고 그런소위 진짜 꼰대들의 존재 때문에 반나이주의와 같은 문화가 생겨나는 것 같다. 필자로서는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반나이주의에 반대하는 필자의 입장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본능이 아닌 지적인 사고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지성이라고 말한다. 이전의 본능적인 관습에 이성적인 반론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선후배 간의 위계를 모두 제거하는 반()나이주의 문화는 지극히 지성적인 사상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그에 맞서 해오던 것을 그대로 이어가려는, 필자와 같은 관성적인 사람들이 있다. 당신은 지금까지 필자의 지극히 관성적인 사고 구조를 여과 없이 들여다보았다. 무언가를 바꾸려는 시도에 관성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필자는 보수이고 변화를 가로막는 인물인 것일까?사회의 변화를 마주한 당신은 어느 쪽에 가까운 것 같은가? 지성인가, 관성인가?

 

 

[백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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