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균열을 메우는 사랑의 힘- 이유리 작가 '빨간 열매' [도서/문학]

불가능한 사랑은 존재하는가
글 입력 2021.06.17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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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삶의 균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문학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타인 혹은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갈등을 마주하고 이는 삶의 균열을 초래한다. 작가는 갈라진 틈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서사를 이끈다. 하지만 202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이유리 작가의 ‘빨간 열매’는 어딘가 다르다. 갈라진 틈을 파고들기보단 능청스레 그 틈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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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아버지는 죽기 전 자신의 유골을 화분으로 만들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나’는 그 유언을 실행하기로 한다. 아버지의 뼈와 흙을 토양으로 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 다음날 아버지의 나무는 나에게 태연히 말을 건다. 나는 흠칫 놀라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당연한 듯이 아버지와 함께 TV를 보고, 구루마를 이용해 같이 산책도 한다. 산책하러 나가던 어느 날 P를 만난다. P는 나처럼 한 그루의 나무를 구루마에 올려놓은 채 산책을 하고 있었다. 갑작스레 아버지가 P의 나무에 말을 건다. P의 나무에서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를 듣자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P는 나무를 자신의 어머니라고 소개하고, 나도 P에게 아버지를 소개한다.

  

같은 처지인 나와 P 그리고 아버지와 P의 어머니는 급격히 가까워진다. 시간이 지나 아버지와 P의 어머니가 하나의 줄기로 엮어지는 것을 본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아이가 생길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몇 개월의 시간이 지나고, 하나가 된 나무에서 빨간 열매가 열린다. 나와 P는 이 열매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한다. 아버지와 P의 어머니는 너희들 동생이니 알아서 하라며 태평히 말한다. 갓 태어난 녀석을 땅에 다시 묻기에는 거부감이든 나는 결국 열매를 반으로 갈라 P와 나누어 먹기로 한다. 그날 밤 나는 붉은 공을 쫓아다니다 주머니에 공을 넣는 꿈을 꾼다. P는 혹시 태몽이 아니냐고 묻는다. 나는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독자가 느끼기에 충격적인 사건들이 그녀의 삶에 벌어지지만, 그녀는 마치 흔히 벌어지는 일인 마냥 태연하다. 시종일관 능청스러운 그녀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작가는 독자의 시선을 갈등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갈등에 집착하지 않고 소설을 다시 보게 되면, 그녀가 자신에게 닥친 삶의 균열을 사랑으로 메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처음에 보잘것없던 나무는 혼자 무럭무럭 자라 우듬지에서 반드르르한 연둣빛 가죽 같은 새잎이 올라오고 줄기도 굵어지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내가 거실에 앉아 빨래를 개고 있을 때 갑자기 베란다에서 아버지가 말했다.

 

물.

 

나는 깜짝 놀라 잠시 멍해졌다가 뭐야 이러면 살아 있을 때랑 똑같잖아, 하고 투덜거리며 컵에 찬물을 반만 떠다가 화분에 갖다 부었고 아버지는 만족스러운 듯 잎을 천천히 끄덕이며 물을 마셨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모습의 아버지인지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존재 자체이다. 존재가 부재로 바뀌지 않는 한, 존재의 모든 변화는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무의미해진다. 그녀는 무의미한 것들에 신경을 쏟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의 삶을 균열시킬 뻔했던 일련의 사건들을 무시한 채 아버지와의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관계가 P와 P의 어머니에게까지 확장되는 순간, 독자들은 두 사람 그리고 두 나무의 사랑이 기이해 보이지 않는 착각에 빠진다. 존재에 대한 흔들림 없는 사랑이 바로 이들이 삶의 균열을 메우는 방식이며 동시에 이 작품의 서사를 이끄는 아름다운 힘이다.

 

사랑은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다. 헌신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등등. 사랑이 갖는 이름의 개수는 곧 그것의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한다. 사랑이 어떤 모습을 띠던,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든 불행하게 만들든 간에, 불가능한 사랑은 세상에 없는 이름이다. 이유리 작가는 사랑의 무한한 가능성과 그 힘을 능숙하게 표현하는 능력이 있다. 작가가 다루는 사랑의 힘에 매료되는 경험은 신기하면서도 유쾌하다. 이를 느끼고 싶은 분들을 위하여 본 글의 '빨간 열매'와 작가의 다른 작품인 '둥둥'을 권하며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p.s '둥둥'은 2020년 10월 발행된 릿터 26호(민음사)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안균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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