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린이를 만나는 이들을 위한 필독서 - 어린이라는 세계 [도서]

살아있는 한 모든 순간은 똑같은 가치를 지니기에
글 입력 2021.06.22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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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애들은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야. 아니 귀엽긴 한데, 기 빨려…. 귀여운 거로 치면 우리 집 달루가 훨씬 귀엽지.”

 

그렇다. 아이들에 대해, 짐짓 냉소적인 태도로 툭툭 내뱉는 저 말투와 무뚝뚝한 음성은 바로 나의 목소리다. 저 말에 대한 빈약한 변명이라도 해보자면, 매해 명절 때면 나는 내 동생까지 포함하여 7명의 사촌 동생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뭣도 모르는 어린 나이일 뿐이었는데, 뭐가 그렇게 귀여웠는지 동생들을 업고 다녔고 어화둥둥 어르며 뿌듯함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악몽은 애들이 도무지 집에 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7명의 아이들이 나를 좋아해서 놀자며 쉬지 않고 잠을 깨웠는데, 2박 3일, 길면 일주일까지도 함께 시간을 보내며 아이들은 내 기를 빨리게 하는 존재들이라고 짧게 생각하고 넘겼던 것 같다.

 

아이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며 툭 하니 뱉고 말아버리는 무심한 태도. 그 대상에 대해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며 만족하는 태도. 나는 이것을 경계한다. 신형철 문학 평론가는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라고 정의한다. 더 섬세해질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기를 택하는 순간, 타인에 대한 잠재적/ 현실적 폭력이 시작된다고. 폭력은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모른 척 할 수 있는 권리이고, 권력은 싫은 것을 싫다고 표현할 수 있는 힘이다. 그리고 권력을 가진 자가 별다른 이유 없이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은 차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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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만한 여유가 없다며,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공부한 후 목소리를 내겠다며, 무언가를 외면하던 무지한 나의 태도는 항상 후회를 불러일으켰다. 시험 기간인 자취생에게 설거지할 시간은 사치라며 매일같이 시켜먹던 배달음식과 무분별하게 사용했던 일회용품들이 그랬고, ‘결정장애’라며 장애를 열등함으로 나타낸 단어가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하면서도 대체어를 찾지 못해 계속 쓰고야 말았던 시절이 그랬다. “분명 후회하고 말 거야.” 훗날 나의 무지를 깨닫고 스스로를 끔찍하게 여기며 비난하고 싶지 않은 이기적인 마음으로 도서 <어린이라는 세계>를 집어 들었다.

 

 

 

우리는 모두 어린이였다


 

 

-그것도 맞는데, 지금도 묶을 수 있어요. 어른은 빨리 할 수 있고, 어린이는 시간이 걸리는 것만 달라요." (중략) 어린이는 나중에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도 할 수 있다. 시간이 걸릴 뿐이다. p.18

 

-버스를 타고 내릴 때, 문을 열고 닫을 때, 붐비는 길을 걸을 때나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머뭇거릴 때 어린이에게 빨리하라고 눈치를 주는 어른들을 종종 본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간단한 일이라 어린이가 시간을 지체하면 일부러 꾸물거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어렸을 때 기다려주는 어른을 많이 만나지 못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지금 어린이를 기다려주면, 어린이들은 나중에 다른 어른이 될 것이다. 세상의 어떤 부분은 시간의 흐름만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나는 어린이에게 느긋한 어른이 되는 것이 넓게 보아 세상을 좋게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를 기다려주는 순간에는 작은 보람이나 기쁨도 있다. 그것도 성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린이와 어른은 함께 자랄 수 있다. p.19

 

-어린이는 어른보다 작다. 그래서 어른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큰 어른과 작은 어린이가 나란히 있다면 어른이 먼저 보일 것이다. 그런데 어린이가 어른의 반만 하다고 해서 어른의 반만큼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가 아무리 작아도 한 명은 한 명이다. 하지만 어떤 어른들은 그 사실을 깜빡하는 것 같다. p.197

 

 

어린이날을 만드신 소파 방정환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적어냈던 어린이였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어린 날의 나는 나를 지켜보는 어른들 앞에서 무엇이든 잘해 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부모님이 심부름을 시키는 날엔 슈퍼에 가며 마치 구구단 공식을 외듯 “콩나물 하나, 두부 세 모, 우유 하나….”를 줄줄 읊으며 앞만 보고 걸었고, 혼자서도 할 수 있다며 두 팔에 힘을 주고 장바구니에 하나하나 담아냈다. 교육방송 프로그램이 끝날 때면 마지막에 방송하는 춤을 따라 추며 그들이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해서 틀리지 않으려 갖은 애를 쓰던 시절이 있었다. 뉴스를 볼 때면 경청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앵커들을 보며 눈도 깜짝하지 않으려 노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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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내가 그 시절, 누군가를 멋진 어른이라고 여기며 고마워했던 순간은 그들이 나를 미숙하다고 생각하여 도와줄 때가 아니었다. 지켜보고, 천천히 하라며 기다려주었을 때였다. 빠르고 능숙하게 해내기를 요구받았던 어른들의 눈에, 어린이는 무언가를 해 줘야 하고, 지켜 줘야 하고, 도움을 주어야 하는 대상으로 자리한다. 그러나 때로 그 사실은 어린이가 ‘지금도’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경험까지도 성급히 뺏어버리고는 한다.

 

어른이 된 우리들은 모두 어린이였던 시절이 있었으나, 그 시간을 겪어본 적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오히려 그 사실이 어린이를 쉽게 대상화하고 일반화하는 이유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린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김소영 작가는 아이들을 한 사람의 어른을 대하듯이 존중하면 된다고 답한다. 어린이를 단순히 덜 자란 존재, 미완성의 존재, 피어보지 못한 존재로 규정하는 것이 아닌, 한 인격체로 존중하며 사회가 만든 기본형 안에서 우리의 속도에 맞추라고 강요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내가 아는 삶은 그런 게 아니다. 삶의 순간순간은 새싹이 나고 봉우리가 맺히고 꽃이 피고 시드는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지나고 보면 그런 단계를 가졌을지 몰라도, 살아있는 한 모든 순간은 똑같은 가치를 가진다. 내 말은 다섯 살 어린이도 나와 같은 한 명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p.163

 

 

어린이날은 원래 5월 1일 노동절로 정해졌었다고 한다. 어린이도 노동자들의 해방과 같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을 기리기 위함이었다고. 어린이도 성인과 동등한 인권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방정환 선생님은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린이의 세계는, 피어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 아니다. 살아있는 모든 순간은 그 이유 자체로 존중 받아야함이 마땅하다.

 

 

 

노키즈존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어린이는 공공장소에서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어디서 배워야 할까? 당연하게도 공공장소에서 배워야 한다. 다른 손님들의 행동을 보고, 잘못된 행동을 제지당하면서 배워야 한다. 좋은 곳에서 좋은 대접을 받으면서 그에 걸맞은 행동을 배워야 한다.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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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앞의 문단에서 어린이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고는 했지만, 어린이에 대해 뭣도 모르면서 노키즈존에 대해서는 반대의 입장을 취해온 것 같다. 어린이는 여러 사회적 약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노키즈존, 낫 배드 패런트 존’ 이 단어의 탄생에는 어린이를 배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양육자의 인권마저도 공공연하게 무시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키즈존은 왜 생겨난 것일까?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과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로 인해 생겨난 것인가? 그렇다면 어른들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어른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인지. 금요일 저녁, 지하철을 타거나 근처의 음식점만 가도 공공장소에서 술에 취해 큰 소리로 떠드는 어른들을 쉽사리 볼 수 있다. 저자는 말한다. ‘세련된 노인’, ‘목소리가 작은 여성’만을 손님으로 받는다면 당연히 문제 삼을 일을 왜 그 대상이 ‘어린이’라는 이유로 찬반 논의로 이루어져야 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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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노키즈존 때문에 입장거부를 당했다는 어린이들의 인터뷰를 살펴보았다. 생일을 맞이하여 음식점을 가는데 1시간 이상의 거리를 걸었다는 아이를 보았다. 이후, 핫하다는 카페를 돌아다닐 때마다 노키즈존이라며 문 앞에 걸려있는 문구들이 더욱 눈에 띄였다. 그동안은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양육자도 아니었고 어린이도 아니었기에. 어린이들은 어떤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거부를 당하고 배제되었다.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민폐가 되기도 했다. 물론, 아이들은 배워야 한다. 공공장소에서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다름 아닌 공공장소에서 말이다.


내가 어릴 때는 노키즈존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다. 아마 지금 노키즈존이 있어야 한다며 팻말을 내세운 어른들 또한 어린이라는 이유로 식당 앞에서 문전박대 당한 경험은 없을 것이다. 어린이들은 빨리 배운다. 지금의 어린이들은 그때의 우리보다 차별과 배제에 익숙해지지 않았을까 염려된다. 그들이 자라서 무언가를 반대하는 존을 만들지 않도록, 어린이라는 세계를 존중하며 그들의 품위와 인격에 대해 생각해본다. 버스에서 내리는 어린이를, 신발끈을 묶는 어린이를 천천히 기다리자고, 조급함으로 그들을 대신하거나 재촉하지 않는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나무가 되고 이윽고 울창한 숲을 이뤄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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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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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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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드리
    • 에디터님의 글을 보니 어디터님의 성장과정이 보이는것 같습니다.
      지금은 어린이도 아니고  양육자도 아니기 때문에  노키즈존에 대한 이정도겠지만  아이를 직접 양육하는 부모입장에선 좀더 화가날수도 있을것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외각의 한 베이커리 카페에 여러공간중에 한 공간이 노키즈존이있습니다.  어른들(?)끼리 독서모임 있어 그곳에갔을때만 해도 아무생각없었는데 에디터님의 글을 읽다가 그곳을 생각해보니 사방 벽면이 깨질수 있는 여러장식품들이 있는곳이었읍니다. 노키즈존이라는 문구앞여 그곳이 노키존존으로 할수밖에 없는 이윳늘 적어놓았더라면 좀더 어른답게 아이한테 설명해줄수 있을거라 생각이들었습니다.  어른들은 큰소리로 떠들면서 얘기해도 노어른존은 없으니까 이런카피 문구를  해놓아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에디터님 글에. 공김되는 여러광고카피가 생각납니다. 공감되는글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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